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군종교구 성탄 메시지
주교 이미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14)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탄절을 맞이하여, 먼저 국토방위에 수고하는 모든 장병들에게 아기 예수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또한 군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군종사제와 수도자, 군인 가족 그리고 군종교구에 아낌없는 사랑과 후원을 보내시는 신자 여러분들께도 성탄의 은총을 전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성탄절 즈음이면 오래전에 병사로 군 복무를 하던 시절을 떠올리곤 합니다. 추운 겨울, 군 생활을 하며 성탄절을 맞이했던 느낌은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사회와 가정, 특히 신학교 생활로부터 단절되었다는 고립감과 함께, 밖의 친구들은 얼마나 신나게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있을까 하는 상상에 울적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더구나 제가 있던 부대에는 성당도, 군종신부님도 안 계셨기에 성탄 밤 미사 참례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 지금 전후방 각지에서 임무 수행 중인 장병들도 당시 신학생이었던 저와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게다가 근 2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는 소위 ‘코로나 블루’라고 하는 일종의 우울증, 공허감과 같은 정신적 폐해를 낳고 있습니다.
이러한 힘들고 암울한 시절에 우리의 희망이신 구세주께서 작은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탄생하십니다. 어둠 속에 ‘빛’으로 우리를 비추시고 기쁨과 생명을 주시려 오늘 이 밤, 믿는 이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성탄: 육화(肉化)의 신비

예수님의 탄생 사건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신비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예수님의 또다른 이름인 ‘임마누엘’,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 1,23)라는 것에서도 육화의 신비가 잘 드러납니다. 보이지 않는 지고의 하느님께서 인간들 가운데 오시고, 그것도 가장 낮은 자리에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탄생하셨습니다. 황금마차를 타고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시며 장엄하게 오실 수도 있었는데 왜 굳이 비천한 곳에, 그것도 ‘작고 약한 자’의 모습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을까요? 이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사랑의 신비’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전철에서 앞을 못 보는 형제님이 개신교 성가를 부르며 도움을 청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성가의 끝 소절 가사가 ‘ … 벌레만도 못한 내가 용서받기 원합니다….’라는 것으로 기억됩니다. 우리 인간을 벌레에 비유한 것에 기분이 상할지 모르지만, 하느님 앞에 인간의 처지는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 인간을 위해 하느님은 몸소 그 낮은 자리에 우리와 함께 해주셨습니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이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은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더욱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분의 탄생이 이스라엘의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그리고 가장 누추한 마구간에서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탄생의 소식은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전해집니다. 당시 목자들은 마을에서 떨어진 들판에서 살면서, 낮에는 풀을 먹이고 밤에는 맹수의 무리로부터 양 떼를 지키던 외로운 이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교회가 왜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 가장 먼저 사목적 배려를 가져야 하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오시는 아기 예수님

사랑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이처럼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지극하시며 그 사랑의 증표로 당신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이에 우리는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자세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감사’의 자세로 자신을 개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의 모범을 우리는 성모님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메시아를 잉태하리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언에 마리아는 잠시 당황하며 의문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곧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시며 믿음의 응답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모찬가(마니피캇)를 통하여 하느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 탄생하신 예수님은 이제 내 마음 안의 작은 마구간에서도 태어나길 원하십니다. 코로나19로 어수선한 시절이기에 혹 성탄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셨다면, 지금부터라도 내 마음 안에 구유를 준비하여 그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새해를 살아나가심이 어떠신지요? 마치 성모님께서 ‘믿음과 감사’ 안에 예수님을 잉태하고 탄생시키신 것처럼 말입니다.

내 마음속 구유에 성체를 모시는 삶

지난 2년간 코로나19의 시절을 거치면서 우리의 신앙생활도 많이 쇠퇴하였습니다. 각종 종교행사들이 비대면으로 실시되면서 우리 신앙공동체의 모습은 주님 육화의 정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피상적이고 개인적인 모습으로 바뀐 면도 없지 않습니다.
이에 저는 우리 군종교구 공동체가 다가오는 2022년 한 해 동안 주님의 육화/강생의 신비를 묵상하며, ‘믿음과 감사’의 생활로 다시금 발돋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성체성사’의 신비와 사랑으로 복귀하기를 당부드립니다. 예수님의 몸인 ‘성체’는 우리 신앙의 핵심이며 양보할 수 없는 최상의 영적 가치입니다. ‘성체성사’ 안에 예수님의 탄생과 복음 전파의 삶, 그리고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성체성사’를 떼놓고서는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며 마치 동방박사들이 예물을 바쳤던 것처럼 우리도 새해부터는 미사에 빠짐없이 참례하고 정성껏 성체를 모실 것을 영적 예물로 약속드립시다. 그렇게 내 마음 안에 준비된 구유에 성체를 모시고 살아가겠노라고 구유에 누워계신 예수님께 말씀드립시다.
아울러 전 인류를 뒤덮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의 기세가 꺾이고, 대면 미사를 통해 성체를 공경하고 배령하는 새해가 되도록 성모님께도 전구를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장병, 군 가족, 수도자, 사제 여러분!

캄캄한 방 안에 전등 스위치를 올리면, 어둠은 자취를 감추고 광명이 가득 차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 모두에게 빛이 되고, 희망과 기쁨이 되도록 합시다. 그리고 이 생명의 빛을 나만, 내 가족만 지닐 것이 아니라, 등경 위에 올려놓아 주위 모든 사람을 비추도록 합시다. 내 주위의 고통 중에 동료, 이웃의 사정을 살피고 함께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쌓인 시기와 미움, 그리고 냉소와 비관적 생각을 말끔히 씻어 버리고 자신과 이웃을 사랑으로 대하는 새해가 되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또한 예수님을 낳아주시고 성체성사와 일치하여 계신 어머니 마리아께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하는 충만한 삶으로 인도해 주십사 전구를 청하도록 합시다.

다시 한번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드리며, 성탄의 축복과 평화가 여러분 개인과 각 가정에 충만히 내리시기를 기도합니다.

2021년 주님 성탄 대축일
천주교 군종교구장 서상범 티토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