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문헌
2019-06-10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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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대희년 역사신학위원회] 하느님 생명의 선물인 성찬례


2000년 대희년 역사신학위원회


하느님 생명의 선물인 성찬례


대희년 준비 공식 교리서

  

[차 례]

서문: 하느님 생명의 선물

들어가는 말

제1장 성찬례의 가치와 중요성

하느님의 오묘하심
구원의 행위인 성찬례
 성찬례와 강생
 성찬례와 구원의 희생 제사
성찬례와 인류의 변화
 성찬례와 은총의 선물
 성찬례와 교회
우리의 개인 생활과 성찬례
 성찬례와 신앙
 성찬례와 사랑
 성찬례와 희망
감 사

제2장 성찬례의 기원

바오로 성인의 증언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기념제
복음의 증언들
 마르코의 본문(14,22-25)과 마태오의 본문(26,26-29)
 루가의 본문(22,19-20)
 요한의 증언
성찬례 제정의 과월절 분위기

제3장 성찬례: 명칭과 본질

다양한 명칭들
가장 널리 쓰이는 표현인 ‘성찬례’(Eucharist)
 용어의 변천
 감사 기도의 새로움
예수님의 삶과 감사
 성찬례 준비
 성찬례 제정의 순간에
 성부께 열렬히 나아가시는 성자
 예수님의 감사 기도에서 성령의 역할
그리스도인 생활과 감사
 그리스도인 삶 전체에 미치는 영향
 성령과 지속적인 감사의 태도

제4장 당신 말씀에 따라 실제로 현존하시는 예수님

성체와 성혈의 실재
실재의 확언
‘내 살’
‘살’이라는 말에 담긴 풍부한 의미
 위격적 현존
성찬례와 삼위일체
 성부의 역할과 현존
 성령의 역할과 현존

제5장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 예수님의 실재적 현존

트리엔트 공의회
 실재적 현존
 그리스도의 온전한 현존
규정된 진리
실체 변화
근거와 발전
 성서에서
 전승에서

제6장 성찬의 희생 제사

참된 희생 제사
 참되고 유일한 희생 제사
 성서의 근거들
 전승의 토대
성사의 희생 제사
 같은 점과 다른 점
 구속의 희생 제사의 재현
 축성을 통하여 의미를 지니게 되고 실현되는 희생 제사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봉헌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교회의 희생 제사
 희생 제사에 대한 교회의 참여
 성찬례의 희생 제사에서 교회의 협력
 사제 직무를 통한 협력
 모든 신자의 참여
성찬의 희생 제사의 열매

제7장 친교의 식사

식사의 가치
 잔치 제정의 의미
 거룩한 식사
 종말론적인 만찬
 영적인 식사
성찬의 식사
 강생과 식사
 생명을 주시는 성령으로 활기를 띠는 잔치
 성찬과 성령 청원

제8장 성체 현존에 대한 공경

실재적 현존에 대한 공경의 발전
성찬례 거행에서 실재적 현존에 대한 공경
성찬 거행 밖에서 이루어지는 실재적 현존에 대한 공경
실재적 현존의 핵심 역할
동방 교회의 성체 공경
성체 대회

제9장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성찬례

그리스도와 이루는 긴밀한 결합
성찬례를 거행하는 공동체 안에 계신 성모님의 현존
 성체와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체험
 성서적 토대
 성찬례로 이끄시는 성모 마리아
생명의 성장을 위한 조건
더 고귀한 힘의 원천인 영성체
사랑의 원천인 성찬
기쁨의 원천인 성찬의 양식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성찬의 식사

결 론

 


서 문: 하느님 생명의 선물


2000년 동안, 세계 각지의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예법에 따라, 최후의 만찬 날 저녁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루가 22,19) 하시며 남기신 그 예식을 거행하여 왔으며, 이러한 관습은 그들의 신앙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다. 2000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성찬례를 거행하여 왔지만 그 의미를 결코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남기신 이 선물은 결코 가늠할 수 없는 부요를 지닌다. 성찬례는 수많은 모습과 다양한 이름을 가진 신비이다. 식사, 희생 제사, 기념제, 미사 등 이 모든 이름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에 걸맞은 이름들이지만 그 의미에 꼭 들어맞는 이름은 하나도 없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주신 선물에 이름을 붙이신 적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행위와 말씀으로 보여 주셨을 뿐이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빵을 쪼개는” 가장 단순한 행위에서였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빵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
교황님께서는 대희년이 “열렬한 성찬의 해”(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제삼천년기」[Tertio Millennio Adveniente], 55항)가 되기를 요청하셨다. 2000년 6월 18-25일에 로마에서 열릴 세계 성체 대회는 ‘예수 그리스도, 유일한 구세주이시며 새 생명의 빵’을 성찰의 중심 주제로 삼았다.
세계는 미몽에서 깨어나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깨달아야 하며, 기아로 피폐해진 세계는 세상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유일한 빵은 새 생명을 주는 빵뿐이라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 깊이 깨달아야 한다. 모든 성찬례는 부활의 새벽을 보여 준다. 곧 빈 무덤이 새 인류의 요람이 되었던, 완전히 새로운 그 아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성체는 그것을 받아먹는 사람을 더욱 허기지게 하는 빵이다. 그 빵을 배불리 먹을수록 더 허기지는 까닭은 그 빵이 새 생명, 곧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생명을 맛보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이렇게 썼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넌 죽지 않을 거야.’ 하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죽음을 이기신 분께서 성찬례를 제정하시며 우리 각자에게 하신 말씀이다. “성찬의 한 가운데에서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너희는 죽지 않을 것이다! 실로 새 세상이 너희 앞에 펼쳐져 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있다. 이미 이곳에 있다.”


로제 에체가레이 추기경

 


들어가는 말


교회는 이제 2000년의 문턱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 교회는 구세주께 받은 선물인 성찬례를 거행함으로써 이 사건을 기념할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장엄한 이 순간에, 신자들을 그리스도께서 최후 만찬 때에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루가 22,19)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말씀에 의지하게 함으로써, 우리는 ‘사람이 되신 말씀’ 앞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말씀이 선포된 지 아직 2000년이 지나지는 않았다. 가장 믿을 만한 계산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서기 30년 4월 7일에 돌아가셨다. 따라서 성찬례는 4월 6일에 제정되었을 것이다. 그보다 30여 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셨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과 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일정한 의미를 띤 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일이 날마다 새롭게 재현되는 성찬례를 특별한 방식으로 기념하지 않고서, 어떻게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날을 경축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사람이 되신 말씀’ 앞에 다시 한 번 나아갈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신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인류에게 내어 주심으로써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 주셨던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성찬례 거행이라는 기념제를 통하여 당신을 영원히 기억해 주기를 바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대희년에 우리가 이 성찬례에 공경을 표해 주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에 따라 교회는 성찬례를 묵상하고, 성찬례의 신비에 더욱 깊이 몰입하며 그 의미와 가치를 더욱 온전히 이해하고 더욱 깊은 믿음과 사랑으로 그것을 실천하고자 노력함으로써 대희년을 준비하고 있다.
이는 2000년을 시작하는 적절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미래의 모든 교회 발전을 위한 주춧돌을 놓는 것이기도 하다. 성찬례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그분께서 세우신 공동체는 그분의 신성한 생명을 나누어 받아 모든 인류의 통합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책의 목적은 성찬례를 통한 이러한 그리스도의 오심에 이바지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인류의 운명이 점점 더 깊이 변화함에 따라 지속적으로 커져 가는 희망에 대하여 쓰는 일일 것이다. 교황 성하께서는 「제삼천년기」에서 희년이 “열렬한 성찬의 해”가 될 것이라고 쓰셨다. 성찬례와 강생의 신비가 지니는 연속성은 매우 중요하다. 주님께서 당신 교회 안에 살아 계시며 활동하신다는 유효한 표지인 성찬례는 강생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대희년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칙서인 「강생의 신비」(Incarnationis Mysterium)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셨다.
“교회는 2000년 동안,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모든 민족의 흠숭과 묵상의 대상이 되게 하신 요람과도 같았습니다. 성찬례를 거행하는 신부의 겸손으로 성찬례의 영광과 권능이 더욱더 밝게 빛나게 되기를 빕니다. 부활하시고 영광 받으시어 이방인들에게 빛이 되신(루가 2,32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봉헌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변함없는 당신 강생의 실재를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실제로 살아 계시며 당신의 몸과 피로 신자들을 기르십니다”(「강생의 신비」, 11항).

 

제1장  성찬례의 가치와 중요성


하느님의 오묘하심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성찬례는 하느님의 창작품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이다. 성찬례는 지혜의 오묘함과 사랑의 어리석음을 동시에 드러낸다. 우리는 인간의 지성과 능력의 특출함을 반영하는 수많은 창작품들의 독창성을 찬미한다. 하느님의 창작품들은 무한히 높은 차원에 있지만, 그것들은 인간 존재를 더욱 깊이 파악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구원 활동에 대한 계시 전체는 놀라운 것이며, 성찬례는 신비의 절정을 이룬다. 성찬례에서는 하느님의 계획이 모든 기대를 훨씬 뛰어넘어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성찬례는, 구원 활동으로 단 한 번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얻어진 것을 신앙의 질서 안에서, 곧 세상 종말까지 교회의 여정과 함께할 궁극적인 선물이라는 방법으로 인류에게 보장해 준다.
성체성사는 단순히 ‘성사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성체성사가 성사의 ‘경륜’에 속하며, 세례성사, 견진성사, 고해성사를 무시하고 홀로 공경받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성체성사는 유일무이한 탁월성을 지니고 있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은총을 얻을 뿐 아니라 은총을 주시는 분까지도 만나 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가장 직접적이고 또 가장 실질적으로 드러내신다.
“이것은 내 몸이다.” 또는 “이것은 내 피의 잔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우리가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생각할 때 그냥 지나가 버린 과거의 기억에 불과할 수도 있었을 그러한 행위, 그러나 최고의 지혜를 지니신 분께서 살과 피를 통한 현존을 선택하신 그 행위를 우리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빵과 포도주뿐이지만, 우리는 바로 이러한 현존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신 분께서 당신의 피조물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음식과 음료로 내어 주셨다는 사실에 우리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신 자신을 그처럼 낮추신 그러한 지극한 겸손 행위에 우리는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다. 주님이신 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완전히 내어 놓으신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희생 제사를 완성하시고 부활의 승리로 그것을 장식하신 분께서 어떤 이유로 모든 시대에 걸쳐 당신의 봉헌 행위가 성찬 거행을 통하여 되풀이되기를 바라셨는지 우리는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 해골산의 봉헌 행위만으로도 모든 인류에게 구원과 은총을 얻어 주고도 남을 만큼 충분하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곳에 새롭게 현존하셔야만 하는가?
이러한 모든 놀라움과 이러한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은 오직 하나뿐이다. 곧 성찬례의 모든 것은 지극한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주고 싶어 하는 끝없는 원의에서 나온다. 하느님의 그러한 사랑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또 인간에게 최상의 운명을 보장해 주고자 최후의 만찬에서 성찬례를 제정하신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으로써 그 무엇도 넘볼 수 없을 만큼 독창적인 것이 되었다. 우리의 놀라움이 너무도 큰 만큼, 우리는 그 사랑의 의도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신앙을 더욱 깊이 연구하여야 한다. 곧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성찬례가 지닌 근본 의미를 탐구하여야 하며, 그리스도인 생활의 경험과 교회 전체의 경험, 교회 각 구성원의 경험을 통하여 교리의 정당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찬례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성장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세상에 증언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 영성체를 통하여 끊임없이 자양분을 주기 때문이다. 복음은 약한 자들에게는 힘을, 슬퍼하는 이들에게는 기쁨을 준다. 또한 복음에서 벗어나 폐쇄적으로 살려는 유혹을 받는 사람들에게 사도적 책무를 명심하도록 영적으로 고무한다. 그러므로 복음은 거기에 드러난 강렬한 하느님의 사랑이 복음의 목적인 인간 삶의 변화를 이루어 준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느님의 오묘하심은 참으로 헤아릴 길 없다.


구원의 행위인 성찬례

성찬례와 강생

성찬례를 통하여 우리는 강생의 의미와 가치를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축성의 말로 선포되고 ‘신앙의 신비’로서 거행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현존은 우리에게 강생의 실재 그 자체, 곧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실질적인 인간의 실재로 받아들여진 그 실재에 주목하게 한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인간이 되시고 우리와 같은 인간의 삶을 영위하신 행위가 성찬례를 통하여 재현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의 잔이다.”라고 말할 때,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동정 성모님에게서 받으셨던 그 살로 지상에 현존하시게 되는 것이다. 성찬례는 강생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준다.
요한 복음서에는 강생과 성찬례의 관계가 특별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요한 복음서 앞부분은 사람이 되신 말씀을 우리에게 소개한다(요한 1,14 참조). 그 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성찬례에 관하여 선포하시는 말씀을 전해 준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51). 강생을 가리키고 따라서 성찬례를 가리키고자 ‘살’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풍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성찬례를 제정하실 때에 진정한 셈족의 언어로 ‘살’이라는 말을 사용하신 듯하다. 그 뒤 이 말은 그리스어로 번역될 때 ‘살’이라는 말 대신 ‘몸’이라는 말이 되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것은 내 살(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던 것이다. ‘살’이라는 말의 라틴어인 carn-은 ‘강생’(incarnation)의 어근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신비와 성찬의 신비 사이의 긴밀한 유대를 암시하고 있다.
말씀이 지상에 내려오시어 ‘사람이 되셨을’ 때, 말씀은 우리와 같은 삶을 영위하시고자 하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그 몸을 내어 주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강생은 성찬례를 통하여 완성된다. 성찬례는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 속으로 들어오신 단순한 사실이 가질 수 없었던 중요한 의미를 강생에 부여해 준다. 성찬례는 성자의 살에 빛의 권능을, 다시 말하여 인간의 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성부의 자녀로 살도록 초대 받은 모든 사람 속에 스며드는 빛의 권능을 부여해 준다.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살이 지니는 변화의 능력이 인간의 모든 삶 안에서 보편적으로 자라나는 은총으로써 발휘되어야 할 때, 그 능력이 최상에 이르도록 해 준다.
이것은 강생의 무한한 가치를 이해하지만 인간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그 순간에 살 수 있었던 특은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의 애석함을 달래 줄 수 있는 방책이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뒤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분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제자들이 운이 좋았다는 사실을 특별히 환기시키신 적이 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우리는 이러한 행운은 예수님께서 지상에 사실 때에 팔레스타인 지방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행복하다고 하신 이 말씀에는 실제로 그분 이후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이는 그분 이전에 메시아를 기다렸으나 직접 뵐 수는 없었던 모든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마태 13,17).
그리스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확실히 사도들이 받았던 특은을 받지 못했고, 구세주를 직접 눈으로 뵐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리스도 이후 세대들은, 짧은 기간 동안에만 가능했고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가치를 지녔던 체험, 곧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 곁에 머무셨던 그 체험을 해 보지 못했다. 그러나 제자들이 몸소 느꼈던 그 체험에는 영적인 체험이 담겨 있었다. 그들의 행운은 단지 예수님을 보고 듣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볼 수 있었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믿음이 요구되는 것이었다.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는 그리스도께 의지하였던 사람들, 곧 신앙인들의 눈과 귀였다.
신앙의 차원에서 볼 때, 이러한 행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가운데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보는 사람은 누구나 얻을 수 있다. 행복은 강생의 진리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해 주는 복음의 계시를 통해서 얻지만, 특히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를 드러내 주고 더욱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주는 성찬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성찬례를 통해서 신자들은, 오래 전에 예수님의 동시대인들이 그분의 현존을 받아들이도록 초대되었듯이, 그리스도의 현존을 받아들인다. 성찬례는 신자들에게 가시적 표지 아래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볼 수 있는 행운을 보장해 준다. 이러한 현존을 영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성찬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동시대인들이 받았던 특은을 받는다. 그리하여 강생하신 성자와 지극히 심오한 친교를 나누는 행운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겐네사렛 사람들이 예수님께 병자들을 데리고 와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마태 14,36)라고 이야기하는 마태오 복음서의 구절을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도 그분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집시다! 아니, 우리가 바란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째로 가질 수 있습니다. 그분의 몸이 여기 바로 우리 앞에 있으니까요. 이제 이 식탁이 예수님께서 앉으셨던 그 식탁이라고 믿으십시오.”1)

