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교회의 문헌
2021-04-16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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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 인간 존엄과 민주화를 향한 호소와 결의

인간 존엄과 민주화를 향한 호소와 결의

 

우리는 오늘의 우리나라 현실이 존엄성을 지닌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치욕과 암흑, 그 자체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상 유례없이 수천 명에 이르고 있는 정치범과 그들에 대한 용공 좌경의 모략과 매도에서 명백히 보듯이 국가 공권력에 의한 무차별적 탄압은 끝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박종철 군에 대한 고문 살인은 국가 공권력이라는 제도적 폭력이 빚어낸 구조적인 범죄의 드러난 한 부분일 뿐이며, ‘복지’라는 이름의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인간 말살 행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지난 80년 이래 독재적 폭압을 방관해 온 우리 모두에게 이제 그만 깨어나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라는 마지막 호소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는 1987년 2월 16일 정기 총회에서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유예되거나 짓밟힐 수 없는 인간의 존엄에 대한 신념과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 우리 모두의 복음적 헌신과 지속적인 기도 운동의 전개를 결의하였는 바, 많은 신자와 국민의 동참을 널리 호소하면서 현 시국을 보는 우리의 견해와 결의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자 합니다.

1. 정치 공동체의 존재 이유는 오직 공동선의 실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 정권은 출범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신과 그 주변의 이익만을 위해서 권력을 유지, 강화하여 왔습니다. 특권적인 정치 군벌과 부패 타락한 족벌 체제의 형성, 그러한 부패 특권을 영구히 향유하기 위한 책략적인 개헌의 추진 등 공동선에 반대되는 정치권력의 존재 양식을 여실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국민에 대해 전개하는 전투 작전, 인권 집회 등 평화적 집회와 시위에 대한 폭력적 대응, 공권력에 의해 희생되거나 정치 권력의 정당성과 정통성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자기 몸을 던진 사람들에 대한 추모와 장례조차 참담하게 거부·유린되는 현실은 과연 현 정권이 존재할 이유와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심각하게 던져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 정권의 인권 유린에 대한 거짓 없는 통회를 통한 도덕성 회복과 과감하고도 겸손한 공동선―민주화에로의 회심을 간절히 촉구하면서 그렇지 아니할 때 정치 권력 그 자체는 물론 나라의 앞날에 닥쳐올 재난과 불행을 예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이른바 ‘3저 호황’의 결실은 마땅히 그동안 경제적 희생과 사회적 소외를 감내하여 왔던 노동자와 농민에게 임금 인상, 부채 탕감의 형식으로라도 되돌려져야 합니다. 또한 ‘인간이기 위한 마지막 자리’로서의 도시 빈민의 삶의 터전과 그들의 삶의 양식이 전시 행정이나 그들이 주체가 되지 못한 개발 정책에 의하여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정치 권력과의 결탁 하에 이루어지는 각종 부정, 특히 부실 기업 정리를 빙자한 재벌 및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는 공동선 추구의 목적을 일탈하는 배신 행위로 지탄되어 마땅하며 그 진상이 숨김없이 공개되어야 합니다. 부의 심한 불균형은 중대한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사회 구성의 비중이 큰 노동자와 농민, 중소 상공업자들이 아무 제약 없이 권익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위한 중간 집단과 정치 단체를 조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민중의 생존과 사회 정의 실현의 요구를 자본주의 옹호라는 단순한 슬로건을 내세워 용공적인 것으로 모략, 억압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권익이 주창, 발양될 수 있는 통로와 분위기가 먼저 보장되어야 합니다.

3. 오늘의 학원 문제는 현 정권의 반민주적, 반민중적 성격과 형태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단지 ‘무신의 난’을 ‘무신 정변’으로 ‘동학 혁명’을 ‘동학 운동’으로 바꾸어 가르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자유 그 자체인 대학, 인류가 향유하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집단으로서의 대학을 우리가 갖기 위해서는 사회 전반의 민주화가 첩경이요, 요체입니다. 교육은 교육의 주체인 어버이와 교사, 그리고 교육의 현장인 가정과 학교에 일임할 때 가장 훌륭한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이미 정치권력의 하수인으로 역할하고 있는 검찰은 말할 것도 없고 사법부와 언론까지도 독재 체제를 유지케 하는 기능 집단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이돈명 변호사로 하여금 그 신뢰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한 사법부의 오늘이 그것을 잘 말해 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깨달아야 할 사법부와 언론을 비롯 사회 각 분야의 기능과 중간 집단들이 본래의 모습과 역할을 실천적으로 회복해 줄 것을 호소해 마지않습니다.

4. 민족 현실에 대한 주체적 인식, 우리 사회 구성체와 변혁 운동론에 대한 탐구, 민중의 생존권과 더불어 함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대동 사회 건설에의 요구 등 민족, 민주, 민중, 민생을 향한 민족사의 흐름은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으며 또한 정당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흐름 가운데 있을지도 모르는 좌경 혹은 이데올로기 편향이 시정되기를 바라는 한편으로 그에 대한 과장되고 조작된 모략과 비방, 그리고 정치적 이용과 사법적 처단이 중지되기를 바랍니다.

민족 성원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상존하고 있는 한반도에서의 전쟁, 핵전쟁의 위협에 대한 반대는 인류 공동선과 평화의 목적에 합치됩니다. 정권이 국민적 지지 기반이 없음을 기화로 한 외세의 개방 압력에 대한 국민적 저항과 피해 당사자인 노동자·농민의 몸부림은 민족의 존엄과 자주의 입장에서 지지되어야 합니다. 또한 지난날의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모든 금기(禁忌)의 영역은 이성과 민족의 이름으로 청산, 극복되어야 한다고 믿어 마지않습니다.

 

우리의 결의

一. 인권을 향상시키는 것은 복음의 요구이다. 우리는 인권 신장을 위하여 압제와 폭력에 저항하는 ‘고문 추방 운동’에 솔선하며 국민이 염원하는 민주화 개헌에 우리의 노력과 성의를 다한다.

一. 사회 안의 화해와 인권을 위하여 우리는 정치와 시민운동의 행렬에 자유롭고 책임 있게 참가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언론의 자유의 창달과 공정 보도를 위하여 ‘KBS-TV 시청료 납부 거부 운동’을 전개하고 우리 자신의 운명을 가늠할 국민 투표를 비롯한 모든 선거에 우리 교회의 판단과 역량을 모은다.

  1. 一. 불의에 의한 소리 없는 희생자들을 위하여 외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는 양심범의 고난에 동참한 이돈명 회장과 모든 양심범의 조건 없는 석방, 민주 인사에 대한 수배의 전면 해제 그리고 사면복권을 정권 당국에 촉구하고 그것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1987년 3월 4일 재의 수요일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