2020년 군종교구 사목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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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1,19)

I.

주님 안에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구 신자, 군종사제 그리고 수녀 여러분, 저는 금년의 사목표어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로 정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은 책이 유명한 “준주성범”(그리스도를 본받음)이라고 합니다. 이 책의 저자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 책의 첫 장에서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를 서두로 인용한 다음, 그리스도의 말씀,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을 것이다.”(요한8,12)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우리가 만약 우리 자신의 기만적인 마음과 정신에서 벗어나 참된 이해와 자유를 갈망한다면 그분의 삶을 우리가 얼마나 철저히 본받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준주성범 1장)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특히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야 할 공통의 소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도 성 바오로께서 사용하신 “본받음”이라는 용어 대신 “발자취를 따른다.”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이 표현이 좀 더 가깝고 직접적이고 절박한 요청의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승천 직전 베드로 사도와 대화하시면서 그에게 이 지상의 최고 목자직을 수여하시는데, 그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명령의 말씀이 바로 “나를 따라라.”(요한 21,19)였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 너는 내 발자취를 따라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첫 제자들을 당신의 제자직에 부르실 때에도 “나를 따라라.”(요한 1,43)고 같은 명령의 말씀을 하셨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사제나 수도자만이 아니고 당신의 모든 백성에게 “나를 따라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 소명입니다.


II.

1. 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감에 있어 길잡이가 될 복음서 말씀을 마르코복음 1장 32-39절에서 찾았습니다. 이 부분은 주님의 초기 복음 선포 생활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같은 내용이 루카복음 4장 40-44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마르코복음의 이 기록(1,32-39)이 좀 길지만 인용하고 싶습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쫒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쫒아내셨다.”

네 복음서 전체를 통해, 특히 마르코복음의 이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 곧 복음 선포의 삶이 세 개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됩니다.

2. 첫째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파견되어 오신 후 승천하시는 순간까지 아버지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친교를 가지셨고 그것은 바로 당신의 기도를 통해서였습니다. 아버지와의 친밀하고 일치하며 아버지께 순종하는 삶의 추구 - 이것이 우리 주님의 삶에서 최우선 순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이 마르코복음서 기록은, 주님께서 전날 저녁 늦게까지 사람들, 특히 많은 병자들을 만나 치유해주신 바쁘고 피곤하신 하루를 마치시고 잠자리에 드셨을 텐데, 새벽 일찍 일어나시어, 외딴곳에 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루를 기도로써 시작하시고 이 기도는 바로 아버지와의 친밀한 영적 만남의 시간이 되어주었습니다. 이 기도의 삶이 아버지께 완전히 순종하는 삶으로 이끌어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루의 시작 때만이 아니고 일상에서 자주 그리고 많은 시간 기도하셨습니다. 기도 생활이 주님의 삶에서 최우선을 차지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감사, 찬미, 청원의 기도를 많이 바치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실 때, 먼저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셨고”(마태 14,19). 최후만찬 때 “감사를 드리시며”(루카 22,17)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으며, 요한복음이 기록한 주님의 긴 고별사(요한 17장)는 긴 청원기도로 끝나는데, 여기서 당신 자신과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청원기도와 관련해서는 다음 세 단계를 거처 점점 간절한 기도를 바치는 형식도 제시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주님께서는 우리 청원기도에 하느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심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 청원기도의 내용에 있어 어떤 한계도 두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이기적인 목적의 지향도 허락하셨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겟세마니 동산에 가시어, 크나큰 고뇌 속에 바치신 다음의 기도,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가 이 청원기도와 관련하여 한 가지 간접적인 지침을 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내가 혹은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이든 청할 수 있지만, 그에 대한 응답은 결국 하느님의 뜻에 의탁하거나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감사의 기도, 찬미의 기도만이 아니고 청원기도를 바침에 있어서도 모범을 보이시면서 동시에 이들 기도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 종류의 기도를 흔히 ‘자유기도’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자유롭게 바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세 가지 자유기도 외에 경문을 읽으면서 바치는 소위 ‘염경기도’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염경기도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주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친히 가르쳐주신, 가장 모범적인 청원기도인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기도와 염경기도를 균형 있게 바칠 필요가 있습니다. 염경기도의 대표적인 것이 주님의 기도를 포함되어 있는 ‘주모경’과 ‘묵주신공’입니다.