성찬례와 구원의 희생 제사

강생과 마찬가지로, 성찬례는 예수님의 구원의 봉헌 행위를 재현한다. 사실, 성찬례는 매우 성사적으로 그것을 재현한다. 요한 성인이 전해 주는 말(요한 6,51 참조)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상은 생명을 얻게 된다.” 그리스도의 살은 신자들 안에 새 생명이 꽃피게 하려고 세상에 주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희생 제사를 통하여 새 생명을 얻도록 세상을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구원의 희생 제사의 본질적인 부분인 성찬례는 인류의 양식이 될 수 있다.
희생 제사에 대한 암시는 포도주를 축성하는 말에서 더욱 명백해진다.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르 14,24). ‘다수’를 의미하는 “많은 사람을 위해서”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셈어식 표현으로서, 당신의 희생 제사는 인류를 위하여 바쳐지는 것임을 의미한다. ‘많은’은 ‘모든’의 동의어로 이해할 수 있다. 인류에게 새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이 구세주께서 지상에 오신 동기이며 해골산의 비극으로 바쳐진 희생 제사의 목적이기도 하다.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음식과 음료로 내어 주시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희생 제사의 결과로 모든 사람이 그것을 먹고 마실 수 있게 하시는 데에 있었다.
모든 성찬 거행은 이러한 봉헌 행위를 성사적으로 재현한다. 축성의 말은 예수님의 희생 제사를 신비롭게 재현하여 인류가 더 널리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한다. 물론 오늘날의 봉헌 행위는 시초에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이루셨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사적인 예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행위의 영적인 고결함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구세주께서 당신을 완전히 희생하시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행위가 성찬의 희생 제사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다.
성찬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사실로써 그리스도의 봉헌 행위와 결합된 개인적 봉헌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 생활을 특징짓고 그분의 희생 제사 안에서 충만함에 이르렀던 봉헌의 영성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영감을 주어야 한다. 인간 삶의 고통스러운 측면들 때문에 불안하고 나약한 마음에 굴복하고 싶은 유혹이 생길 수도 있지만, 성찬례는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관대한 베풂의 정신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성찬 거행은 성부께 대한 그리스도의 위대한 ‘순종’을 기리는 것이다. 그러한 ‘순종’이야 말로 죄가 부추기는 모든 ‘불복종’을 자신 있게 물리칠 수 있게 한다.
성찬례가 해골산에서 봉헌되었던 희생 제사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찬례는 희생 제사를 봉헌하는 것인 동시에 그 희생 제사가 부활의 신비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찬례는 더 지고한 생명의 원천인 그 신비를 전해 주는 수단이다. 
성찬례의 희생 제사에서 바쳐지는 그리스도의 몸은 형태가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이제 최종적인 부활의 상태에 도달한 몸이다. 구세주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힘으로, 사제가 대신 바치는 성찬례를 통하여 당신의 봉헌 행위를 끊임없이 되풀이하신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음식과 음료로 주어질 때, 그 몸과 피는 부활과 승천에 힘입어 거기에 결부된 생명을 주는 힘을 통하여 생명을 얻는다.
바로 그런 까닭에, 성찬례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바쳐진 슬픈 봉헌 행위를 되새겨 줌에도, 기쁨으로 거행되는 것이다. 수난은 필연적으로 부활의 승리로 끝남으로써 새로워진다. 수난은 희생 제사라는 슬픈 배경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바로 그러한 희생 제사의 봉헌을 통하여, 성찬례는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나오셔서 당신의 죽음을 슬퍼하던 제자들의 마음을 다시 한 번 타오르게 했던(루가 24,32 참조) 그 승리의 기쁨에 우리를 동참시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이 수난에 동참하게 되리라고 선포하시며, 그들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을 보증하셨다. “지금은 너희도 근심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와 만나게 될 때에는 너희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통하여 성찬례는 복음의 이러한 약속이 지속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성찬례는 명백히 희생 제사에 대한 참여를 요구하지만, 이는 부활에서 비롯되는 풍부하고 궁극적인 기쁨을 최대한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성찬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악을 이기시고 더 높은 행복을 전해 주신 그분의 행위에 동참하게 되는 것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성찬례는 인간 고통이 필연적으로 제기하는 ‘왜’라는 의문에 답을 준다. 가장 고통스러운 시련은 물론, 비교적 가벼운 고통에 직면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이를 원망하며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어 한다. 성찬례는 고통은 끝이 아니라고 답하면서, 성찬례가 보장해 주는 기쁨을 통해서 이를 증명한다. 십자가의 고통은 우리의 구원을 담고 있는 그릇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기쁨으로 이끌기도 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서 고통은 하느님의 지혜롭고 선한 계획이 더욱 잘 드러날 수 있게 하는, 더 큰 기쁨에 대한 약속이기도 하다. 3세기 중반부터 공경되어 온 고대의 외경인 「토마스 행전」(Acts of Thomas)에 언급되어 있듯이, 고통은 영적인 체험이다. 책에는 “새벽녘에 토마스 사도는 그리스도의 식탁에서 성체를 쪼개어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행복해했고 기쁨에 넘쳤다.”2)고 기록되어 있다.
성찬례는 우리 앞에 놓인 희생의 길에서 우리에게 봉헌의 힘을 주지만, 동시에 지금 이곳에서 그 실재를 맛볼 수 있는 더 큰 기쁨을 보장해 준다.
성찬례는, 십자가의 종교이지만 기쁨의 종교이기도 한 그리스도교의 근본적 특성을 밝혀 준다. 예수님께서는 참행복을 가르치실 때 당신 제자들 앞에 놓인 슬픈 여정, 박해가 그 첫 번째 표지가 될 여정을 매우 생생하게 예언하셨다. 공생활 동안 스승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박해가 제자들의 삶에서도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참행복은 기쁨의 선물이며, 기쁨을 약속한다. 그 기쁨은 시련으로 감소되거나 좌절되기는커녕 오히려 슬픔을 통하여 강화되고 발전한다. 이러한 기쁨은 무덤 너머의 삶을 위해서만 약속된 것이 아니다. 물론 그 기쁨은 내세에서 충만히 꽃피겠지만 지상의 삶에서도 우리와 함께한다.
성찬례는 신자들에게 구원의 봉헌 행위를 더 훌륭하게 실천할 힘을 주지만, 그것은 부활의 기쁨을 전해 주는 힘을 통해서이며, 또 복음이 선포하는 행복으로 신자들을 더 깊이 이끌고자 하는 목적에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모든 성찬례가 기쁜 분위기에서 거행되며,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을 받아 모시는 영성체가 그리스도인 생활을 더욱 헌신적으로 또 더욱 기쁘게 영위할 수 있게 해 주는지 이해할 수 있다.


성찬례와 인류의 변화

성찬례와 은총의 선물

성찬례는 은총의 신비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은총’은 ‘거저 줌’을 특징으로 하는 하느님의 선물을 의미한다. 구세주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는 은총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느님 생명의 선물이다. 우리는 그 은총을 거저 받는다. 그러나 그 대가는 우리 구세주께서 가장 높은 값으로 치르셨다.
성찬의 신비는, 인간이 받은 새 생명은 온전히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모든 사람이 전해 받은 것은 바로 하느님 아드님의 생명이라는 것을 매우 분명히 해 준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기 전에도 성찬례에 대하여 처음으로 언급하시면서 이렇게 단언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요한 6,54).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서둘러 당신 살과 피를 내어 주심으로써 제자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들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게 하시려는 것 같았다. 예수님께서는 영성체 없이는 은총의 삶인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하신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요한 6,53).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에게 하느님 은총의 유일한 원천이시다. 그러므로 성찬의 식사는 은총을 나누어 받는 탁월한 수단이며, 그리스도인 생활을 발전시키는 조건인 것이다.
성찬례는 은총만이 아니라 은총의 주인이신 분도 받아 모시는 성사이므로, 성찬례는 은총의 삶 자체와 특별한 연관이 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현존은 은총이 끝없이 풍부하게 솟아나게 하시는 분께서 위격으로 현존하심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찬례가 다른 모든 성사의 은총의 원천이라거나 은총 생활 전체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만이 은총의 원천이시지만, 성찬례를 통해서만 원천이 되시는 것은 아니다. 성찬례를 모든 은총이 지나가는 통로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찬례는 은총을 나누어 주시는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현존하게 한다. 당신 자신의 생명으로 인류를 기르고자 하셨던 분께서, 인간 생명의 저 깊은 곳까지 이르러 그것을 하느님의 생명으로 바꾸어 놓기 위한 특별한 수단으로 성찬례를 선택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인간 안에 최후의 부활에 대한 보증을 새겨 놓을 만큼 강력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성체를 통하여 이러한 부활에 대한 절대적인 보증을 얻는다. 살로 된 그들의 몸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그들 안에 지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성찬례는 이러한 보장을 해 줌으로써 그들에게 구원의 강생 신비의 충만한 효과, 은총의 효과, 그리스도의 살을 통하여 인간의 살로 전해진 하느님 생명의 신비를 보장해 준다. 

성찬례와 교회

성찬례는 교회 발전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모이게 하신 회중이며, 하느님이신 그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이다. 회중은 첫 오순절 날 태어났으며, 그 후 한 번도 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로 뻗어 나갔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삶은 맨 처음부터 ‘빵 나눔’을 통하여, 곧 성찬의 식사를 통하여(사도 2,42 참조) 표현되었다. ‘빵 나눔’은 한 동족으로서 그리스도인 생활이 지니는 특징적인 요소로 여겨졌다.
고린토인들에게 일치를 이루고 모든 분열을 없애야 한다고 상기시키고자 했던 바오로 성인은 성찬례를 통하여 구체화되는, 부인할 수 없는 경험에 호소하였다. “우리가 쪼개는 이 빵”은 “그리스도 몸의 나눔”임을 강조한 후 그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1고린 10,16-17). 그리스도를 음식으로 받아 모시는 식사를 통하여 그 식사에 참여하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와 결합될 뿐만 아니라 그들끼리도 서로 결합된다. 그들은 같은 음식으로 힘을 얻으며 그 음식은 그들에게 같은 생명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성찬례는 일치의 표지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제자들이 당신의 몸을 통하여 친교를 이루게 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모습대로 당신 공동체를 만드신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인 같은 신앙과 하나의 사랑을 통하여 사람들을 긴밀히 결합시키는 일을 시작하시고 진척시키신다. 성찬례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 사이의 친밀한 결합을 기념하는 것이다. 카르타고의 치프리아노는 3세기 중반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물이 성작에서 포도주와 섞이면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일치되고, 수많은 신자들이 그들이 믿는 분과 맺어지고 결합된다. 물과 포도주는 주님의 성작 안에서 철저히 결합되고 혼합되어 결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교회를, 다시 말하여, 자신의 믿음을 지키며 교회 안에 충실하고 굳건하게 뿌리박고 있는 군중을 그리스도와 떼어 놓을 수 없다. 갈라질 수 없는 사랑으로 그분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3)

실제로, 우리는 교회가 성찬례를 낳고 성찬례가 교회를 낳는 상호 인과 관계를 보아 왔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발생의 기원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활동이다. 다시 말하여, 교회에 생명을 주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고, 성찬례를 만드시고 제정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시다.
교회는 성찬례를 낳는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최후의 만찬 때 이루어진 일을 되풀이할 사명을 받았다. 교회는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발전시킨다. 교회가 강화되고 커지는 만큼 공동체 생활도 발전하고 확대되는 것이다. 교회는 예배와 기도 활동을 발전시킴으로써 거룩해지고 세상에 빛을 비추게 된다. 교회는 기쁜 소식을 증언하고 선포할 사명을 더욱 공공연히 맡고 있다.
그러나 성찬례 또한 교회를 낳는다. 모든 성찬례 거행이 교회를 만들고 교회의 성덕을 발전시키며, 교회의 일치를 강화하는 데에 이바지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재현되는 신비의 거행을 통하여 인간을 교회 안에 더욱 항구히 결합시키시고, 이 교회가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갈 새 힘을 부여해 주신다.
성찬례는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교회의 영적 성장을 촉진한다. 교회 안에는 세상에 교회의 현존과 활동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들로 이루어진 외적인 측면이 있다. 우리는 때때로 교회를 이 지상의 실재와 동일시하고 또 어떤 때는 교회를 위계적 구조로만 보려는 유혹을 받는다.
성찬례는 인간 마음속에 활기를 불어넣는 내적인 생명을 교회 안에 발전시킨다. 성찬례는 모든 신자 안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힘과 열정을 얻는 영적인 친교를 형성하며 영성 생활의 질을 높여 주어 그리스도를 본받게 해 준다.
이러한 삶의 질에 요구되는 것들 가운데서 성찬례는 기도 생활의 발전을 보장해 준다.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현존하게 함으로써 성찬례는 개방과 대화, 구세주와 하나 되고자 하는 진실한 바람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교회가 끊임없는 기도로 힘을 얻어 살아가지 않는다면 자신의 사명을 수행할 수 없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하는 증언은 그리스도의 행동 방식과 그분의 인격에 근본적으로 충실한 것일 때에만 참될 수 있다.
자신의 전부를 바쳐 그리스도께 충실하려면 그리스도께서 성찬례를 통하여 끊임없이 오시게 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교회의 모든 사명을 펼쳐 나가는 데에 필수적이다. 성찬례는 사도직 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효율적이게 하며, 그리스도와 본질적으로 이루는 친교의 정신을 사도직 활동에 불어넣어 준다. 이는 내적인 성장이 참된 외적인 성장을 보장해 주도록 하려는 것이다.
초기 교회가 ‘빵 나눔’에 애착하였다는 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성장을 위하여 성찬례에 근본적인 중요성을 부여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애착은 예수님의 특별한 말씀이 남긴 기념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은 오로지 성찬례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참조).
교회는 성찬례에서 신앙과 사랑을 증언할 힘을 얻는다. 그리하여 사제는 이렇게 기도한다.

(기원미사 감사기도)

주님, 교회를 돌보시어
교황 (       )와 저희 주교 (       )와
모든 주교와 사제와 부제와
주님의 온 백성과 함께
믿음과 사랑으로 완전한 교회를 이루어주소서.

저희 눈을 열어주시어
형제의 어려움을 알게 하시고
저희 말과 행동을 비추어주시어
수고하는 이와 무거운 짐을 진 이를 위로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을 따라
그들에게 진심으로 봉사하게 하시며
교회를 진리와 자유, 평화와 정의의 산 증인이 되게 하시어
모든 사람이 새로운 희망으로 일어나게 하소서.


우리의 개인 생활과 성찬례

성찬례와 신앙

전례에서 “신앙의 신비여!” 하고 외치는 것은 성찬 거행을 통하여 신앙과 신앙의 기적에 호소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신을 매혹하고 초월하는 신비로 자극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느님의 무한성에 열려 있는 신앙만이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으로 효력이 발생되는 희생 제물과 그 말씀에서 비롯되는 현존을 받아들일 수 있다.
성찬례에 대한 믿음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강생에 대한 믿음과 교회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므로, 그리스도교 계시의 본질 자체와 관계된다. 예수님께서는 처음 성찬례에 관하여 언급하실 때에 이러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미 강조하신 바 있다. 다섯 개의 빵으로 수천 명을 먹이신 후 예수님께서는 그 기적의 참된 의미를 밝히시고자 기적에 관하여 설명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에게 물질적인 빵을 풍부히 주시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빵”(요한 6,58)으로 인간들 가운데 오셨으며, 그들에게 이 빵을 주시는 것이라고 밝히셨다. 가파르나눔의 회당에서 하신 긴 연설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음식과 음료로 내어 주시려는 의도를 밝히셨지만, 청중들의 의혹을 받으셨다. 제자들 가운데도 성찬례의 약속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때까지 자기들이 따르던 스승을 저버리는 이들이 많았다. 성찬례의 약속에 대한 이러한 거부는 분명 예수님께 깊은 실망을 안겨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때까지도 당신 곁에 남아 있는 사도들을 보시고는 그 큰 사랑의 증거에 감명을 받으시어, 수많은 청중들에게서는 보지 못하셨던 그 신앙에 충실할 것을 제자들에게 주저 없이 요구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떠나가겠느냐?”(요한 6,67) 하고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께서 조금 전에 선포하셨던 성찬례를 믿지 않는다면 그들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계셨다. 그러므로 성찬례를 믿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 다행히 베드로가 모든 이의 이름으로 한 고백 덕분에 사도들은 계속해서 스승을 따를 수 있었다. 예수님께 그리스도교 신앙은 오로지 성찬례에 대한 믿음일 수 있다. 성찬례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필수 조건이다. 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사도들은 예수님께 대한 깊은 믿음과 충성 덕택에, 최후의 만찬에서 깊고 진실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실 수 있었다. 제자들은 성찬 축성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 말씀을 믿었다. 그들은 이미 일 년 전에 성찬례의 약속을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개인적으로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교회가 확장되는 동안, 성찬례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최초의 초대에 대한 응답이 되어 왔다. 예수님께서는 성찬례 거행 때마다 언제나 같은 신앙을 요구하신다. 성찬례는 매우 특별한 문제를 제기한다. 제대에서 봉헌되는 빵과 포도주의 가시적인 형태와 보이지 않게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사이의 대비는 더욱 새로워진 신앙의 힘을 요구한다. 그것은 우리가 감각으로 인식하는 것과 신앙의 진리가 우리의 믿음에 강요하는 것 사이의 거리를 극복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언제나 이러한 거리를 뛰어넘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아갈 용기를 모아 준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시면서, 또 토마스 사도의 어리석은 의심을 꾸짖으시며 하신 말씀에서 근본적인 행복을 찾는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성찬의 신비를 통하여, 당신의 살아 있는 몸의 현존을 확인하고자 창에 찔린 당신의 옆구리를 만져 보고 “손가락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요한 20,25) 보려는 유혹을 받는 사람들의 의심을 예상하시고 그에 대처하셨다. 신앙 그 자체는 예수님께 한층 밀착함으로써 가시적 증거와는 달라지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신앙이 ‘참행복’이라는 의미에서 참으로 ‘복된’ 것임을 보장해 준다.
그러므로 성찬례를 신비의 영역에 가두어 두는 신앙의 무지는 성찬례에서 기쁨이 샘솟아 나오는 것을 막지 못한다. “신앙의 신비여!”라는 외침은 언제나 기쁨의 외침으로 메아리친다. 그 기쁨은 신앙의 기쁨 자체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또 다시 인류 가운데 현존하시는 바로 그 신비의 기쁨인 것이다.

