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교회의 문헌
2020-07-09 11:01
2020-07-09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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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인권 주일(1999년 12월 5일) 정의평화위원회 담화

제18회 인권 주일(1999년 12월 5일) 정의평화위원회 담화

오직 하느님만이 생명의 주인,
사형제도 폐지로 생명의 문화를 가꿉시다


1. 하느님의 모상대로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인간(창세 1,26~27)은 그분의 피조물 중 가장 존귀한 존재로서 그 생명 또한 존엄합니다. 따라서 창조주가 아닌 어느 누구도 인간의 생명을 박탈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국가 또는 어떤 ‘권위’에 의해서 사형제도가 존속해 온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죽음의 문화’임에 틀림없습니다.

2. 18세기까지 사형은 극형인 동시에 핵심적 형벌이었으며, 19세기 전반기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각국의 형사입법은 사형을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용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 서양에서 사형의 제한시대를 열었다면, 20세기 후반에는 사형 폐지의 방향으로 진전돼 왔으며, 1997년 현재 법률상 또는 사실상 사형 폐지 국가는 모두 98개국입니다.
1948년 세계 인권선언에서 생명권 존중에 대한 입장을 천명한데 이어 ‘유엔 인권규약’에서는 “모든 인간은 천부의 생명권을 가지며, 이 권리는 함부로 박탈당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사형 존치국이라 할지라도 사형은 가장 극악한 범죄에 한해서만 선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규약은 또한 사형 폐지가 바람직하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일반적인 사형 폐지를 지지하고, 사형 폐지를 향한 모든 조치가 생명권의 향유라는 점에서 진보로 간주된다고 천명했습니다.
1980년대 이후 유엔과 국제사면위원회 등 여러 기구와 단체들이 사형을 폐지하거나 최소한 사형집행의 중지를 달성하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1989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한 ‘사형 폐지를 목적으로 한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 조약’의 제2선택 의정서는 인권 규약상의 생명권 개념에 사형 폐지를 당연히 포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3. 사형 폐지를 향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95년 3월 25일에 발표한 회칙 「생명의 복음」은 “사회적 측면에서 보아 사형을 일종의 ‘정당 방위’라고 하는 경우에조차도, 사형제도에 대한 공적인 반대가 커지고 있다는 징후가 있다.”(제27항)고 지적하고 “범죄자를 사형에 처하는 극단까지 가서는 안 된다.”(제56항)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회칙 내용은 1997년에 완간된(라틴어판) 세계 표준 교리서인 ‘가톨릭 교회 교리서(제2267항)에도 그대로 적용해서 모든 신자들이 이 정신에 따라 살고 있고, 같은 해 제30차 세계평화의 날 담화(5항)에서 교황은 “악행을 저지른 자들이라 하더라도 어떠한 형벌이든 범죄자들의 양도할 수 없는 존엄성을 말살할 수는 결코 없다.”면서 “회개와 갱생의 모든 기회가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고 천명했습니다.

4. 새 천년기의 시작을 앞두고 가톨릭 교회에서는 ‘2000년 대희년 한 해만이라도 사형집행을 중지하자.’는 취지에서 서명운동을 전개해 유엔에 청원했고, 마침내 1999년 유엔총회는 사형제도 반대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교황청은 성명(유엔주재 교황대사 레나토 마르티노 대주교, 1999.11.2.)을 통해 “생명권은 양도할 수 없는 인간의 권리이기 때문에 유엔 결의안은 인간 존엄성과 생명의 신성함을 확고히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범죄에는 효과적인 처벌이 뒤따라야 하지만 처벌의 목적은 올바른 시민을 만드는 교화(敎化)에 있다.”면서 “아무리 잔악한 범죄자라도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5. 세계가 이렇듯 사형 폐지 쪽으로 기우는데도 아시아 일부 국가와 미주지역 일부에서는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1996년 한 해 동안 무려 4,367명의 사형수에게 형을 집행한 나라가 있는가 하면, 사형이 언도된 범죄의 종류 또한 68가지나 되고, 탈세와 도박, 중혼, 주택침입 강도, 가짜 영수증 발행, 호랑이 밀렵, 소 도둑, 낙타 도둑 따위도 사형에 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극형이 아닌 다른 형벌로도 다스릴 수 있는 범죄인데도 최후의 수단까지 동원하는 것은 명백한 인권 유린입니다.
미국의 경우 1976년 이후 1998년까지 486건의 사형선고 가운데 평균 7건 중 1건이 무죄로 입증됐으며(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 1998.11.15.), 일리노이주의 경우 20건의 사형선고 가운데 9명이 나중에 무죄로 판명되었습니다. 잘못된 판결의 희생자는 대개 소수민족이고, 경제적 능력이 없어 유능한 변호사를 구하지 못해 죄인이 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오판으로 인한 사형선고와 집행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자료들은 사형이 무기형보다 더 큰 범죄억제 효과가 나타난다는 증거를 보여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사형을 폐지한 주가 사형을 존치한 주보다 더 낮은 살인사건 비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형이 사회악의 근원을 영구히 제거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도 불합리합니다. 범행 당시에는 ‘사회악의 근원’이었지만, 영구히 사회악 자체였던 것은 아닙니다. 회심하고 개전의 정을 보이면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형수들을 우리는 많이 보고 있습니다.

6. 우리나라도 금년 광복절 특별사면에서 5명의 사형수에 대한 무기징역으로의 감형이 있었으나, 사형제도를 여전히 실시하고 있는 세계 90여 개국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사형은 보편적으로 인정된 인간의 생명을 무시하는 행위로서, 가장 잔인하고 비인도적이며 불명예스러운 형벌이란 점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사형으로 폭력을 이길 수는 없으며, 이는 보복과 복수를 우선 순위에 놓는 행위일 따름입니다. 그보다는 관용과 용서, 사랑과 정의의 실현으로 범죄자들이 진정한 회개를 통한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데에 도움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새로운 천 년대를 열어 가는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 모두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여러 형태의 반생명적인 장치나 제도를 과감히 혁파해서 생명존중의 문화를 가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오늘 금세기 마지막 인권 주일을 기해 우리 나라도 사형제도를 폐지할 것을 국민과 정부에 호소하는 바입니다.

1999년 12월 5일 제18회 인권 주일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박 석 희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