주님께서는 개인으로 바치는 기도만이 아니고 공동으로 바치는 기도도 강조하셨습니다. 사실 ‘주님의 기도’도 이 기도를 바치는 주체가 ‘내’가 아니고 ‘우리’임을 발견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 19-20)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 개인이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고 공동으로 기도 바치는 중요성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이 함께 청원기도를 바칠 필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공동체성을 얼마나 중시하셨는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고요히 개인으로 기도 바치는 것만이 아니고 성당이나 혹은 가정에서 공동체로서 함께 기도 바치는 노력도 해야 하겠습니다. 제가 4년 전 우리 교구의 몇몇 신부님과 이냐시오회원들과 함께 동티모르를 방문했을 때, 살레시오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보육원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도착부터 떠나는 순간까지 거의 한 시간 동안 이 보육원에 사는 남녀 어린이들이 우리를 위해 계속 불러준 노래들이, 단순한 환영을 넘어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처럼 느껴져 눈시울이 뜨거울 정도로 감동을 체험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공동으로 자주 혹은 끊임없이 바치는 감사와 찬미와 청원기도가 하느님을 감동시켜드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은 활동의 주님이시자 기도의 주님이셨습니다. 기도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기초요, 주님을 따라감에 있어 역시 가장 중요한 기초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은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친밀함과 일치의 관계, 주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는 것, 주님의 가르침과 명에 충실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요 길이 되어 줍니다.

3. 둘째는, 세상 곳곳에 가서 구원의 말씀, 곧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우리 주님의 삶에서 또 하나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 마르코복음서를 보면, 주님께서 복음 선포에 대한 사명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즉시 알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파견된 목적이 바로 복음을 선포하여 모든 이를 구원으로 이끄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복음 선포는 주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소명으로 반드시 실천해야 할 의무이고 책임임을 밝히시면서, 당신이 지니신 복음 선포의 막중한 사명감을 표현하고 계십니다. 이 역시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사제와 수도자가 공통으로 지닌 소명이며,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삶에서 중요한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이 복음 선포는 평신도의 경우에는 주로 모범적인 삶의 표양을 통해서 간접으로 복음 선포를 하게 되지만, 사제나 수도자의 경우는 모범적인 삶의 표양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좀 더 적극적으로 구원의 하느님 말씀인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제가 확신하는 것은, 어떤 일에서든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정성을 쏟아 땀 흘리며 행할 때, 주님께서 보다 많은 결실을 주시고, 복음 선포의 경우, 보다 많은 영혼을 구원으로 이끌게 된다는 점입니다. 위대한 복음의 사도 성 바오로께서 당신이 지극히 사랑하고 신뢰했던 제자 티모테오 주교에게 하신 다음 말씀을 우리 모두가, 특별히 군에 대한 복음 선포 최일선에 있는 저와 군종사제들이 거의 긴장하는 자세로 듣고 실천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또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리고 그분의 나타나심과 다스리심을 걸고 그대에게 엄숙히 지시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1-2)