성찬례와 사랑

교회에서는 신앙의 신비인 성찬례를 사랑의 신비로 여겨 왔고 또 그렇게 실천해 왔다.
신앙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요구하신 신앙 실천은 곧 사람들을 당신께 일치시켜 줄 사랑의 행위였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에게 첫째 계명의 중요성을 직접 상기시키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신명 6,5; 마르 12,30과 병행구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셨을 때, 이 계명이 요구하는 대로 온 마음을 다하고 온 생명을 다하고 온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요구하셨다. 이러한 완전한 사랑에 대한 요구는 성찬례에서 적용된다. 성찬례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랑으로 영성체를 통하여 당신을 받아먹으라고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먹는 사람들은 그 몸을 단지 음식으로만 여겨서는 안 되며, 온 마음과 온 생명, 온 힘을 다 바쳐 그것을 찬미하고 사랑하여야 한다.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재촉하는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첫째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레위 19,18; 마르 12,31과 병행구들)라는 둘째 계명과 분명히 짝을 지으셨다. 또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로써 이 계명의 관점을 넓히시면서 ‘네 이웃’이라는 표현에 내포된 한정된 의미를 없애시고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들에게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루가 10,29-37).
최후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지상에 실천하러 오신 사랑의 완전한 의미를 전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성찬례에 대한 설명을 하시며 당신의 특별한 계명인 ‘새 계명’을 세우시고 선포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이 계명은 최후의 만찬이 시작될 때, 누구를 제일 높게 볼 것이냐는 문제로 옥신각신하는 제자들 사이에 생긴 분열에(루가 22,24 참조) 답을 주는 하느님의 응답이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누가 첫째 자리에 오를 것인가를 두고 열두 제자 사이에 다툼이 이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신의 크나큰 사랑을 본받도록 명령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성찬의 빵으로 내어 주시며 제자들에게 이를 본받을 힘을 주셨다.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시며, 성찬의 힘으로 그 계명을 따를 능력을 불어넣어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사랑의 거룩한 힘을 받은 사람만이 이룰 수 있는 지극히 높은 목표이다. 이 거룩한 힘으로 그리스도인은 다툼을 가져오는 이기심과 야욕의 성향을 모두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세주께서 당신의 희생으로 보여 주셨던 본보기를 따라, 아낌없이 내어 주는 사랑의 극치에 이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고 사는 사람들에게 성찬례는 강생하신 성자의 위격과 그분 사랑의 모든 힘을 불어넣어 준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사랑의 길을 따를 때 생기는 온갖 어려움에 맞서고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준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다음과 같은 시로 성찬례에서 솟아나는 사랑의 힘을 표현하고 있다.

거룩하신 저의 포도 나무 예수님,
오 거룩하신 저의 임금님, 주님께서는
시든 포도송이인 제가 주님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포도즙을 짜내는 고통의 압축기에서
저는 영원한 사랑을 주님께 증명해 보일 것이며
여기 이 지상에서는 쓸모없는 저일지라도
날마다 주님께 저를 봉헌하리이다(시 25). 

특히 성찬례는 그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사랑의 다양한 본질을 발전시킨다. 사실 그리스도의 마음에는 사랑의 충만함이 깃들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만이 사랑의 모든 비밀을 밝혀 주시며, 사랑이 가장 완전하게 발전하도록 해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면서, 그들에게 끝없는 사랑의 본보기만이 아니라 언제나 다가갈 수 있는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을 주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은 십자가의 희생 제사에서 절정에 이른 사랑을 상기시킨다. 모든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바로 이 같은 사랑이 고통스럽고 힘든 봉헌 행위를 통하여 정점에 도달하여야 한다.
최후 만찬에서 제자들을 섬기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이웃에 대한 참사랑의 의미를 더욱 잘 전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종처럼 몸을 굽히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 사랑의 특성인 낮춤의 자세를 몸소 감동적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 머지않아 의회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선언하시게 될 당신의 주권을 잘 알고 계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에 호소하여 제자들의 기를 꺾으시거나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섬기셨다. 그분처럼 자신을 낮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신 제자들에게 서로의 발을 씻어 주라고 권유하시면서 그들에게 전해 주시고자 하신 이러한 낮춤의 자세로 예수님께서는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다툼을 막는 일치, 마음의 일치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에게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하는 유혹에서 오는 모든 알력을 해소할 방법을 보여 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자기 낮춤의 자세는 성찬례에서 재현된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음식이 되어 주실 정도로 자신을 낮추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빛나는 영광 속에 당신을 드러내실 수 있었음에도 가장 보잘것없는 방법으로 당신을 드러내신다. 스스로 인간을 섬기는 자리에 서시고, 당신 몸으로 인간을 먹이시며, 당신 피로 인간의 갈증을 풀어 주신다. 모든 성찬 거행은 겸손한 사랑, 드러내지 않고 세상에 전달되고 싶어 하는 사랑을 분별 있게 드러내 준다.
예수님께서는 희생 행위에서 이러한 섬김의 정신이 발견된다고 직접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르 10,45; 마태 20,28). 겸손한 섬김은 희생 제물을 통하여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표현된다. 사람이시지만 하느님이신 사람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해방시키고자 가장 지독한 굴욕 속에서 당신 자신을 속죄물로 바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표양을 따르라고 권유하시면서, 희생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사랑의 행위라고 설명하신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목숨을 바치라는 극단적인 요구에 직면하면 우리는 움츠러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알고 계신다. 당신께서도 게쎄마니에서 죽음을 피하려는 유혹을 받으신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해골산으로 이끌었던 살신 행위를 본받도록 요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전에 바치신 성찬례로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라 희생의 길로 나아가는 데에 필요한 힘을 부여해 주신 것이다.
성찬례는 수난의 고통스러운 길을 걸어갈 때 생길 수 있는 모든 공포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준다. 성찬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련을 받아들이고 그 시련을 봉헌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을 부여해 준다. 성찬례는 모든 제자에게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내어 주신 생명을 전달함으로써 그들이 주저하지 않고 모든 능력을 다하여 자신을 내어 줄 수 있게 한다. 성찬례는 사람들에게 사랑이 요구하는 모든 것에 마음을 열게 하며, 사람들이 삶의 고통 앞에서도 열정을 갖도록 새로운 힘을 부여한다. 성찬례는 사랑이 희생을 통하여 꽃피게 하며, 그러한 사랑의 은밀한 기쁨을 배가시킨다.

성찬례와 희망

성찬례는 가장 확실한 희망, 곧 인류와 각 개인의 운명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음을 드러낸다.
개인의 생명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직접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이러한 희망을 드러내 주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요한 6,54). 성찬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는 사람의 영혼에 스며드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이 영원한 생명이며, 이 영원한 생명의 선물은 세상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부활을 보장해 준다.
인류의 운명과 관련하여,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선포는 인류의 미래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게 하며, 이 선포는 성찬례를 통하여 재현되고 확대된다. 바오로 성인은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1고린 11,26). 그러므로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위한 필수 요소이다.
이러한 재림은 가장 폭넓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곧 그것은 오순절에 교회가 처음 모임으로써 시작되었고, 세상이 존재할 때까지 계속되며, 모든 복음화 활동이 완성에 이르는 세상 끝 날에(마태 24,14 참조) 완성될 것이다.
이냐시오가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한 말을 빌리자면, 성찬례는 “영생을 위한 약이고 죽지 않게 하는 해독제이며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한다”(20,2).
성찬례는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성찬례는 마지막 날들의 특성을 전해 주며, 마지막 날들이 오리라는 것을 보장해 주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성찬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고, 이 희망이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힘을 부여해 준다.
성찬례는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오시게 함으로써 그분의 재림을 돕고, 교회의 복음화 활동을 돕는다. 성찬례는 복음화 활동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영적 힘을 보장해 주며, 미래의 모든 사람이 최고의 순간, 곧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미래가 무한히 확장되고 세상 종말에 모든 사람이 부활하게 될 그 순간으로 나아가게 해 준다.
성찬례는 공동체와 개인들을 마지막 운명의 길로 내보낸다. 성찬례는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이며,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희망의 샘이다(로마 5,5 참조).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절대 권능과 성령을 통하여 넘치도록 쏟아 부어지는 무한한 사랑에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감 사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성찬례가 차지하는 가치와 중요성을 되찾게 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오묘하심과 독창성이 놀랍도록 풍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성찬례는 ‘감사’를 의미하는 ‘성찬’이라는 말의 근거를 더 잘 이해하게 해 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찬례는 그리스도께서 성부께 드리는 감사로써 생명을 얻는다. 성찬례는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며, 하느님의 선물에 감사하게 해 준다. 이러한 선물을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한 구원 계획에 내포된 탁월한 지혜가 드러나며, 교회의 성장과 그리스도인 개개인과 전체의 성장을 위한 그리스도의 성사적 현존과 그분의 희생, 그리고 그분의 양식에서 얻는 은총의 선익이 드러난다. 성찬례는 믿음과 사랑, 바람을 키워 주고, 감사에 대한 응답에 충만함을 주어서, 끝없는 사랑을 주시는 성부께 올리는 감사가 절정에 이르게 한다.

 

제2장  성찬례의 기원


바오로 성인의 증언

성찬례의 중요성은 바오로 성인 자신이 이 진리의 원천인 가장 오래된 전통에 열렬히 의지하는 것으로 입증된다. 성찬례는, 모든 의심을 넘어 그리스도께 직접 거슬러 올라가는 충실한 기록 전통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면, 믿기 어려워 보이는 기적이다.
연대적으로 볼 때, 가장 오래된 것은 고린토인들에게 보내는 첫째 편지의 증언이다. 이 편지는 서기 56-57년경에 쓰였으므로 네 복음서보다 더 오래된 증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제쳐두고라도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전해지는 진리의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을 강조하고자 바오로 성인은 자신이 전해 주는 전통의 기원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1고린 11,23-25).

확실한 전통의 증언에 바탕을 둔 이러한 사실에서 바오로는 성찬 식사의 본질적인 의미에 관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1고린 11,26).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일어난 이 만찬의 상황과 제자들을 위하여 내어 주는 몸과 새로운 계약을 위하여 흘리는 피에 관한 말씀의 의미는 그 만찬이 영광에 싸여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선포하기 위한 중요한 식사라는 것을 밝혀 준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라는 말은 바오로가 그리스도께서 직접 자신에게 특별한 계시를 내리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가 받은 것은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 기원을 둔 전통이다. 그는 자신에게 그 전통을 전해 준 사람들의 기억뿐만 아니라 성찬례를 제정하신 그리스도의 실제적 권위가 전통의 정당성을 보장해 주고 있다는 깊은 확신을 가지고 그 전통을 고린토인들에게 전해 준 것이다. 바오로는 성찬례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이 단순한 의견이나 개인적인 해석이 아니라, 전적으로 교회 안에 전해지는 교리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애썼다. 바오로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 있었던 몇몇 증인들이 증언해 왔고 그 증언을 들었던 사람들이 성찬례의 기원이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충실히 보전해 왔던 그 진리를 받아들인 것뿐이다.
전통에 대한 바오로의 이러한 장엄한 호소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또 다른 문맥에서 확인된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내는 같은 편지에서 우리는 신앙의 진정성을 보장해 주는 전승에 관하여 유사한 강조를 하고 있는 것에 놀라게 된다. “나는 내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1고린 15,3). 세상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교 계시의 가장 근본적인 핵심 내용이다. 더군다나 특히 부활은 예수님께서 주신 모든 가르침을 확인해 주고, 승리의 영적인 힘, 곧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모든 개인의 삶을 변화시킬 구원과 새 생명, 당신 자신의 생명을 전해 주신 그 힘을 드러내 주는 최고의 기적이다. 성찬례와 같은 이러한 사건은 최초의 증인들의 경험에 바탕을 둔 전통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바오로가 두 가지 신앙 고백, 곧 부활 사건 ─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 과 성찬례에 관한 고백에서 전통이 보장하는 것에 명백히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럼으로써 바오로는 성찬례가 구원 활동의 수행과 관련된 지극히 중요한 핵심 진리라는 것을 암시하고자 한다. 구원 활동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정점을 이루며, 역사의 사건들을 통하여 실현된다. 그리스도교 예배에서는 성찬례에 그와 유사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성찬례가 신앙인들의 삶에 구세주의 죽음과 부활에서 오는 풍요로운 변화의 힘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또한 바오로는 성찬례와 관련된 전통의 최초 기원을 분명하게 힘주어 강조하면서 이것을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부활과 관련된 전통에 대해서도 바오로는 단지 “내가 전해 받았다.”라고만 말한다. 사실 이 전통은 생전의 그리스도를 본 사도들의 증언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최초의 증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가장 먼저 만나 뵌 여인들의 증언이었지만, 사도들이 그것을 듣고 확인한 후에야 그 증언은 공식적인 권위를 얻게 되었다. 성찬례에 관한 전통은 주님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다. 그것은 최후 만찬에서 성찬례를 제정하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원 사건이 있던 날 저녁에 최초로 거행하신 신비를 재현하도록 공식적인 권유를 하신 것이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그러므로 주님께 받은 전통은 증인들이 보장하는 기억을 전해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성찬의 신비를 통하여 그 기억을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결합시킴으로써 계속하여 교회를 이끌어 주시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의지를 전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성찬 거행에 적극 개입하신다는 것을 보장하는 전통이다. 성찬례를 만드시고 제정하신 주님께서 당신 교회의 개입을 통하여 계속하여 당신의 몸과 피를 봉헌하시는 것이다. 성찬례는 ‘주님’의 행위이다. 다시 말하여, 바오로 성인이 이 말에 부여한 의미에 따르면, 구원의 전능하신 힘을 충만히 소유하신 그리스도의 행위인 것이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빵을 축성하시고 이어 포도주를 축성하신 다음에 하신 이 말씀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바로 이 명령이 교회의 성찬례 거행을 특징짓고 있다. 루가는 이 말씀을 포도주의 축성에 앞서(루가 22,20 참조) 빵의 축성 직후에 놓고(루가 22,19 참조) 있는 반면에, 바오로는 이 말씀을 포도주의 축성 다음에 놓음으로써 이 말씀이 빵과 포도주의 축성을 모두 가리키도록 하고 있다.
이 명령은 성찬 거행의 반복뿐 아니라 거행 때에 반드시 되풀이되어야 하는 것들의 선택에 대해서도 현저한 영향을 미쳐 왔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시도록 권유함으로써 빵과 포도주의 축성이 되풀이되기를 바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빵과 포도주의 축성은 과월절의 두 가지 식사 예절인 처음의 빵의 축복과 마지막의 포도주 축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식사의 나머지 예절은 그리스도교 전례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이 그분의 뜻대로 늘 새롭게 재생되게 하려면 할 일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려 주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예배가 재생해 내는 것은 과월절의 어린양을 잡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빵과 포도주의 축성이다.
이 두 축성은 그에 해당하는 유다인의 두 가지 식사 예절을 따르지만, 그 의미는 크게 달라졌으며, 그것들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그 새로움은 식사에 더 높은 뜻을 부여해 주는 구원의 희생 제사에서 비롯된다. 유다교 전례에서 사용되는 빵의 축복은 빵의 본질을 그대로 지니면서 육신의 양식으로 쓰이도록 하지만. 예수님의 축성은 빵을 당신의 몸으로 바꾸어 영적 양식이 되게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다교에서 축복의 잔은 실제 포도주를 담아 손님들에게 건네기 위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교 전례에서 그것은 축성을 통하여 구세주의 피의 잔이 되어, 인간을 위하여 흘린 피에 생명을 불어넣는 지고한 사랑과 더불어 영적인 황홀감을 전달해 주려는 것이다.
사도들은 기본적으로 새로운 무엇, 곧 초기의 모든 전례가 상상하고 거행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무한히 뛰어넘는 무언가를 하여야 했다. “나를 기억하여”라는 말씀에는 엄청난 새로움이 표현되어 있다. 과월절 식사는 히브리 민족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키심으로써 당신의 힘을 드러내 보이셨던 지고하신 주 하느님을 기념하여 엄숙하게 행해지는 것이었다. 유다 민족들은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신 것에 놀라워하며 주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존경을 바쳤다. 유다인들의 예배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하시고자 행하신 기적의 행위를 되새기는 것이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찬미와 흠숭의 본질적인 동기를 발견하였다.
온전히 하느님을 향한 이러한 존경과 경의는 이제부터 그리스도께 집중되어야 한다. 이 새로운 식사는 “나”, 곧 예수님을 “기억하여” 거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나”는 사람인 동시에 특히 하느님이신 분의 “나”인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나는”이라고 말함으로써 당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드러내 보이셨던 분의 “나”이다. 그것은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라는 말에서 선언되듯, 영원에 속하시면서 인간의 모든 시간, 특히 유다 민족의 모든 과거를 지배하시는 하느님이신 “나”와 관계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가 하느님의 “나”라는 것을 인식하고 계셨다. 예수님의 신비로운 위격은 영원한 위격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기억하여 성찬 행위를 되풀이하라고 명령하시면서 구원 활동에서 당신의 “나”가 차지하는 지고한 위치를 인정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나”는 하느님 아드님의 “나”였으며, 성자로서 인류의 운명에 전례 없는 역할을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으로부터 존재하셨으므로 영원히 존재하실 것이고, 온 인류에 대한 사랑과 기도, 믿음을 끌어 모을 중심을 세우실 것이다. 모든 성찬 거행은 그리스도의 “나”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며, 마음과 정신을 강생하신 성자께 향하게 한다.

기념제

“나를 기억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후세의 인간들이 당신을 기억하기를 바라신 것만이 아니라, 성찬례를 기념제로 삼기를 바라셨다.
이 기념제는 그것의 객관적인 실재로 명확해진다. 그것은 단순히 주관적인 기억, 곧 생각에서만 실재인 회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외적으로 또 제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기념제는 역사 안에 결정적으로 아로새겨진 회상으로서, 기념하여야 할 사건에 영구적인 특성을 부여해 줄 것이다. 
그러므로 과월절 식사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가져다주신 해방을 해마다 되새기는 기념제이며 관습이다. 이 기념제는 과거의 사건인 이집트 탈출을 유다인의 기억에 되살려 주는 보증이었으며, 그들을 해방시키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더욱더 키워 주었다.
성찬례로써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기념제를 바라셨다. 과월절 식사를 성찬의 식사로 바꾸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일어났던 일을 영원히 재현할 기념제를 제정하신 것이다.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수난을 이끈 숭고한 사랑이 인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 사랑은 구원의 봉헌 제물을 영원히 새롭게 하며 교회 생활에서 함께 나누어야 할 식사로 바쳐지고자 했다.
성찬례는 기념제의 객관적인 실재에 대한 보증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념제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할 권한을 지니신 분이셨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하느님이셨고, 당신의 영원한 신성 안에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지배하는 권한을 지니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과거의 사건을 현재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시며, 따라서 교회의 시간이 흘러도 성찬례 제정 때 하신 행위를 끝없이 되풀이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는 “이 예식을 행하여라.”라는 권유가 하느님께서 성찬례를 통하여 활동하신다는 더욱 근본적인 진리를 숨길 수 없다는 것에 더 깊이 주목하여야 한다. “이 예식을 행하는” 사람인 사제의 중개를 통하여 활동하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고 바치시는 분도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성찬의 기념제가 유일무이한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 때문이다. 성찬의 기념제에서 기억과 실재의 현존은 일치한다. 거기에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단 한 번 영원히 성취된 희생 제사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 있다. 이 희생 제사를 기념할 때마다 그것은 다시 한 번 성사적 실재로서 현재의 사실이 된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드셨던 식사에 대한 단순한 기억을 훨씬 뛰어넘은 그 이상의 것이 있다. 성찬의 참뜻이 담겨 있는 이 식사는 구세주의 몸과 피의 현존으로 재현된다.
이 기념제는 최후 만찬의 기억을 구체적으로 되살리며, 인간을 구원의 강생 신비로 더욱 깊이 이끌기 위한 도구인 하느님의 오묘하심과 독창성에 감탄하게 하고, 그리스도께 더욱 강하게 매달리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미칠 이러한 이끄는 힘에 대하여 말씀하신 바 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요한 12,32). 성찬 거행에서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라는 말이 울려 퍼질 때, 그리스도의 ‘나’에서 비롯되는 이 보편적인 흡인력은 새로움을 얻게 된다. 구세주께서는, 처음에는 십자가 위에서 그 다음에는 승천하실 때 영광에 싸여 지상에서 높이 들어 올려지셨다. 성찬례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럽게 들어 올려지실 때와 영광스럽게 천상으로 승천하실 때를 기념함으로써 구세주의 권능을 더욱 널리 떨치게 하여 온 인류를 그분께 결합시키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봉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나’를 현존하게 함으로써 성찬례는 기념제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 기념제는 모든 이를 위하여 희생된 ‘나’의 영웅적인 봉헌으로 완성된 충만한 과거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온 세상으로 확대될 미래에 대한 보증을 담고 있다.


복음의 증언들

성찬례 제정에 관한 바오로의 증언 외에도 마르코, 마태오, 루가 복음의 증언도 있다. 성찬례 제정에 관한 네 이야기는 서로 조금씩 다르지만 그 사건을 이야기하는 방식과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방식에서는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이러한 일치가 작성과 보급에서 연대기적으로 더 오래된 바오로의 이야기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다. 마르코와 마태오의 이야기는 그 이전의 것으로 보이는 셈어의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두 가지 형태의 성찬 제정 이야기는 각각 독립적으로 발전하였다. 하나는 마르코가 이야기하는 형태로서 마태오가 이를 따랐고, 다른 하나는 바오로가 이야기하는 형태로서 이는 루가의 이야기에 영향을 미쳤다. 셈어의 형태에 더 가까운 마르코와 마태오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글자 그대로 더욱 충실하여 그 원형에 더욱 가까운 듯하다. 그러나 바오로의 본문은,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에 더 많이 적응되어 있지만 그 이야기의 기원인 전통으로 본질적인 충실성이 탄탄히 입증되고 있다. 특히, 바오로의 본문은 예수님에게서 직접 연유하였기 때문에 포함될 수 있었던, 성찬례 반복에 대한 명령을 담고 있다. 이 명령은 마르코와 마태오의 것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들의 전통에서 이 명령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곧 성찬례는 그리스도께서 최후 만찬에서 하셨던 행동을 그대로 따름으로써만 거행될 수 있다. 이 점에서, 실제로 바오로가 전하는 전통이 더욱 완전하며, 최후의 만찬 행위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더욱 충실하다.
그러므로 성찬례 제정 이야기의 어느 한 형태만이 유일하고 유효한 형태인 것처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네 개의 이야기는 우리가 성찬례의 진정한 기원을 재발견하는 데에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각각의 이야기마다 그 나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코의 본문(14,22-25)과 마태오의 본문(26,26-29)

마르코와 마태오의 성찬례 제정 이야기는 매우 비슷하다. 마태오 본문에서는 마르코의 것을 약간 부연하였지만, 이야기의 본질은 동일하다.

식사 초대. 마르코와 마태오의 본문에는 식사 초대가 들어 있다. “받아먹어라”(마르코), “받아먹어라”(마태오). 이러한 초대는 바오로와 루가의 본문에는 빠져 있지만, 예수님께서 빵을 들어 “이것은 내 몸이다.” 하고 말씀하실 때 당신의 몸을 음식으로 내어 주시고자 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에 확실히 들어맞는 것이다. 이러한 초대의 표현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과 똑같지는 않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몸을 참된 영적 양식으로 내어 주는 의도를 전달하는 성직자의 말과 행위에 함축되어 있다.
잔의 경우에, 마르코의 본문에서는 이러한 초대가 반복되어 나오지 않는 반면에 마태오의 본문에는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라는 말이 들어 있다. 모든 이의 참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이 초대는 모든 제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며, 이후 사제가 거행하는 성찬례의 경우에는 그곳에 있는 모든 신자를 대상으로 한다. 이 초대의 보편적 성격은 그리스도의 피는 많은 사람, 다시 말해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라고 선언하는 포도주 축성문과 특히 잘 어우러진다. 구세주의 희생 제사는 모든 인류를 위하여 바쳐지는 것이므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성혈을 마시는 성찬의 식사에 참여하도록 초대받고 있다.
먹고 마시라는 초대는 당신의 몸으로 신자들을 먹이시며 당신의 피로 그들의 갈증을 풀어 주고자 하시는 그리스도의 원의에 관심을 갖게 하는 효과가 있다. 성찬의 잔치를 베푸시고 모든 사람을 친히 그 잔치에 초대하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이러한 초대는 아들의 혼인 잔칫상을 차려 놓고 손님들을 부른 임금의 초대와 비슷하다. “모든 준비를 다 갖추었으니 어서 잔치에 오라고 하여라”(마태 22,4). 이러한 초대로써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하며,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할 따름이다”(요한 5,19).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르 14,24; 마태 26,28). 마르코와 마태오의 본문이 바오로와 루가의 본문과 다른 것은 특히 잔을 축성하면서 하는 말이다. “이것은 나의 피다.”라는 말은 더욱 직접적인 반면에, 바오로와 루가에서는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라고 좀 더 복잡한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좀 더 단순한 마르코와 마태오의 본문은 출애굽기에서 하느님께서 히브리 민족과 맺으신 계약의 조문에 더 가깝다. 모세는 번제물의 피를 사람들에게 뿌리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와 계약을 맺으시는 피다. 그리고 이 모든 말씀은 계약의 조문이다”(출애 24,8). 예수님께서는 이 조문을 택하심으로써 구약성서에서는 예표로서만 가치를 지닐 수 있었던 예식의 완성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 조문을 택하시어 거기에 본질적인 자격을 부여하신다. “이것은 내 계약의 피다.” 또는 좀 더 글자 그대로 표현을 하자면 “이것은 나의 피다. 계약의 피다.”
그리스도께서는 히브리 예언자들이 예언한 계약을 실현하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당신 피의 대가로 맺으신 계약 자체이시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인간의 중개자이신 것은 그분께서 하느님이시며 또한 인간이시기 때문이다. 과거에 하느님께서 맺고자 하신 새로운 계약에 관한 모든 예언을 초월한 계약이 그분 안에서 완전히 실현된다.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한편으로는 인간과 친교를 맺으시는 하느님이시며, 다른 한편으로는 희생 제사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하는 인간이시다. 그러므로 참되고 최종적인 계약은 강생하신 하느님의 아드님만이 이루실 수 있다. 그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유일하고 완전한 형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린 피. 바오로의 본문에서는 피의 존재를 강조하는 데 그치는 반면, 마태오의 본문에서는 피가 희생 제물로 바쳐지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피는 ‘많은 이를 위하여’, 곧 전 인류를 위하여 흘려진다. 계약은 희생 제사로 맺어지는 것이다. 강생의 신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류의 죄 때문에 계약은 본질적으로 속죄의 측면을 지닌 화해의 성격을 띠며, 피 흘림은 속죄의 상징적인 이미지이다. 하느님 아드님의 것인 이 피는 흘려짐으로써, 더 구체적으로는 제물이 되게 하는 아낌없는 사랑을 통하여 ‘많은 이’, 곧 전 인류의 구원을 얻어 준다. 그것은 마시도록 내어 준 피다. 거기에는 전 인류를 위한 희생 제물이라는 효력 외에도 성찬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위한 식사라는 효력도 있다. 그리스도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구세주와 지극히 심오한 결합을 이루며 구원의 희생 제사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포도주의 축성에 사용되는 조문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지상에 오신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시는 내용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르 10,45; 마태 20,28). 사람의 아들의 사명은 본질적으로 섬김에 있었으며, 그 섬김은 희생으로 최고점에 달하게 된다. 몸값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인류가 지은 죄에 대한 용서를 얻기 위하여 바쳐질 지고한 속죄의 희생 제물을 암시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많은 사람을 위하여 바쳐진 몸값의 개념은 그리스도와 계약의 긴밀한 유대를 전제로 할 것을 요구한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대신하시어 그들에게 구원을 얻어 주셨으며, 하느님의 생명을 풍성히 얻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를 대신하여 희생하심으로써 인간 개개인의 운명을 바꾸어 놓으신 것이다.
성찬의 식탁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마시도록 초대받은 피가 더욱 완전한 희생 제물의 피라는 근본적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피로 맺은 계약을 언급하는 것에 그친 바오로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로 희생 제물에 대한 암시를 하고 있다. 희생 제물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다음과 같은 말로도 확인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십시오”(1고린 11,26). 그리스도의 피를 음료로 내어 놓는 식사는 희생 제사의 열매로서 그 완전한 가치를 얻는다. 그 피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릴 때에 가장 고귀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희생 제사는 식사의 속성을 지니게 한다. 과월절 식사에 사용되는 붉은 포도주는 피의 개념을 상기시키는 데에 적절하였다. 유다교 예식에서 붉은 포도주는 과월절의 어린 양의 피를 상기시켰다. 최초의 성찬례에서 붉은 포도주는, 이후 최고의 과월절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의 피를 마실 것으로 내어 주신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계 약. 포도주 축성문에서, 예수님께서 계약 또는 새로운 계약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으신가? 마르코와 마태오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피를 계약의 피라고 부르신 반면에, 바오로와 루가에 따르면 그 잔을 당신의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이라고 선언하신다. 그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거나 미미한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성찬례 제정 때 그리스도께서 품으신 생각을 더 잘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예수님의 언어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의 하나인 단순성 때문에 우리는 “계약”이라는 단순한 표현을 더 좋아하게 된다. 또한 우리는 ‘새로운 계약’이라는 표현은 히브리 민족의 계약과 그리스도인의 계약의 차이를 강조하고 싶어 했던 그리스도인들이 덧붙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더욱 오래된 기원을 지닌 마르코와 마태오 본문은 단순히 ‘계약’이라고 언급한 것을 더욱 본래적인 것으로 보게 한다.
말 자체에 더 이상 수식이 필요 없는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시어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가장 진정한 계약이심을 전달하고자 하셨다. 사실 유일하고 실제적인 계약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구약에 언급된 계약들은 하느님께서 인간과 맺고자 하신 유일하고 최종적인 계약의 예표에 지나지 않았다. 히브리 민족과 맺은 계약들은 그것들이 표상한 그리스도와 관련해서만 유효한 것들이었다. 그러한 계약들을 통하여 죄인들이 하느님과 화해하고, 죄를 씻었을 때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장차 있을 구원의 희생 제사를 예견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을 새로운 계약과 동일시하였던 사람들은 새로운 계약을 낡은 계약에 대비함으로써 시간의 연속성과 관련하여 암시되어 온 것을 표현하거나, 아니면 예레미야의 예언을 바탕으로(예레 31,1) ‘새로운 계약’이 예수님에게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새로운 계약이라는 표현은 정당한 의미를 지닌다. 모든 경우에, 단순히 ‘계약’이라고 말씀하실 때조차, 예수님께서는 인류에게 새로운 은총의 질서를 가져다 준 새로운 계약을 의미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더욱 적절하고 풍부한 의미를 지닌 ‘계약’이라는 단순한 표현을 선호하셨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역사의 흐름과 역사의 순차적 연대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온 인류의 삶과 관련하여 보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유일한 계약이시다. 인류를 성부와 결합시키시고, 용서를 필요로 하는 인류가 성부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입을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온 세상에서 수없이 거행되는 모든 성찬 거행에서 영원한 계약의 음료로 제공된다.
전례에서 사용되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계약’이라는 단순한 말씀으로 뜻하신 바를 나타낸다. 이 계약이 새로운 것은 그것이 예수님과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계약은 단지 준비와 예표의 가치만을 지닌, 히브리 신앙에서 시작된 계약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계약이 새로운 것은 구원의 강생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새로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계약이 영원한 것은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어 인류의 미래를 인도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성에 힘입어, 과거 전체로 거슬러 올라갈 뿐만 아니라 인간 역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망라하기 때문이다. 계약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천상의 영원성으로, 세상 종말에 무한히 넘쳐흐를 영원성으로 인도하신다.
그리스도의 피로 맺는 친교를 통하여 성찬례는 인간의 삶을 새롭고 영원한 계약 속에 놓이게 한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인간의 운명을 가능한 한 가장 높은 차원에 놓이게 하는 유일한 계약이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포도주 축성문에서, “죄를 용서해 주려고”(마태 26,28)라는 표현이 실려 있는 것은 마태오의 본문이 유일하다. 이 말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 피”라는 표현의 목적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곧 속죄의 희생 제사, 죄를 용서받고자 바치는 희생 제사와 관계된다. 이러한 희생 제사는 유다교 예배에서 행하던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여기에서 희생 제사는 유일무이한 희생 제사이다. 희생 제물인 동물 대신에 인간의 생명을 바칠 뿐만 아니라 그것도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의 생명을 바치는 것이며, 그 희생 제사를 바치시는 분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이다. 성자께서는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용서를 받고자 자진하여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그러므로 속죄의 희생 제사는 놀라운 차원을 띠며, 특히 인류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드러내 보여 준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자유로운 결정으로 이 죄에는 희생 제물이 따랐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 말씀을 하셨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확실치 않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면 그것은 희생 제사의 유일한 목적이 죄를 용서해 주는 것임을 암시하는 것일 테지만, 사실 그보다 더 큰 목적이 있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희생을 통하여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얻어 주고자 하셨던 것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시고자”(요한 10,10-11) 오신 것이다.
그러나 해골산의 희생 제사는 죄의 용서를 보장함으로써 생명을 더욱 풍성히 전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마태오의 복음에서 전해 주는 말들은 본질적인 진리, 곧 그리스도께서 악의 세력을 물리치신 승리를 나타내고 있다. 이 말은 세상이 죄로 가득 차 있지만 구원받았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모든 성찬 거행은 세상의 모든 악보다 강하다. 세상에 드러나는 악들 때문에 슬퍼하고 낙담하는 사람들은 성찬례에서 그들의 슬픔을 달래 줄 해답을 발견한다. 성찬례는 구세주께서 모든 악의 세력을 물리치신 결정적인 승리를 되새겨 주고, 죄의 용서에 대한 보상으로 얻게 되는 사랑의 생명을 풍성하게 전해 준다.

루가의 본문(22,19-20)

성찬례 제정의 말.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제정하시며 하신 말씀에 관하여 루가가 전해 주는 본문은 바오로의 것과 일치하지만, 희생 제사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빵의 축성에서 바오로의 짧은 조문,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라는 표현이 루가 복음에서는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라는 표현으로 대치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바오로의 본문에서처럼, 예수님께서는 깊은 의미가 담긴 단순한 말씀으로 단지 “너희를 위한”이라거나 포도주 축성에 사용된 조문과 같이 “많은 사람을 위하여”라는 표현만을 사용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너희를 위한”이라는 표현은 더욱 일반적인 형태인 “많은 사람을 위하여”라는 표현과 달리, 참석한 사람들에게 특별히 적용되는 듯하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바치는 희생 제사에서 중요한 것은 아낌없이 주어진 선물에 감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루가의 본문에서는 몸을 무엇보다도 음식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선물로 “내어 주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같은 방식으로, 잔의 축성에서 바오로는 그것을 단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으로 규정하고 있는 반면에, 루가는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문법적으로 일치하기 어려운데도 루가가 이 말을 덧붙인 것은 바오로의 조문이 너무 짧다고 보아 그것을 완전하게 하려고 매우 고심하였다는 증거이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몸을 내어 주었듯이, 피도 많은 사람을 위하여, 따라서 식사에 참석한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것이다. 희생 제사에 대한 언급으로 우리는 몸과 피를 내어 주는 것의 올바른 가치를 이해할 수 있다.

종말론적 분위기. 루가의 본문은 성찬례 제정에 관한 말씀 이전의 과월절 식사와 관련된 다른 두 설명을 담고 있기 때문에 해석에 어려움이 있다.

“만찬 시간이 되자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이 과월절 음식을 함께 나누려고 얼마나 별러 왔는지 모른다. 잘 들어 두어라. 나는 과월절 음식의 본뜻이 하느님 나라에서 성취되기까지는 이 과월절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자, 이 잔을 받아 나누어 마셔라. 잘 들어라. 이제부터 하느님 나라가 올 때까지는 포도로 빚은 것을 나는 결코 마시지 않겠다.’ 하셨다”(루가 22,14-18).