이 마르코복음서에서 주님의 말씀,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우리 군종사제들에게 매우 현실적인 제안입니다. 많은 군종사제들은 넓은 지역의 군부대 선교를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이 움직여야 하고, 여러 지역, 특별히 벽오지의 부대를 찾아가 장병들을 만나야 합니다. 많은 경우 3-5명 정도 밖에 만나지 못하지만 그래도 찾아갑니다.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겠다는 사명감 때문입니다. ‘병사들 가까이’ 가 마치 군종사제의 구호처럼 느껴지는데, 이것이 국방부가 원하는 바이고 이 요청은 지극히 합당합니다. 이는 물론 젊은 병사들에게 영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우선적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고, 병사 외에도 군의 간부, 지휘관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에게도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이로 해서 군종사제들의 일이 늘어나 시간 소모도 많고 육체의 피곤도 더 느끼지만 그래도 보람 있는 일이고 꼭 수행해야 할 일입니다. 장기복무 후 전역한 어느 군종사제가 저에게 “주교님, 저는 동해안 산악지역의 험한 곳에 있는 부대 장병들을 방문하면서, 어떤 때는 겨우 두세 명이 모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큰보람과 소명을 느껴, 장기 복무를 신청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가끔씩 떠오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친히 이곳저곳 많은 곳을 순회하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찾아 나서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사제들에게도 이 복음 전파 방법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 복음 선포와 관련하여 한 가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복음 곧 구원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직접 간접으로 선포해야 하기에 복음의 핵심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이 점에서 주님의 말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와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게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를 되새기고 싶습니다.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의 중심이 되십니다. 저는 복음의 중심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시어 죄인인 우리를 회개의 길, 새로운 인간의 길,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열어주셨는지를 로마서 5장에서 발견합니다. 로마서 5장 6-10절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나약했을 때, 우리가 불경했을 때,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 당신의 피로 우리를 의롭게 해주시어 구원의 희망을 주셨음을 역설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알게 되는 유일한 길이시며 구원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무엇보다도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쓰고, 외우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삶을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이 노력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보다 충실히 따르게 해줍니다.

4. 셋째로, 주님께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만이 아니고 세상의 여러 이유로 해서 고통받는 이들을 만나주시고 위로하시고 치유해주시는 것을 복음 선포의 또 하나의 방법이요 당신 삶의 또 하나의 기초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고통받는 이들을 만나주시고 위로해주시고 치유해주시는 것은 무엇보다 당신 사랑의 표현이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셨는데, 특별히 병자나 굶주리는 이들이나 여러 종류의 장애인 그리고 여러 이유로 해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우선적인 사랑의 관심을 지니셨습니다. 네 복음서에는 너무 많아 짜증이 날 정도로 병자들이 주님을 찾아와 치유를 호소하는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병자들에게 친절하고 헌신적인 치유의 봉사를 하셨습니다. 마르코복음서 1장은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주님께 데려와, 주님께서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고 많은 마귀를 쫒아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께서 최후 심판 때 누구를 당신의 오른쪽 곧 구원의 축복 자리에 앉히실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굶주린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나그네 된 사람들, 헐벗은 사람들, 병든 이들, 감옥에 있는 이들을 돌보아 주는 것이 바로 당신 자신에게 해주는 것이라면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최후만찬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주님께서는 당신이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주시는 이 새 계명이 너무도 중요하다고 보시어 두 차례 더 언급을 하고 계십니다(참조: 요한 15,12.17). 두 번째의 언급(요한 15,12)에서는 새 계명이라는 표현대신 “나의 계명이다.”라고 하시면서, 먼저 언급하신 새 계명이라는 표현을 보충 강화하고 계신다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고유 계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계시는 듯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전에는 구약의 레위기(19,18)에 언급된 계명,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를 첫째가는 계명인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이어 둘째 계명으로 제시하시면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이웃 사랑을 강조하여 말씀하셨지만, 이제 당신 생애를 마치시게 되는 마지막 순간에 와서는 당신 자신이 주시는 계명, 곧 새 계명을 주셨고, 이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당신의 서간에서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4,7)라고 하시면서, 우리 서로 간의 사랑도 사람에게서가 아닌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이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삼으신 데서 드러났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과 깊이 연관되고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우리 개인의 정감에서 흘러나오는 변할 수 있고 또 한계를 지니는 그런 사랑을 초월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끊임없이 실천하셨고 특별히 우리 죄를 사하시고자 수난당하시고 희생 제물로 당신을 바치신 그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할 것을 명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변할 수 있고 한계를 지니는 우리 인간의 자연적 사랑을 초월하여, 주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을 이해하고 가슴에 새기고 그 사랑에 몰입하면서 서로 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희생을 포함한 무한한 사랑, 항구한 사랑, 순수한 사랑을 보여주신 우리 주님의 사랑을 본받으면서 우리도 무한한, 항구한 그리고 순수한 사랑의 실천으로 나가도록 합시다. 이래서 형제적 사랑의 주요 요소인 친절과 겸손과 배려도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가식을 버리고 진실한 친절과 진실한 겸손과 진실한 배려가 되도록 합시다. 이 사랑이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 특히 고통받는 이들에게 실천되기를 노력하고 그래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늘 청하도록 합시다.