이 두 선언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며, 그 둘은 성찬례 제정과 구체적으로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이 두 선언은 파스카 만찬의 종말론적 분위기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선언은 만찬 시작 때 나온 것이고, 두 번째 것은 끝 무렵에 나왔을 것이다. 루가는 이 둘이 서로 긴밀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모두 성찬 이야기 앞에 놓았다. 물론 첫 번째 것은 성찬 제정 앞에 오며, 두 번째 것은 그 뒤에 온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이 식사를 기념하고 싶은 강한 바람을 나타내신다. 그것은 당신이 수난을 받으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지내는 과월절 식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식사가 특별히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될 식사가 되기를 바라시며, 서둘러 이를 완성하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 곧 교회 안에서 거행될 성찬례로써 이를 완성시키실 것이다.
그것은 종말론적 완성과 관련된 것이다. 곧 하느님 나라는 마지막 때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성찬례는 인간이 하느님 나라의 성장에 필요한 천상의 양식을 얻는 지상의 식사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 나라는 온 세상에 퍼져 결정적인 환희의 시작을 준비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거행하시고자 하는 개인적인 바람을 강하게 나타내신 것에 주목하자. 셈어식 표현인 “얼마나 별러 왔는지 모른다.”(루가 22,15)는, 그 사람 전부를 포함하는 깊은 바람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찬의 식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사람들이지만, 그들보다 더 그것을 바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이러한 바람을 말로 나타내신 것은 우리도 그것을 바라게 하시려는 의도에서이다. 함축적으로 그것은 성찬례에 참여하고 성찬례를 통하여 친교를 나누고자 하는 바람이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두 번째 종말론적 선언은 마지막 잔을 드시며 하신 것이다. 과월절 식사에는 네 개의 잔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잔은 아마 네 번째 잔이었을 것이다. 축복의 잔이라 불리는 세 번째 잔이 이 선언에 뒤이은 잔이 될 수 없는 것이, 예수님께서는 이후로 더 이상 포도로 빚은 것은 마시지 않겠다고 단언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지막 잔만이 이러한 선언을 하실 수 있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찬의 포도주를 담은 축성된 네 번째 잔은 마시지 않았을 수도 있고, 당신 피의 성찬식은 단지 제자들이 수행해 온 행위였을 수도 있다.
따라서 과월절 식사의 네 번째 잔을 마셔야만 하느님 나라가 시작될 것이다.
이는 성찬례와 하느님 나라의 도래, 곧 하늘나라에 들어서는 문인 교회의 발전 사이의 유대를 보여 준다.

요한의 증언

요한 복음서는 성찬례 제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왜 요한 사가가 바오로와 공관 복음서의 가르침에서는 그토록 중요한 그 이야기를 전해 주지 않았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그 중요한 이유는 복음사가의 의도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요한 사가는 다른 복음서들이 전해 준 내용을 완성하고자 노력하였고,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제정하시며 하신 말씀과 행위를 다른 복음서들이 충분히 입증하였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계속해서 재현되어 온 매우 친숙한 의식이었다.
요한 복음서는 성찬례 제정에 관하여 다른 복음서들이 제공한 가르침에 두 가지 본질적인 내용을 추가로 담고 있다. 먼저 무엇보다 요한은 빵의 기적 이후에 가파르나움의 회당에서 한 최초의 성찬례 선포를 이야기하고 있다. 요한이 기적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예수님께서 빵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6,11) 것을 상기시키면서 그 기도가 ‘성찬례’라는 이름의 기원임을 암시하고 있다. 기적의 의미를 밝혀 주시고자 하신 연설에서(요한 6,26-28)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음식으로, 당신의 피를 음료로 내어 주시려던 의도를 드러내 보이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이 성찬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사실을 고려할 때 매우 확고한 의도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심으로써 성찬례와 강생의 관계를 강조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당신의 몸과 피가 영광스러운 상태로, 곧 영적인 생명으로 영광을 얻는(요한 6,61-63 참조) 상태로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이러한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성찬 식사의 본질적인 의미를 밝혀 주시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51)라는 말씀을 토대로 식사의 희생 제사적 요소를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빵의 축성문과 매우 유사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라는 말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찬례의 약속은 이미 성찬례 제정을 통하여 실현될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왜 요한이, 그리스도인들이 전례에서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듣는 성찬례 제정 이야기를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 내용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요한 복음서는 최후 만찬의 마지막 중요한 행위와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곧 세족례와 예수님께서 성찬의 식사에 관하여 설명하시는 내용을 전해 주고 있다. 스승 예수님께서는 성찬례를 출발점으로 삼으시어, 사랑의 새 계명과 같은 당신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사항들을 더욱 상세히 설명하신다. 이 가르침의 말미에 오는 기도는 성찬례의 특징인 봉헌과 감사(요한 17,1-26 참조)의 의미를 밝혀 준다.
사실 요한은 인간 조건에 스며든 하느님의 영원성의 신비인 성찬례를 우리에게 가장 잘 보여 준 복음사가이다. 그는 이미 복음서 첫머리에서 사람이 되신 말씀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와 같은 인간 생명을 지닌 이 살은 성찬례의 음식으로 주어지는 살이다. 빵의 기적을 설명하면서 요한은 성찬례가 전해 주는 생명의 영원성을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요한 6,54)이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상태에 있는 살이며, 성령에게서 생명을 받은 살이다. 하느님의 생명을 전해 준다는 것은 성찬례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람의 아들에게 속한 영원성이 인간의 마음속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이는 복음사가가 인간 생명의 본질적인 가치를 잊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의 아들은 인간성을 받아들이신 신성한 인물이시며, 성찬례의 살은 생명을 주시는 성령에게서 생명을 얻지만 진정으로 인간의 살인 것이다. 성찬례 제정의 역사적 행위는 결코 가려지지 않는다. 요한 복음은 우리에게 최후 만찬에서 일어난 일을 가장 완전히 경험하게 해 주는 복음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찬례 제정 때 품으셨던 감정을 더욱 잘 이해시킨다.
유다의 배신이라는 비극에서, 요한은 성찬 식사 때에 일어난 그러한 배신에 예수님께서 얼마나 깊은 상처를 입으셨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에서 우리는 성찬례가 친밀함과 진정한 신뢰가 깃든 지극히 긴밀한 관계를 전해 주었다는 것에 주목한다.
성찬례 제정에 관한 역사적 확인도 필요하지만, 가능한 한 그 신비에 깊이 몰입할 필요도 있다. 요한은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도와준다.

성찬례 제정의 과월절 분위기

성찬례 제정은 과월절의 전망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이 유다인의 과월절 축제 바로 전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드신 식사의 성격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어 왔다. 그것이 실제로 과월절 만찬이었을까? 문제는 요한 사가와 공관 복음서 사가들이 말하는 연대가 서로 다르다는 데에 있다. 공관 복음서 사가들은 예수님께서 과월절 축제 때에 돌아가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데 반해, 요한은 예수님께서 과월절 축제 전날에 돌아가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과월절 축제 전날에 돌아가셨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드신 식사는 과월절 축제 이틀 전, 곧 십자가형을 언도받기 전날 저녁에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에 과월절 만찬이 아니었던 듯하다. 따라서 최후 만찬의 과월절 분위기만을 주장할 수 있는가 아니면 최후 만찬을 과월절 만찬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는 요한 사가와 공관 복음 사가들의 불일치에서 제기되는 연대기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정확한 날짜에 대한 문제를 검토하기에 앞서, 복음의 증언이 최후 만찬의 과월절 성격에 대하여 어떠한 의혹도 남기지 않은 것 같다는 점에 주목하자. “무교절 첫날에는 과월절 양을 잡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날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께서 드실 과월절 음식을 저희가 어디 가서 차렸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마르 14,12).
마태오는 스승의 지시가 충실히 이행되었음을 강조한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과월절 준비를 하였다”(마태 26,19). ‘과월절’이라는 말이 과월절 만찬을 가리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특별히 정성을 기울여 준비하도록 명령을 내리셨다는 것은 만찬의 과월절 성격을 확인해 준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받은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는 것은 이를 확인해 준다. 그러한 충실성은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이 과월절 음식을 함께 나누려고 얼마나 별러 왔는지 모른다.”(루가 22,15-16)는 루가의 문장도 특징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 과월절 음식을 드셨다는 사실은 분명 중요하다. 또한 “하느님 나라에서 성취되기까지는”이라고 덧붙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과월절 음식의 본뜻은 이제 하느님 나라에서 열매 맺을 새로운 실재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더 나아가, 식사 전에 요구되는 정결 예식(요한 13,10 참조)에 대한 암시라든가 할렐 찬미가의 마지막 부분으로 만찬이 끝을 맺는 것과 같은 일련의 표징들은 과월절 만찬의 고유한 특징들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세부적인 것들의 일치는 복음서의 선언들을 더욱 명백하게 해 준다. 그러므로 시리아의 에프렘이 4세기에 예수님의 과월절 만찬의 저녁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은 행복을 노래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복되도다, 모든 이의 마지막 밤이여, 이집트의 밤이 그 밤에 성취되었도다. 그 밤에 우리 주님께서 과월절 식사를 드시고 친히 위대한 파스카가 되셨도다. …… 보라 저 파스카를, 보라 저 모습을, 그 성취를.”4)

 

제3장  성찬례: 명칭과 본질


다양한 명칭들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에서 세우신 성사는 여러 이름으로 불려 왔다. 성찬례는 다양한 측면을 제시하는 만큼, 명칭도 다양하게 붙여 왔던 것이다.
초기 교회에서 성찬례는 ‘빵 나눔’이라고 불렸다. 빵을 쪼개는 것은 식탁에서 상석에 앉은 사람만이 할 수 있었으며, 그리스도의 몸을 음식으로 내어 준 과월절 식사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도 빵을 나누어 주시는 모습에서 그분이 스승임을 알아보았다(루가 24,35 참조). 예수님께서 사라지셨기 때문에 이 빵 나눔은 식사에 대한 전조에 그쳤지만, 루가 복음사가는 여기서 앞으로 예수님께서 성찬례 안에서 현존하실 것이라는 징조를 본 것이다. 사도행전에서도 루가는 초기 공동체의 여러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로 빵 나눔을 들고, 특히 날마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나누었다고 기록하였다(사도 2,42-47).
이보다 나중에 등장한 ‘성찬례’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실 때 하신 감사의 기도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였으며, ‘감사를 드린다’라는 그리스어 eucharistein에서 온 것이다. 이 기도는 특히 예수님과 성부의 관계를 바탕으로 식사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였다. 예수님의 기도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으므로 ‘성찬례’(Eucharistia)라는 말은 그 예식 또는 예식의 거행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거룩한 신비들이 ‘성찬례’(감사제)라고 불리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신비들은 수많은 은총의 증거로서 하느님 구원의 근본적인 차원을 보여 주며 우리가 언제나 감사를 드리도록 이끌어 준다.`…… 그러므로 사제는 거룩한 희생 제사를 드릴 때, 온 세상, 우리보다 앞서 간 사람들과 현재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 이미 태어난 사람들과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에 대해서 감사드리라고 명한다.”5)
또 다른 이름 가운데 ‘만찬’이라는 말은 물론, 성찬례가 최후 만찬 때에 거행되었고 이 만찬에 결정적인 특성을 부여하였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이와 비슷하게, 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려주신 식사라는 의미로 ‘주님의 만찬’이라는 말도 쓴다.
‘모임’이라는 뜻의 시낙시스(synaxis)는 성찬례 거행을 위해 모인 집회를 뜻하며, 성찬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치, 공동체의 일치의 이상을 표현한다.
‘기념제’는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세워진 것, 더 자세히 말하면 그분의 수난과 부활이 교회 생활 안에 드러나게 하는 것을 뜻한다.
‘거룩한 전례’와 ‘거룩한 신비’라는 표현은 더욱 일반적인 의미를 지니고는 있지만 성찬례를 지칭하는 데에 쓰여 왔다. 이 말들이 성찬례를 지칭할 경우에는 탁월한 전례 거행, 구원 신비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거룩한 성사’는 거행을 통해 현존하게 되는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특별히 지칭한다.
‘거룩한 희생 제사’는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의 희생 제물을 새롭게 해 주는 은총을 특별히 가리킨다.
‘친교’는 성찬의 식사에 참여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널리 쓰인다. 바오로 성인도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피를 함께 나누는 것에 대하여(라틴어로 communio)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친교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일치시킬 뿐만 아니라 그 식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한 몸 안에서 일치를 이루게 하는(1고린 10,16-17 참조) 효과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친교’는 그리스도와 이루는 일치와 신자들 간의 일치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빵의 표징 아래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의 현존도 ‘하늘의 양식’, ‘천사의 양식’, ‘초실체적 양식’, ‘노자성체’(라틴어로 ‘여행을 위한 빵’의 뜻) 등 여러 말로 불린다.
가장 흔한 말인 ‘미사’ 또는 ‘거룩한 미사’라는 말은 신자들이 거행이 끝나고 파견될 때 하는 말, “미사가 끝났습니다.”(Ite, missa est.)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가장 널리 쓰이는 표현인 ‘성찬례’(Eucharist)

용어의 변천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성찬례’가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 중에 하신 기도를, 그리고 궁극에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예식 전체를 일컫는 말이 된 경위를 알 수 있다.
마르코(14,22)와 마태오(26,26) 복음은, 예수님께서 빵을 축성하시면서 하신 기도는 축복의 기도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분사 eulog뛱as는 본래 ‘축복한’이란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어, 유다교 관습에 따라 축복하신다.
이 기도의 의미를 설명하려면, 우선 이것은 빵을 축복한다기보다는 빵을 향한 축복임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유다교 용어에서 ‘축복’은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은혜로 베풀어 주시는 자비를 말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받은 크나큰 은혜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사람들이 드리는 경의를 뜻한다. 식사 전후에 바치는 기도는 축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6)
빵의 기적 이야기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마르 6,41; 마태 14,19와 루가 9,16도 참조). 빵이 불어난 것은 성체성사를 예시하는 기적이므로, 이 기적 전에 하신 기도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기 전에 하신 기도에 대한 전조로 소개되고 있다. 그것은 축복(eulogia)이며, 아직 ‘성찬례’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최후의 만찬에서 하신 기도도 마찬가지로 유다교 관례에 따라 하는 eulogia 곧 축복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생각은 예수님께서, 과월절 식사에서 ‘축복의 잔’이라 불리는 세 번째 잔을 당신 성혈의 잔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오로 성인도, “우리가 감사를 드리면서 그 축복의 잔을 마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1고린 10,16)라고 이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 잔의 이름을 따서 그리스도의 성혈을 통한 친교 예식 또한 eulogia 곧 ‘축복’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을지 모른다.
마르코와 마태오도 예수님께서 빵을 축성하시며 하신 기도문에 축복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두 복음사가는 이 기도를 축복(eulogia)이라는 말로 설명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eucharist뛱as: 마르 14,23; 마태 26,27)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그들은 잔 축성 기도를 ‘감사’의 기도라고 지칭한다.
또한 eulogia는 eucharistia, 곧 ‘Eucharist’로 바뀐다. 축복의 잔을 이야기하고 있는 바오로도 성체성사 제정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예수님의 기도를 일컬어 ‘감사를 드린다.’(eucharistein)라는 동사를 쓰고 있다(1고린 11,24). 루가도 마찬가지이다(22,17).
그러므로 우리는 성체성사 제정에 대한 첫 증언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유다교의 축복 기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새로운 명칭이 붙음으로써 독특한 성격을 지니게 되고 더 이상 유다교 전례와 동일시되지 않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명칭이 바로 ‘성찬례’이다.
복음보다 나중에 쓰인 『열두 사도의 가르침』(Didach?에서 ‘성찬례’는 예수님께서 하신 감사의 기도만이 아니라 그 예식 전체를 나타낸다. “주님의 날에는 함께 모여 빵을 나누고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우선 죄를 고백함으로써, 순결한 희생 제물을 바칠 수 있도록 한다.”7) 그 후, 유스티노 성인은 최후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에 관한 복음의 전승을 전하면서 eucharistein이라는 동사만 그대로 쓰고 있다.

“우리는 일상적인 음식이나 일상적인 음료로서 받아 모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사람이 되시고 당신의 몸과 피로 우리 구원을 떠맡으신 우리 구세주 예수로서 받아 모시는 것이므로, 그분의 기도로 성찬이 된 양식은 ……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몸과 피라고 배워 왔다.”8)

그러므로 더욱 정확히 말하면, 성찬례는 빵과 포도주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뜻한다.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이 되는 덕분에 감사 기도는 효과적인 청원으로 여겨진다.

감사 기도의 새로움

최후의 만찬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감사’의 기도로 표현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뛰어난 효과를 가진 그 기도의 새로움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유다교의 ‘축복’은 그러한 놀라운 효과를 가지지 못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기도와 말씀이 지닌 변화의 힘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 새로움은 이러한 효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새로움은 특정한 태도, 곧 축복과 동등하지 않은 감사의 태도로 표현되었다. 고대 히브리어에는 감사의 의미에 대한 적절한 용어가 없었지만,9) 예수님의 기도는 이러한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유다교의 축복 기도에는 시편의 몇몇 훌륭한 표현들로 전해지는 찬양의 태도가 담겨 있다. 찬양은 하느님의 초월성과 전능하심에 훨씬 못 미치는 인간의 감정으로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들을 높이 기리는 것이다.
감사 기도는 하느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의 위대함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놀라운 일에서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얻어 낸다는 것에 특별히 강조점을 둔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거리가 강조되지만, 감사 기도는 하느님께서 피조물에게 전해 주시는 부요를 찬양하는 것이다. 감사드림으로써 그러한 자비에 대하여 하느님께 존경을 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감사 기도가 하느님의 초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세상에 은혜를 풍성히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그러한 겸손하신 초월성에 대한 놀라움을 강조하는 것이다.
감사 기도는, 하느님께서 인간과 계약이나 친교를 맺으시고자 인간에게 다가오실 때 드리게 된다. 옛 계약에서는, 선택받은 민족을 위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인정하도록 권유하였지만, 백성의 죄와 매우 대조되는 하느님의 주권의 두려운 측면이 주로 강조되었다. 새 계약에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완전하고 확실하게 드러내 보여 주심으로써 인간의 운명에 대한 전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성부께서 성자에게 부여하신 통치 행위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켜서는 안 되고, 찬양만 받아서도 안 되며 반드시 감사가 따라야 한다.
이러한 감사의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완전한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감사이다. 한편으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인간에게 주신 은총의 중요성과 가치를 모두 인정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성부에 대하여 자주 말씀하시며 하느님의 갈망, 곧 당신의 선하심을 수없이 드러내시는 그 갈망에 감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받은 모든 것에 대한 당신의 찬미와 감사를 제자들에게도 전달해 주고 싶어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삶을 사시며 당신 제자들도 그렇게 하도록 이끄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아버지께 들어 높여 주는 감사의 마음에 이끌려, 지극한 효심으로 아버지의 사랑에 응답하고자 하신다. ‘감사’는 우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려 주시는 분께 우리가 받은 것을 조금이나마 돌려 드리려는 것이다. 하느님의 강생하신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만 하느님께 받은 모든 것을 돌려 드릴 수 있으며, 당신 자신이 받으시는 만큼 큰 사랑을 인간에게 주실 수 있으시다.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감사를 되돌려 드리는 것이 언제나 제한되어 있고, 받은 것에 훨씬 못 미치지만, 성자께서는 당신이 받은 모든 것을 온전히 돌려 드릴 수 있는 위치에 계시다. 성부의 완전한 선물에, 성자께서도 완전한 선물로 응답하신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도 감사를 드리시면서 아버지께 당신의 온 존재를 바치는 봉헌을 하시는 것이다. 감사 기도는 봉헌에 완전한 가치를 부여한다. 아버지께 받은 모든 것은 완전한 봉헌을 통하여 아버지께 되돌려졌다.


예수님의 삶과 감사

성찬례 준비

예수님의 깊은 감사의 태도는 최후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시기에 앞서 기도를 드리실 때 갑자기 드러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효심 어린 태도에서 나온 특별한 마음가짐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예수님께서 당신 사명을 수행하고자 하셨던 공생활 내내 길러지고 드러났다.

기쁨의 찬미가. 기쁨의 찬미가는, 아버지께서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에 감사를 드리시고자 예수님께서 기쁨에 넘쳐 하시는 말씀 속에 들어 있다. “바로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루가 10,21).
예수님께 감사는 단순히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의 마음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사시면서 하느님께 의지하시는 성자의 신격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사는 단순한 인간적인 몸짓이 되어서는 안 되며, 신자들을 성자의 감사하는 마음에 동참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고 그들의 감사를 높은 왕좌에 계시는 아버지께 전해 주시는 성령으로 고무되어야 한다.

라자로의 부활. 라자로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감사의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내면생활에서 이러한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기회가 된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요한 11,41).
기적이 일어나기도 전에 이러한 기도를 드리셨다는 사실은 놀랍다. 이후에 성찬의 힘으로 일어난 수많은 기적들의 경우가 그러했듯이, 이때 예수님의 감사는 기적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면서, 그 말씀들로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처할 수 있도록 그 말씀의 의미를 명확하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예수님의 기도를 아버지께서 듣지 못하실 수도 있었을까? “그리고 언제나 제 청을 들어주시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여기 둘러선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 주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요한 11,42).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시기 때문에, 축복의 말로 당신의 성체와 성혈의 현존이 나타내는 기적을 일으키시기에 앞서 감사 기도를 드리신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일어나게 하시기 전에 사람들이 당신의 감사 기도를 들을 수 있기를 바라셨다. 이 기적은, 예수님의 공생활에서 가장 위대하고 인상적이며 당신 자신의 부활을 가장 암시적으로 보여 주는 기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적을 행하시고 라자로에게 무덤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위로만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님을 이해시키고 싶어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기적을 행할 힘을 달라고 간청하셨으며, 이 때문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것이다. 이러한 부자 관계에 빛을 비추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가장 위대한 기적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 곧 아버지의 주권 행위에서 비롯된 모든 것, 아버지께 받은 모든 것으로 일어나는 것임을 보여 주신다.
또한 어떤 면에서는 라자로의 부활에 대한 감사 안에 예수님 자신의 부활에 대한 감사가 예시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천상 생명을 얻으실 것이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감사는 지상에서 드릴 수 없는 것이었다. 라자로의 부활이 구세주의 부활을 예표하였듯이, 라자로의 무덤에서 드리신 감사 행위는 구원 사건의 정점을 이룬 기적을 내다보고 있었다.

성찬례 제정의 순간에

최후의 만찬에 앞서 감사를 드리신 것은 성체성사 제정 때에 예수님께서 바치신 감사의 깊은 의미와 표현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이를 기록하고 있는 “감사를 드리신 다음……”이라는 말은 매우 간결하여 평범하고 상투적인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성찬 거행에서 이 말이 반복된다는 것에 때로는 주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드리신 기도는 예수님의 영혼 안에서 충만해진 감사의 힘으로 생명을 얻는다.
이러한 간결한 기록은 최후의 만찬에 관한 요한 복음의 암시들과 성찬례의 의미를 조명하신 예수님의 몇몇 말씀들로 완성되어야 한다.
다른 복음사가들이나 바오로 성인과 달리 요한은 성찬례 제정에 관하여 전하고 있지는 않지만,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의 마음 상태를 최대한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준다.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요한 13,1).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반 계획을 알고 계셨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진리를 알고 계셨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의 손에 맡겨 주신 것과 당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가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을”(요한 13,3) 아셨던 것이다.
아버지께 모든 것을 받았다는 이러한 인식이 예수님의 감사의 핵심이다. 우리 마음을 다하여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려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삶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깨달을 때에만 그것을 감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쓰실 수 있는 모든 힘을 알고 계셨으며, 당신은 아버지에게서 오셨다는 것도 알고 계셨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주셨으므로, 아버지께 감사드리셨다. 아들로서 그분은 아버지께서 지니신 모든 것을 받았다. 아버지의 너그러우심이 조금도 남김 없이 드러났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왔으며 아버지께 돌아갈 것을 알고 계셨다. 최후 만찬에서 하신 말씀 끝머리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왔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 돌아간다”(요한 16,28). 아버지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는 것과 그렇게 하려는 의지는, 성찬례에서 표현된 대로, 감사의 필수적인 측면을 형성한다. 아버지께 돌아가심으로써 성자께서는 아버지께 받은 모든 것을 아버지께 돌려 드릴 수 있게 된다.
이를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봉헌의 형태로 감사를 표현하실 수 있다. 아버지와 동등한 관계를 누리고 계신 아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봉헌으로 아버지께 받은 모든 것을 돌려 드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충만히 받으신 것에 부족하지 않은 봉헌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이러한 봉헌으로 예수님께서는 무한한 사랑, 희생 제사로 정점에 이르는 사랑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통하여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시고 사람들 사이에 다시 한 번 현존하실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이 봉헌 덕분이다. 이 봉헌은 실제로 성찬례가 지닌 감사의 본질에 속한다. 예수님의 감사를 단지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으로만 생각한다면 진리에서 한참 멀어지는 것이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속죄의 의미가 배제된 찬미와 감사의 희생 제사, 또는 십자가의 희생 제사에 대한 단순한 기념으로만 미사 성제를 정의내리는 것을 단죄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희생 제사와 관련하여 드리신 감사의 온전한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여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과 죄 많은 인간 사이의 화해를 가능하게 하는 속죄의 은총인 아버지의 은총에 응답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감사에는 구세주께서 구원을 위하여 완전히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최대의 헌신이 내포되어 있다. 아버지께서 강생을 통하여 성자께 주신 모든 것은 구원 활동을 목표로 한다. 성부께 대한 응답으로 성자께서 바치시는 모든 것은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한 것이다. 성자의 감사는 아버지의 근본적인 은총에서 비롯되며 하느님께 바쳐지는 봉헌의 여정을 실현시킨다.

성부께 열렬히 나아가시는 성자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드리신 감사 기도는 지상 생활 전반에 걸쳐 발전된 그분의 내면의 자세를 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기도는 아버지께 모든 것을 받았다는 인식과, 희생 제사를 바치심으로써 아버지께 돌아가려는 그분의 의지를 표현한다.
그것은 단순히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외아드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신 성부의 완전한 선물에 응답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효심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구원 사건 안에 온전히 개입된 감사의 힘으로, 또 희생 제사의 효과를 온전히 보장해 줄 수 있었던 감사의 가치나 정도의 힘으로 표현되었다. 예수님의 지상 생활 동안 성부께 열렬히 나아가신 성자의 행위는 예수님의 몸과 피의 봉헌이 된 빵과 포도주의 봉헌에 더욱 높은 의미를 부여하면서 드러났다.
요한 성인의 선언에 따르면, 이러한 효심에서 우러난 감사는 삼위일체의 영원한 신비에서 비롯되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요한 1,1). 영원에서부터 성자는 영원하고 무한한 역동성 안에서 성부와 함께 계셨다. 성부를 사랑하는 성자의 이러한 역동성이 바로 강생의 여정을 지배하였으며 사람이 되신 예수님 안에 감사의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하느님의 역동성의 모든 힘이 그러한 감사 안에 들어 있다. 성찬례의 감사 기도는 성부께 대한 성자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만찬의 제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감사의 본질적인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음식을 성찬이라고 부른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성자께서 성부께 드린 감사 기도에서 빵과 포도주를 구세주의 몸과 피로 변화시킨 신비한 힘을 본 것이다.

예수님의 감사 기도에서 성령의 역할

우리는 예수님의 감사 기도에서, 성부께 올라가신 하느님 아드님의 거룩한 위격의 권능뿐만 아니라 성령의 현존 또한 인식하여야 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러한 현존은 특히 루가 복음사가가 기쁨의 찬미가를 전해 주는 루가 복음(루가 10,21)에서 두드러진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치는 경험을 하신다. 마태오 복음(11,25)은 이 부분을, 어린이들에게 보여 주시는 사랑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성부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의 말을 전해 주는 데에 그친 반면, 루가는 특별히 스승의 내면의 자세, 곧 성부께 계속하여 기도드리게 하는 열정과, 특히 그러한 열정을 불러일으키시는 성령께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특히, 루가는 예수님의 지상 생활 전반에 걸친 성령의 역할을 가장 강조한 복음사가이다. 감사 기도에서 이러한 성령의 역할은, ‘영’이 숨을 의미하며 열정의 마음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만으로 설명되어서는 안 된다. 더 근본적으로, 성령께서는 성자를 성부께 일치시키시는 거룩한 위격이시다. 성령께서는 강생하신 성자께서 성부께 아들로서 존경을 바치게 하는 효심을 불러일으키신다.
또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구원의 희생 제사의 삼위일체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음을 살펴보자. “하물며 성령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흠 없는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데나 죽음의 행실을 버리게 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하는 데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히브 9,14) 십자가 위의 성자의 봉헌은 성령을 통하여 성부께 전달된다. 이 성령은 ‘영원한 구원’을 일으키는 작용에 힘입어 영원한 영이라고 불린다.
다시 말하여, 감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봉헌에서도 성자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성부께 나아가신다. 사실 우리는 위에서 최후 만찬 때의 예수님의 감사에 관하여 강조하였듯이, 이러한 감사는 봉헌을 뜻하며 아버지께 온전히 돌아가는 수단인 구원의 희생 제사의 봉헌을 통하여 표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의 신비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본질적인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 성령께서는 감사의 봉헌이 충만하게 이루어지도록 보장하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인 생활과 감사

그리스도인 삶 전체에 미치는 영향

우리가 성찬례에서 예수님의 감사가 지니는 결정적인 영향을 인정하여야 한다면, 그리스도인 생활 전체는 이러한 방향을 지향하여야 한다. 분명,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교회 안에 감사의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하셨다. 성찬례 거행은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심어 주어야 한다. 또한 거행과는 별도로, 감사하는 생각과 마음과 태도를 불러일으키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성찬례’는 성사를 지칭하는 단순한 이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찬례는 존재와 행위의 모든 측면에서 실현되는 실재가 되어야 한다. 이 실재는 예수님 안에서 형성되었으며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 사고와 생활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성령과 지속적인 감사의 태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조화롭게 발전되어 나가려면 감사의 정신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가장 힘든 시련에 빠져 계시던 때에, 부당한 단죄의 고통과 십자가 처형의 고통과 모욕을 받으셔야 했던 때에, 그분께서는 감사에 충만한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셨다. 이러한 시련을 주신 아버지를 원망하는 대신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받았고 또 받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분명한 감사를 드리셨다. 성체성사 제정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받은 모든 것에 존경을 다 바쳐 감사하시며 이러한 마음을 다른 모든 인간과 나누고 싶어 하셨으며, 우주의 운명을 이끄시는 무한하고 절대적인 선에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하셨다.
예수님께서 멀리 내다보시고, 인간이 따를 길을 인도하시는 방법으로 감사를 가르쳐 주신 것은 분명 올바른 것이었다. 그분의 모범은 시련에 빠져 있는 모든 사람에게 아버지께서 주신 수많은 은총에 마땅히 감사드릴 수 있게 높은 곳을 바라보도록 촉구한다. 최후의 만찬의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이 인간에게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돕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은총을 너무 쉽게 잊고 감사드리지 못하기에,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관점을 일깨우신다.
이러한 관점은 또한 구원과도 관련된다. 이러한 관점은 갖가지 악을 일으키는 억압에서 인간 영혼을 구원하며, 우리의 마음이 사회관계에서 나타나는 악의 세력들에 사로잡히거나 구속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보는 관점이 비관주의로 이어져서 구원 활동이 승리하리라는 전망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사하는 태도를 가질 때에만, 모든 악의 세력을 이기시는 하느님 사랑의 무한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지나치게 비판적인 판단을 피하고 천상의 더 지고한 선을 보여 줌으로써 인간 행동의 긍정적인 여러 측면을 더 잘 식별할 수 있게 해 주는 건전한 낙관주의의 원천이 된다. 이것은 또한 참된 희망, 본질적으로 성부의 구원 의지와 그러한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모든 수단의 실천에 토대를 둔 희망의 원천이다.
구원 사건에서 이 같은 감사의 마음을 지니셨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순간에, 그러나 특히 고통의 순간에 인간에게 이를 전달해 주신다. 성찬례 거행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에게 당신의 증인을 보내심으로써 당신의 마음을 널리 알리고자 하신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감사의 증인들이며, 그분의 아낌없는 은총과 그러한 헌신에서 비롯되는 봉헌을 통하여 인식할 수 있는 사랑의 증인들이다.

 

제4장  당신 말씀에 따라
실제로 현존하시는 예수님


성체성사가 다른 성사들과 구별되는 점은 성찬례 안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당신 몸과 피로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축성의 말이 지니는 효과는 단순히 어떤 특별한 은총을 전해 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은총의 기원이 되시는 분을 현존하게 한다는 데에 있다.


성체와 성혈의 실재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주어지는 몸과 피인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의 실재를 통하여, 성찬례는 모든 감각적 증거를 뛰어넘는 신비로 드러난다. 성찬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빵과 포도주뿐이므로,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의 현존 명제는 충실한 신앙을 통해서만 받아들일 수 있다. 성찬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필요성을 부과한다. 그러나 그러한 필요성은 필연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며 믿음의 근거를 더욱 명확히 가르쳐 주도록 요구한다. 이것은 특히 실재적 현존으로 정의 내려진 것의 의미와 토대를 명확히 밝히는 문제이다. 이러한 의미와 토대는 교회 교리의 발전에서 꾸준히 성찰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러한 성찰에서 우리는 그 출발점인 예수님의 말씀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말씀들을 우리에게 전달해 준 복음과 바오로의 증언들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문제는, 그 말씀의 의미를 더욱 깊이 연구하여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구세주의 성체와 성혈의 실재를 입증하는 것이다.

실재의 확언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아람어로 “이것은 내 몸.”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곧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이다.
아람어에서 동사 ‘이다’는 생략되어 있지만, 그 어조는 전혀 힘을 잃지 않는다. 실재적 현존의 진리는 동사 ‘이다’의 사용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언어들에서 쓰이는 “보라, 내 몸을.”이라는 표현에도 ‘이다’라는 동사가 생략되어 있지만 성체의 실재적 현존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람어 표현의 의미를 충실하게 나타내고자 했던 그리스어 번역은 동사 ‘이다’를 넣어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적고 있다. 복음의 이야기들은 이 번역을 따르고 있으며, 이 표현이 그리스어를 쓰는 그리스도인들의 전례 용어에 포함되었다. 아람어의 그리스어 번역은 그리스도의 성체의 실재적 현존에 대하여 전혀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포도주 축성에 쓰이는 말도 성혈의 실재를 단언하고 있다. 이러한 단언은 마르코 복음(14,24)과 마태오 복음(26,28)에서 뚜렷하다. “이것은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바오로의 본문이나(1고린 11,25: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루가의 본문(22,20)에서도 이것은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루가의 본문에서는 동사 ‘이다’가 빠져 있다. 그리스도의 성혈의 현존은 잔의 내용물로 암시되고 있으며, 이로써 이 잔은 희생 제사의 계약에 대한 징표가 된다.