모든 사람, 특히 여러 이유로 고통받는 이들을 사랑하고 돌보아주는 것이 주님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우리의 공통 소명임을 깨닫도록 합시다.

5. 이제 저는 우리 주님께서 수난과 십자가형에 의한 죽음의 고통을 받기 시작하신 당신 생애의 마지막에서 보여주신 ‘고통의 인내’(혹은 고통을 받아들이시는 것) 모범을 보여주셨음을 추가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을 따르기 위해 고통을, 무엇보다 자신을 버리는 고통을 받아들여야 함을 당신의 복음 선포 생활 중에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고 말씀하셨고, 당신 열두 제자에게는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를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승천 직전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말씀, “나를 따라라.”(요한 21,19)는 단순히 당신이 맡기신 복음전파의 일을 수행하는 것만이 아니고 당신 때문에 받을 수 있는 박해와 고문과 심지어 죽음의 고통까지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열심하고 겸손했지만, 육신의 고통이라는 두려움을 극복 못 하고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 사도에게 “너는 이제부터 이런 잘못을 범하지 말고, 나와 복음 때문에 어떤 고통도 심지어 죽음의 고통마저 받아들이면서 내가 밟은 고통의 발자취를 밟으면서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암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육신의 병으로 인한 고통이나 심지어 어떤 심리적 고통은 전문 의사로부터 치유를 받아야 하겠지만, 우리 삶에서 오는 여러 고통을 주님께서 겪으신 고통을 되새기면서 받아들이고 견디고 더 나아가 고통에서 교훈을 얻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도 십자가형이라는 무서운 죽음을 바라보면서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셨고 그래서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로 끝내지 않으시고 연이어 다음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죽음의 고통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을 아셨을 때 기꺼이 받아들이시어 말할 수 없는 고문과 수치를 당하시고 십자가형으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을 받아들임은 부활이라는 영광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니까 고통에서 영광으로의 축복을 누리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이 밟아 가신 그 고통의 길을 충실히 따라갈 때 영광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그 영광은 바로 구원의 영광입니다.


III.

주님 안에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구 신자, 군종사제 그리고 수녀 여러분, 우리 모두 군인으로서 군인 가족으로서 군종 사제로서 그리고 군종 사목에 임하는 수녀로서 각자의 직무에 충실하도록 하면서, 우리가 공통으로 밟아가야 할 길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충실히 따라가도록 합시다. 앞에서 말씀드린 네 가지 차원의 따름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하여 하느님을 기쁘시게해 드리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교회에 영광을 드리도록 합시다. 이 따름이 충실하면 할수록 우리 각자의 덕망은 증가되고, 이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교회에 대해서만이 아니고 세상에 대해 국가에 대해서도 위대한 기여를 하게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가장 충실히 따라가신 우리 주님의 어머니이시고, 교회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본받으면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자고 권고드립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인류 가운데 가장 큰 영광과 특전을 누리신 어머니이시지만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신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무엇보다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참혹한 고문을 당하시고 가장 참혹한 사형 방법인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되는 아드님을 눈으로 바라보셔야 하는 고통을 받으신 어머니이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고통을 감내하시면서 끝까지 아드님 곁에 머무시면서 아드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발자취를 충실히 따를 수 있도록 성모님의 도움을 끊임없이 청하도록 합시다.

2019년 대림 제1주일에

천주교 군종교구장 유수일 F. 하비에르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