‘내 살’

복음 이야기들의 지적에 따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살’이 아니라 ‘몸’이라는 표현을 쓰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실제로 복음은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어 번역이며, 문제는 예수님께서 아람어로 어떤 단어를 쓰셨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살’이라는 표현을 쓰셨다는 지적은 여러 곳에 있다. 사실 셈어에서는 ‘살’이 ‘피’와 대구를 이루는 표현이다. 성서에서도 ‘살과 피’라는 표현은 언제나 짝을 이루고 있는 반면, ‘몸과 피’는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께 반대되는 개념으로 인간을 지칭할 때 “살과 피”(마태 16,17 - 새 번역 참조)라는 표현을 쓰고 계신다.
요한 복음은 성찬례와 관련하여 ‘살’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요한 복음은 살과 피를 확고하게 결합시켜 주는 기본 선언을 전해 준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요한 6,53).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적 기원과 사명을 표현하고자 하실 때에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지칭하곤 하셨다는 것을 고려할 때, ‘사람의 아들의 살’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더 확실하게 상기시키는 특별한 셈어식 어조를 지니고 있다. 사람의 아들의 살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의 몸과 같은 음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전달하고자 하셨다. 그분의 살은 사람의 아들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몫 덕분에 음식으로 주어질 수 있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는 성찬례에 관한 선포의 의미를 설명하시면서 당신의 살은, 승천을 통하여 천상 영광을 다시 누리게 될 사람의 아들의 살이라고 말씀하신다(요한 6,62 참조).
사람의 아들의 살은 바로 예수님의 살이며, 따라서 당신 생명을 주시는 능력에 대한 단언 자체가 ‘내 살’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요한 6,54).
이러한 선언은 성찬례 제정 이야기와 매우 유사하다. “내 살을 먹고”와 “내 피를 마시는”이라는 말은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와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내 피다.”에 해당한다. 차이점은 ‘몸’(그리스어로 so-ma)이 아니라 ‘살’(sarx)이 쓰였다는 점이다. 요한은 최후의 만찬 이야기에서는 포함시키지 않은 성체성사 제정을 여기서 자세히 이야기하면서 예수님께서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살(이다).”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내 피(다).”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한다.
“내 살”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먹고 마시라고 초대하시는 이유를 설명할 때에 강조된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요한 6,55). 이 말은 예수님께서 빵이나 포도주라고 하지 않으신 까닭을 더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자양분의 온전한 실재는 그분의 살 안에서, 음료의 온전한 실재는 그분의 피 안에서 발견된다.
축성문의 “살”이라는 표현도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 새 번역)라는 선언에서 함축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빵”이라고 말하지만, 이 말은 분명 일반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며, 성찬 거행에서 표징으로 사용되는 물질적인 빵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요한 6,51), 곧 예수님 자신이다. ‘빵’은 ‘자양분’과 동의어로 쓰인다.
“나의 살이다.”라는 단언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당신 자신을 그렇게 표현하셨다는 가설을 확인해 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교리를 가장 완전한 형태로 드러낸다. “세상의 생명을 위한 …… 내 살”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내어 주거나 바치는 살을 가리키며, 또한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 수많은 사람을 위하여 희생되는 살을 가리킨다. 이러한 목적의 암시는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살은 세상을 위하여 바쳐진 희생 제사 덕분에 양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살’이라는 말에 담긴 풍부한 의미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쓰신 아람어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사실, 본질적으로 이 말은 예수님 몸의 실재에 대한 단언이며, 그것을 자양분으로 삼으라는 초대이다. 그러나 살이 셈족 정서에서 의미하는 바를 강조하는 것은 흥미롭다. 예수님께서 “내 살”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성찬 식사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을 특별히 강조한다.
적절하게도, 그리스도교 신심은 잘 알려진 성가 가사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참몸’을 표현하고 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 동정 성모에게서 나신 주
모진 수난 죽으심도 인류를 위함일세.
상처 입어 뚫린 가슴 물과 피를 흘리셨네.
우리들이 죽을 때에 주님의 수난하심 생각하게 하옵소서.
오 감미로운 예수, 오 사랑의 예수, 오 성모의 아들 예수여.

최후의 만찬에서 내어 주고 십자가 위에서 제물로 바쳐진 살은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니께 받은 바로 그 살이었다. “내 살”이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복되신 동정녀께서 성령의 놀라운 개입에 힘입어 예수님을 낳으실 때 주신 인성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이 살은 동정으로 잉태된 살이며, 따라서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성찬례를 통하여 주어진다.
우리는 또한 그 살이 지니는 개별적 특성을 헤아린다. 이 살은 참으로 순결한, 유일무이한 기원의 살이며, 모든 인간의 살을 원상태로 회복시키고자 하늘에서 내려온 살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이야기하시면서 당신도 모든 인류와 동일한 인간 조건을 지니고 계심을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동정 출산이 보여 주듯, 그리스도 안에서 살은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새로운 살의 세상을 시작하고자 독특한 방식으로 형성된 살이다.

위격적 현존

‘살’이라는 말은 순전히 몸이라는 말에만 국한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흔히, 몸에 속하는 것들과 영혼에 속하는 것들의 구분 없이, 살아 있는 존재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연약성을 함축하고 있지만, 온전한 인간을 가리키는 말로 쓰일 수 있다.
살에는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열망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진다. 시편에서는 살의 열망과 영혼의 열망을 동일시한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시편 62,2[63,1]). 살은 하느님의 거처 안에서 기쁨에 겨워 외친다. “그 안이 그리워, 내 영혼 애태우다 지치나이다. 이 마음 이 살이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뛰노나이다”(시편 83[84],2). 성서에서 ‘모든 살’이라는 표현은 때때로 인류 전체를 상징하였다. “정녕 모든 살덩어리가 세상에서 타락한 길을 걷고 있었다”(창세 6,12 - 새 번역). 지상의 모든 사람이 타락을 비난받고 있다.
“이것은 내 살(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자양분으로 내어 주심으로써 당신 자신이 선물이 되게 하는, 당신의 위격 전체를 말씀하려 하신 것 같다. 이 빵은 육체적 실재에 관련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실재를 선물하면서 이 선물은 더욱 완전하고 더욱 숭고한 것, 곧 하느님 아드님의 위격으로 현현된다.
성찬례를 선포하는 말에서도 이와 동등한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요한 6,54)과 “나를 먹는 사람도 ……”(요한 6,57)가 그것이다. 그분의 몸을 내어 주시는 것은 그분 자신을 내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은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살’은 영혼과 위격이 분리된 단순한 육체적 실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자신이 음식이 되시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전체를 내어 주시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께서 “나를 먹는 사람은”이라고 주저 없이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의 자양분이 되시어 그들에게 당신의 생명을 전해 주고자 하실 만큼, 그분의 자기 낮춤과 섬김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주려 하신 음식의 본질을 설명하실 때, 이러한 위격적 현존을 힘주어 단언하신다. 이후로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게 되리라고 단언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생명을 주는 양식으로 제시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요한 6,33) ‘하느님의 빵’이라 일컬으신다. 그분의 말씀은,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요한 6,27)을 주는 것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양식을 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주는 것과 일치한다. 이 선물은 성부께서 주신 빵이며, 성자 자신이고, 성부께서 인간에서 주시는 본질적인 선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시며, 성찬례를 통하여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48)라는 선언은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빵을 주실 뿐만 아니라 이 빵이 바로 당신 자신이라는 진리를 강조하시기 때문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백성들에게 주었던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상기시키는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만나가 예표한 것을 당신 자신 안에서 실현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하신다. 만나는 단지 하나의 예표에 지나지 않았으며,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듯 실제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도 아니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가 너희를 먹인 사람은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진정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다”(요한 6,32). 하늘에서 내려온 빵의 온전한 실재는 예수님 안에서 발견된다. 예수님께서는 만나의 예표로 선포된 것을 당신 자신 안에서 완성하신다.
성찬의 자양분과 예수님 자신을 동일시하는 데에 대한 강조는, “나는……이다.”라는 표현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름이 하느님의 이름이며 당신의 존재가 절대적 존재임을 이해시키실 때 쓰시는 특징적인 표현이라는 점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예수님께서는 이 존재의 근본적인 특성은 생명의 빵, 곧 하느님의 생명을 보장하는 자양분이라고 정의하신다.
요한 복음에서 빵을 양식으로 강조한다고 해서 예수님의 살을 내어 주는 것과 관련된 신적 존재를 더욱 신중하게 고려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성찬례의 근본 요소는 성자께서 직접 관련되어 계시다는 것이다. “나는……이다.”(ego- eimi)라는 선언은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확언보다 앞서 나오며, 그 모든 가치를 규명해 준다.
음식으로 주어지는 것은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살이지만, 당신의 살을 내어 주심으로써 그리스도 자신을 내어 준다는 것이 드러난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예수님의 몸의 현존 안에서 예수님의 위격적 현존을 깨닫도록 요구받는다. 예수님께서는 셈어족 연설 방식으로 ‘내 살’이라는 말을 사용하심으로써 당신의 위격 전체를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성부의 아드님이심을 의식하시고, 당신의 살을 당신의 신성한 위격에 속한 예외적인 자산으로 생각하셨다.
“사람의 아들의 살”(요한 6,53)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시어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수행하시면서 당신 자신의 신비를 더욱 의도적으로 언급하셨다. 이 영원한 생명의 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권능을 주신”(요한 6,27) 사람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인정은 예수님의 사명의 진정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성령께서 내려오시는 예수님의 세례 이야기에서 드러나며, 천상 보증의 징표인 그분의 기적들을 통하여 지속적인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보증은 사람의 아들이 영원한 생명을 주관하시며, 성찬례를 통하여 이를 전달해 주실 힘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위격적 현존은, 음식으로 주어지는 살의 실재를 단언하는 일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 살 안에 현존하시고, 자양분을 주는 힘을 그 살에 부여하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성찬례와 삼위일체

성부의 역할과 현존

요한 성인이 전하는 예수님 말씀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위격적 현존의 확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성자께서는 성부께서 (성자를) 보내셨기 때문에 성체 안에 현존하신다. 성찬 선물의 결정적인 시작은 성부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구원 활동의 전체적인 시작이 성부께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원 강생의 기원이시며 또한 교회 발전을 통하여 강생이 지속되도록 하시는 분은 성부이시다. 그러나 성찬 식사의 시작은 이보다 훨씬 더 특별한 방식으로 성부에게서 유래한다. 당신 자녀들을 먹이는 일은 성부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도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간청이 담겨 있다.
당신 아드님을 보내 주심으로써 인류에게 음식을 주시는 분은 바로 아버지시다. 성자를 보내 주실 수 있는 분은 성부뿐이며, 이 선물로 성부께서는 인간 생명의 영적 요구에 응답하여 줄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음식을 주셨다. 성찬 식사를 통하여 당신 살을 모든 사람이 받아 모실 수 있게 하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너그러운 행동을 잊지 않으셨다. 당신 사명을 수행하는 내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일을 하고 계심을 인식하고 계셨으며,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요한 14,10)라고 말하실 수 있을 만큼 아버지와 긴밀히 결합되어 계셨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성찬례 안에는 그리스도의 위격적 현존뿐 아니라, 이와 유사한 아버지의 현존도 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 우리는 성자와 성부 사이에 가장 완전한 일치가 존재함을 인정하여야 한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 곧 하나이며 단일한 존재라는 뜻이다. 성부와 성자는 둘로 나뉠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언제나 성찬례의 궁극적인 기원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성찬례를 통하여 표현되는 위격적 현존은 성자 자신의 특별한 현존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것은 내 살(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께서 자양분으로 주시는 몸 안에 위격적으로 현존하고 계심을 확언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살의 현존의 근거를 이루는 것은 “나는……이다.”라는 그분의 위격, 곧 그분의 신격이다. “내 살”이라는 말은 성부의 위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성부께서는 강생하거나 육체적 실재를 취하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신격을 특징짓는 완벽한 일치 안에도, 성부의 활동을 독특한 것으로 만드는 위격들 사이의 차이가 존재한다. 강생은 하느님의 세 위격의 활동이었지만, 성자의 위격만이 사람이 되셨으며, 당신의 특성, 당신의 구체적인 속성으로 살을 취하신 유일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자의 위격에만 유일하게 실재적인 육체적 현존이 주어졌다.
성찬례에서도 강생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세 위격의 개입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러나 성자의 고유한 행위는 당신의 살을 통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 독특성을 띤다. 그러므로 성찬의 식사를 통하여 전해지는 위격적 현존은 강생하신 성자의 현존이다.
성부께서는 성사 안에서 활동하시지만, 인간의 살을 취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같은 자격으로 활동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진정한 빵을 내려 주시는”(요한 6,32) 아버지라고 선언하시며 강조하셨듯이, 성부의 활동은 강조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 때문에 성부께서도 성자께서 현존하시듯 현존하신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 동안, 성자의 위격만이 세상에 오셨다. 성자께서는 당신의 희생 제사로 영광스러운 상태에 도달하셨으며, 이는 그분 몸의 부활과 승천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상태 덕분에 성자께서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인간에게 당신을 내어 주시고 당신 자신의 생명으로 자양분을 주신다. 그러므로 성찬례의 현존은 성자의 위격의 고유한 특성이다.
분명, 성찬의 신비 안에서 삼위일체는 일체성을 전혀 잃지 않는다. 성찬의 현존은 오로지 성자의 현존이라는 사실은 성자와 성부의 완전한 일치, 성찬의 선물을 통하여 발전하고 선포되는 일치를 어떤 식으로도 훼손하지 않는다. 삼위일체는 신비의 모든 측면에서 작용하지만, 독특한 특성을 지닌 현존, 곧 당신 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위격의 현존을 강화한다.

성령의 역할과 현존

성찬의 신비에서 삼위일체의 활동에 관한 앞의 내용은 성령의 특별한 역할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사람의 아들의 살을 받아먹으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대한 군중들의 오해, 곧 마치 그것이 그분의 지상 생활에서 자양분으로 내어 준 살과 관련된 것으로 잘못 이해하여 한 응답은 이미 앞에서 다루었다.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요한 6,63).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는 성찬례의 모든 힘은 성령의 공로임을 강조하신다. 성찬의 식사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살을 주시지만, 그 살은 성령으로 빛나는 영광의 상태에 있다. 성령의 이러한 공로가 없다면, 이 살은 영적 생명, 영원한 생명을 전달할 힘을 잃을 것이다. 방금 요한 복음에서 살펴본 대로, “살 그 자체로는 쓸모가 없다.” 최종 편집된 것은 4세기 말이지만 그 이전의 자료들까지 담고 있는 「사도 법령」(Constitutiones Apostolorum)은 성찬례와 성령의 밀접한 유대 관계를 효과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 책에 기록된 에피클레시스(성령 청원: 축성 기원 - 역자 주)는 다음과 같다.

오, 하느님,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 하느님께 바치는 이 예물을 자비로이 굽어보소서. …… 이 예물에 주 예수님의 고통의 증인이신 당신 성령을 보내시어 이 빵 안에 당신 그리스도의 몸이, 이 잔 안에 당신 그리스도의 피가 드러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를 받아 모시는 이들이 신앙을 굳게 하고 죄를 용서받으며 악과 잘못에서 벗어나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소서.10)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성령의 활동은 그리스도의 위격의 현존과 결합된 성령의 위격의 현존과 관련되지 않는가? 그러한 결합은 성체성사를 구세주의 성사일 뿐만 아니라 성령의 성사로도 보게 하지 않는가? 이 두 현존이 이른바 경쟁하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성체 신심이 양쪽으로 갈라지지는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두 현존 사이의 차이를 지적하여야 한다. 성찬의 현존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현존, 더 정확하게는 인간 육신을 취하신 성자의 현존으로 남아 있다. 성령께서는 강생에 견줄 수 있는 육신과 유대를 맺지 않으신다. 성령께서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 성자를 잉태하시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이 되신 말씀처럼 사람이 되지는 않으신다. 그러므로 성찬례 안에 성령의 현존은 예수님의 현존과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은 내 살(이다).”라고 말씀하시지만 성령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없다.
성령께서는 이 말들을 실현시키는 일에 개입하신다. 성령으로, 예수님께서는 성찬 거행 안에 당신의 몸과 피가 현존하게 하신다. 예수님의 살에 하느님의 생명과 하느님의 힘을 불어 넣고, 탁월한 방식으로 성찬례를 효과적으로 만드는 데에 이바지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러나 이 살은 순전히 성령께서 활기를 불어넣어 주신다 해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살이다. 성령께서 하느님 현존의 실재와 가치를 보장해 주시지만, 그럼에도 이 현존은 성자의 현존이다.
“나는……이다.”와 “이것은 내 살(이다).”라는 예수님의 두 선언의 관계는 예수님께서 성체 안에 현존하신다는 구체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나는……이다.”라는 단언은 인간 생명과 별도로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단언은 그분 신격의 본성, 성부와 성령 안에서도 입증되는 본성, 단일한 신적 본질과 존재인 하느님의 본성에 대한 단언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나는……이다.”라는 말은, “이것은 내 살(이다).”라는 단언에 대한 간접적 암시와 더불어, 예수님의 본성만을 표현한다. 구원 활동에서 성자를 다른 두 위격과 구별해 주는 것은 예수님께서 몸소 살을 취하신 것이다.
특히 살은 성자와 성령을 구별해 준다. 살과 영의 대립에 대하여 바오로 성인은 거기에 죄의 세력과 성령의 힘이 대결하고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갈라 4,21-31; 로마 7,17-18; 8,9-10 참조). 살에 대한 이러한 경멸적 개념은 예수님의 성찬 축성문에서 극복된다. “이것은 내 살(이다).” 하고 말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살과 영의 화해를 어느 정도 보증하고 계시며, 또한 당신의 위격적 현존, 곧 당신의 육체적 조건과 관련된 현존을 표현하셨다. 이러한 살의 특징은 성찬례의 독창성을 보장한다. 이 현존은 영과 반대되는 조건에 있지만, 성령께 열려 있으며 성령으로 충만하다.
이 두 현존은 경쟁 관계에 있지 않다. 또한 서로를 손상하지 않는다. 성찬례를 통한 현존은 강생하신 성자의 현존이라는 고유한 특징을 지니는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이 현존은 그 독특한 특징을 언제나 유지하지만, 살이 온전한 영적 효력을 누리는 데에 필요한 성령의 현존으로 풍요로워진다.

 

제5장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
예수님의 실재적 현존


성찬례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재적 현존은, 복음서와 바오로 성인이 증언하였듯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분명히 선포되었고, 교회 전승에서 신앙의 진리로 인정해 온 것이다. 이에 관한 주장과 해석은 교부들의 가르침에서 풍부히 드러난다. 교부 시대부터 이 교리는 어떤 논쟁의 결과로서 발전되다가 결정적으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공론화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

실재적 현존

트리엔트 공의회는 실재적 현존을 신앙의 진리로 규정한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실재적 현존에 관한 교리를 다루는 장(章)에서 그때까지는 이에 관한 공의회의 명료하고 정확한 가르침이 없었다고 강조한다. “먼저 거룩한 공의회는,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감각적인 사물의 형상 아래 참으로, 실재적으로, 실체적으로 현존하신다고 명백히 공언하는 바이다”(『신앙 규정 편람』[DS] 1636).
“참으로, 실재적으로, 실체적으로”라는 세 부사는 서로 다른 뜻을 나타내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 현존의 실재를 단언하려고 사용되었다. 이 표현은 다음 조항에서 다시 등장한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영혼과 천주성과 결합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따라서 완전한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실재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현존하신다”(제1조, DS 1651).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천상 현존을 주장하며 이를 반대하는 의견에 다음과 같이 대응한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본래의 존재 양식에 따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오른편에 영원히 앉아 계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다른 여러 장소에서 당신의 실체 안에 성사적으로 현존하신다는 사실에는 어떠한 모순도 있을 수 없다. 그분의 이러한 존재 양식은 우리의 말로는 적절히 표현할 수 없지만 우리의 지성이 신앙의 빛으로 파악할 수 있고, 또한 하느님께는 가능한 일이라고 우리가 확고히 믿어야 하는 것이다”(DS 1636). 공의회는 이러한 양립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를 제시한다.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바로 구세주께서 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권능을 지니셨기 때문이다.
공의회는 그 현존 방식의 신비적 특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의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신앙의 빛을 받은 우리의 지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존재 양식이다. 이것은 성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이 언제나 신비로 남아 있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신앙의 빛으로 이를 천명하고, 그 의미를 설명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진리는 우리의 능력을 초월하므로, 어떠한 모순도 담고 있지 않다고 단언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 진리는 이성을 초월하지만 이성에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공의회는 이성적으로 자명한 모든 것에 의존하여 이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 진리가 참되고 거룩한 성체성사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거룩하고 권위 있는 교리를 전해 주기 때문에 이를 가르친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또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든 진리를 교회에 드러내시는 성령을 통하여(요한 14,26 참조) 가르쳐 주신 이 교리를 가톨릭 교회는 언제나 보전해 왔고 세상 끝 날까지 보전할 것이다”(DS 1635).
따라서 실재적 현존을 결정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교회의 전승이다.

그리스도의 온전한 현존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재적 현존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고 선포한다. 그리스도의 위격 전체가 온전히 현존한다. 교회의 믿음에 따르면, “축성되는 그 순간부터 우리 주님의 진짜 몸과 진짜 피가 그분의 영혼과 신성과 결합되어 현존하게 된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주님의 영혼과 신성은 그분의 몸과 피와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현존의 이유에 대하여 말하며 공의회는 다음과 같은 구별을 하였다.

“말씀의 힘으로, 그 몸은 빵의 형상 아래, 그 피는 포도주의 형상 아래 있지만, 그 몸은 포도주의 형상 아래에도, 그 피는 빵의 형상 아래에도 있는 것이며, 그 영혼은 빵과 포도주 양쪽의 형상 아래 있는 것이다. 이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 다시는 죽는 일이 없으실’(로마 6,9) 우리 주 그리스도의 각 지체가 서로 연결되어 이루는 자연스런 결합과 동화 덕분이다. 또한 그 신성은 육신과 영혼의 놀라운 위격적 결합 때문에 거기에 현존하는 것이다”(DS 1640).

공의회는 각 형상 아래 계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현존에 대한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한 형상 아래에, 또 다른 형상 아래에, 그리고 양쪽 모두의 형상 아래 계시다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실제로 완전하고 온전한 그리스도께서는 빵의 형상 아래 그리고 빵의 모든 조각들 아래에 존재하신다. 마찬가지로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포도주의 형상과 그 모든 요소 아래에 존재하신다”(DS 1641). 제3조는 그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성체 안에,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각 형상 아래 계시고, 이 형상들이 나뉘어도 나뉜 각 요소 아래에 계신다”(DS 1653).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갈릴 수 없는 단일성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몸이 있는 곳에는 그분의 피도 그분의 영혼과 신성과 더불어 현존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축성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현존과, 그리스도의 위격을 구성하는 바로 그 단일성은 구별하여야 한다. 그 몸과 피는 빵과 포도주에 대한 축성 말씀으로 현존하게 된다. 그러나 몸이 포도주의 형상 아래 현존하는 것은 몸과 피의 결합 때문이지 엄밀히 그러한 축성 말씀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피가 빵의 형상 아래 현존하는 것도 몸과 피의 영원한 결합 덕분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영혼의 현존이다. 이는 부활 때 결정적으로 성취된 단일성, 영혼과 육체의 떼어 놓을 수 없는 일치 덕분이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던 순간에 분리가 있었으나, 성찬의 양식으로 주어지는 그 몸은 부활 때 그분의 영혼과 다시 결합되어 앞으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상태에 있는 몸이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른 무엇보다도 신성의 현존이다. 그리스도의 몸과 영혼은 하느님이신 성자의 위격에 속해 있다. 그리고 이 몸과 영혼의 현존은 오로지 그리스도 위격의 실재적 현존으로서만 의미를 지닌다. 위격적 결합을 통하여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의 위격 또는 인격 안에서 결합되므로, 신성이란 하느님의 본성을 가리킨다.


규정된 진리

트리엔트 공의회는 ‘실체 변화’를 그 실재적 현존에 대한 진리와 확고히 결부된 진리로서 가르친다. 여기서 공의회가 가르친 것은 신앙의 진리이지 단순한 철학적 견해가 아니다. 실제로 교회는, 빵과 포도주의 축성을 통하여 빵과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뀌는 변화가 일어난다고 언제나 믿어 왔다.
공의회가 규정한 진리를 정확히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빵과 포도주의 ‘형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채로 한 실체에서 다른 실체로 변환하는 것이다.
1. 공의회가 사용한 ‘변환’(conversion)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변화’(change)를 뜻하는 것으로서, 그 변화의 성격이나 작용 방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이에 공의회는 아무런 부가 설명도 하지 않고, 단지 “근본적으로 변화의 성립 요건은 바로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치하는 두 사물의 승계에 있다.”11)고 단언하는 데에 그쳤다.
2. 그 변화는 한 실체에서 다른 실체가 되는 것이다. ‘실체’(substance)라는 용어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에 여러 철학 체계에서 사용되었는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기하고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이 받아들인 실체성(substance)과 우유성(accidents)을 구별할 때 사용한 말이다. 공의회 논쟁에서 드러난 의도에서 보이듯이, 분명히 트리엔트 공의회는 실체 변화에 대한 교의를 어떤 특정 철학과 연계하여 표현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공의회는 어떠한 이론을 고집하지 않고 어떠한 체계도 강요하지 않는다”(DS 1348).
‘실체’라는 말에서 우리는 상식적으로 이해되는 것만을 이해하여야 한다. 곧 과학이 미치지 못하고, 관찰로 발견되지 않으며, 감각으로도 인식할 수 없지만, 이성으로는 알 수 있는 참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토대가 모든 사물 안에 현상과 속성의 연결점이자 궁극 원리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한 마디로 그것은 외형과 구별되는 실재이다.(DS 1349).
따라서 우리는 실체를 외형 아래 있는 근본 실재로 이해하여야 한다. 성체성사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빵이라는 실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실재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이다.
3. 그 변화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은 변하지 않은 채 오직 형상만 남게 된다. 그 형상 아래에서 빵과 포도주의 실체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축성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만 현존하기 때문이다.
공의회가 ‘우유성’(accidents)이 아니라 ‘형상’(species)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따르면, ‘우유성’이란 말은 축성한 후에도 빵과 포도주로 남아 있다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 공의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인다는 인상을 주지 않고자 의도적으로 이 용어의 사용을 피하면서, 어떤 철학 체계에서도 빌려 오지 않은 ‘형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형상이라는 말은 감지할 수 있는 외형, 그러나 그 실재가 외형과 같은 외형을 가리키며, 그 실재는 환영이나 착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감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이다. “외형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 우리가 관찰하거나 경험하는 모든 것, 어느 모로든 감각에 속하는 모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 경험으로는 축성 이후에도 모든 것이 마치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는 양 그대로기 때문이다”(DS 1349).
신학자들은 그 형상들을 유지하면서 이루어지는 실체 변화가 의미하는 모든 것을 더욱 명확히 밝히고자 애써 왔다. 그러나 자연계에서는 이와 견줄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한 실체에서 다른 실체로의 변환이 ‘놀랍고 유일무이한’ 것이므로 특별한 감각으로만 이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다고 공의회는 말한다. 그 신비는, 우리가 그 의미를 더 잘 파악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도록 허용하면서도, 여전히 신비인 채로 남아 있다.


실체 변화

‘실체 변화’라는 말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교회는 축성에서 오는 변화를 정확히 표현하고자 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한다. 이 말은 철학 체계에 속한 개념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곧 그 가운데 ‘실체’라는 말이 있다 하여도 어떤 특정 이론과 구체적으로 연관되는 것은 아니다.
훗날, 피스토이아 주교대의원회의는 성찬례에 관한 교리를 발표할 때 이 용어를 삭제하려고 하였다. 그 주교대의원회의는 미사에서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계신 그리스도의 실재적 현존을 단언하고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없어진다는 것을 인정하였으나, 실체 변화에 대하여 말하거나 빵이 몸으로 바뀌고 포도주가 피로 바뀌는 실체적 변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회피하였다. 1794년 교황 비오 6세는 그 의도적인 부작위에 대하여 명백히 단죄하였다. 이는 다시 한 번 그 용어뿐만 아니라 실체 변화의 교리 자체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DS 2629).
교리가 발전하면서, ‘실체 변화’라는 말이 빵과 포도주의 축성 때에 일어나는 현상에 관한 교회의 믿음을 표현하는 데에 가장 적절한 용어로 받아들여졌다. 12세기에 생겨난 때부터 이 말은 그 교리의 근본 핵심을 이해시키는 가장 적합한 말로서 빠르게 전파되었다.
이 용어는 빵의 근본 실재(또는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의 근본 실재로 바뀌는 변화의 깊이를 가리키는 말로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이는 이 용어가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거나 너무 어렵다고 여겼다. 그러나 한 실재가 다른 실재가 되는 변화는 충분히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그러한 주장은 성찬의 신비에 싸인 채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에도 교회의 이 교리를 설명하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한 용어는 없다.


근거와 발전

성서에서

궁극적으로, 실체 변화에 대한 교리는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 근거로 삼는다. 실제로 이 말씀은 몸의 현존과 피의 현존을 간단하게 단언하고 있으며, 이는 빵이 몸에게, 포도주가 피에게 자리를 내어 준 것을 전제로 한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 빵이 내 몸이다.” 또는 “이 포도주가 내 피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는” 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이 들고 계신 것을 미리 규정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말씀이 유일하게 규정하는 것은 몸과 피뿐이다.
우리는 처음에는 빵과 포도주였던 것이 그분 말씀의 힘으로 몸과 피가 되었지만 빵과 포도주로 인식할 수 있는 외형은 간직한다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축성 말씀으로 실체 변화가 명백히 선언된다. 곧 빵과 포도주의 실재가 몸과 피의 실재로 변화하는 것이다.

전승에서

교회 교부들은 빵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바뀌는 변화, 다시 말해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뀌거나 변모된다고 주장한다. 빵과 포도주는 더 이상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대신에 몸과 피가 된다. “맛과 모양은 빵이지만 이제 더 이상 빵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다. 또한 맛은 포도주이지만 이제 더 이상 포도주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피다.”12) “성사적 말씀 이전에 이 빵은 그냥 빵이지만, 일단 축성되면 그 빵은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13) 이 변화를 설명하려고, 교부들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비유를 상기시킨다.
‘실체적 변환’이라는 표현은 로마 공의회(1079년)에서 등장하여 베렝가리우스 논쟁을 종결시켰다.
‘실체 변화’라는 용어는 롤란도 반디넬리(훗날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 용어는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년)는 ‘실체 변화를 하다’(transubstantiate)라는 동사를 사용하였다.

 

제6장  성찬의 희생 제사


참된 희생 제사

“미사에서는 참되고 진정한 희생 제사를 하느님께 봉헌한다. 이 봉헌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의 음식으로 내어 주신 사실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14) “미사의 희생 제사는 찬미와 감사의 제사만도 아니고 십자가 위에서 성취된 희생 제사에 대한 단순한 기념제도 아니다. 바로 속죄의 제사인 것이다.”15) 이러한 말로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찬례 거행이 지닌 희생 제사의 가치에 대하여 증언한다.

참되고 유일한 희생 제사

바오로 사도가 증언하듯이, 구약에서는 레위인들의 희생 제사가 아무 효력이 없었기 때문에 완전한 희생 제사란 없었으므로, 인자하신 아버지(2고린 1,3 참조) 하느님께서는 당신 원의로 “거룩하게 만드신 사람들을 영원히 완전하게”(히브 10,14) 하시고자, “멜기세덱의 계통인”(창세 14,18; 시편 109〔110〕, 4; 히브 7,11 참조) 또 다른 사제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야 했다. 그리하여, 우리 하느님이시며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를 위하여 단 한 번 당신을 바치시어’(히브 7,27 참조) 십자가의 제단 위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사람들을 위하여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다.
십자가의 가치에 대한 이러한 호소는 그러한 가치를 부인하지 않는 종교 개혁가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우리는 성찬례에 관한 더욱 직접적인 시각을 갖게 된다. “그분의 죽음으로 그 사제직이 끝나서는 안 되었으므로(히브 7,24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 최후 만찬에서, 사랑하는 당신 신부인 교회에 인간 본성이 요구하는 대로 눈에 보이는 희생 제사를 남겨 주고자 하셨다. 그 희생 제사에서는 십자가 위에서 단 한 번 영원히 이루어질 피의 제사가 펼쳐질 것이며, 그 기억은 세상 끝 날까지 영원히 계속될 것이고(1고린 11,23-24 참조), 그 구원 능력이 우리가 날마다 저지르는 죄의 용서에 적용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의 희생 제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자신뿐만 아니라 바로 교회가 세상 끝 날까지 희생 제사를 재현하는 것이다.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행위를 강조함으로써 이 희생 제사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분께서는 ‘멜기세덱의 품위를 따라 영원한 사제’(시편 109〔110〕, 4)로 뽑히셨다고 선언하시며,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하느님 아버지께 당신의 몸과 피를 바치셨다. 또 같은 형상 아래 당신의 몸과 피를 제자들에게 음식으로 내어 주시며, 그 순간 그들을 신약의 사제로 세우셨다. 그분께서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루가 22,19) 하고 말씀하시며 사도들과 그들의 후계자인 사제들에게 당신의 몸과 피를 바치도록 명령하신 대로, 교회는 언제나 이를 깨닫고 가르쳐 왔다”(DS 1739-1740).

성서의 근거들

복음의 증언. 예수님께서는 성찬례에서 바치신 희생 제사에 대하여 어떠한 교리적 선언도 하지 않으셨지만, 성찬례 제정의 말씀은 이것이 참된 속죄의 희생 제사와 관련된 것임을 충분히 입증해 준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가 22,19) 하신 말씀은, 그 몸이 참석한 이들에게 양식으로서 주어지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곧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것임을 드러낸다.
포도주 축성을 위해 선포되는 말씀은 희생 제사에 대하여 좀 더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르 14,24; 마태 26,28). 모세와 맺은 계약을 강조하고자 출애굽기 24장 8절에 쓰인 용어를 사용하였다는 단순한 사실은 희생 제사에 대한 암시에서 중요하다. 이제 우리에게는 옛 예표를 실현하고, 수많은 사람, 곧 온 인류를 위한 유일한 참계약을 확인하는 진정한 희생 제사가 있다.
‘내어 준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희생 제사를 가리키며 사용하신 동사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르 10,45; 마태 20,28). 요한이 기록한 다음과 같은 약속은 희생 제사의 의도를 확인시켜 준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 새 번역). ‘살’이라는 용어는 특히 희생 제사를 가리키려는 의도로 사용된다. 이 희생 제사는 식사 참여의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 중요성을 지닌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 이라는 말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의 포도주 축성문(마태 26,28 참조)은 희생 제사의 속죄의 성격을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 첨부되어 있다. 곧, “죄를 용서해 주려고 …… 흘리는” 피라는 표현이 첨가되어 있다. 이 표현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계약의 피에 대한 언급에서 이미 암시되었던 것을 강조하는 것뿐이다.

바오로 성인의 증언. 빵의 축성 말씀을 기록하며, 바오로는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1고린 11,24)이라는 표현으로 희생 제사의 의미를 나타낸다.
바오로가 작성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선포하는 구절이 성찬 때마다 바쳐진다.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1고린 11,26). 이 선포는 “이는 나를 기억하여 …… 행하여라.”(1고린 11,24.25)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완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선포는 최후 만찬에서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구원의 희생 제사를 되풀이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것은 더 이상 피 흘림의 제사가 아니라 순전히 예식적 또는 성사적인 특성을 지니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증언. 신약성서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체계적으로 진술해 놓은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교 사제직의 탁월성을 보여 주는 언급을 하고 있다. “유다교의 천막 성소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제들은 우리 제단의 제물을 먹을 권리가 없습니다”(히브 13,10). 저자는 유다교 사제들의 성찬례 접근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려 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먹다’라는 말은 제단에서 이루어지는 성찬을 가리키는 듯하다. 제단은 희생 제사와 연관된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로 차려지므로, 제사적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희생 제사는 단순히 십자가의 희생 제사일 수도 있다. 암시가 너무 모호하여 정확한 해석을 내릴 수 없다.

전승의 토대

성서 이후에 쓰인 초기 그리스도교 저서들에서 성찬례는 식사뿐만 아니라 희생 제사로 비쳐졌다.
예를 들어, 『열두 사도의 가르침』은 문자 그대로 성찬례 거행을 희생 제사라고 말한다. 유스티노 성인은 자주 그 같은 언급을 하였다.
이레네오 성인, 오리게네스, 치프리아노 성인의 잇따른 전승은 이 가르침을 보전하고 있다. 특히 오리게네스는 성찬의 희생 제사의 속죄의 성격을 강조한다.
여기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많은 증언들 가운데에서 바오로 6세의 회칙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의 일부분을 인용하고자 한다. “맨 먼저 상기해야 할 사항은 말하자면 이 교리의 개요이고 정점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성체 신비로 해골산 위에서 한 번 성취된 십자가의 희생 제사가 놀랍게 재현되고 부단히 기념되며 또 그 구원 능력이 매일 우리가 범하는 죄의 용서를 실재로 초래한다는 내용입니다.”16)


성사의 희생 제사

성찬의 희생 제사에 대한 언급은 불가피하게 어떤 문제를 제기한다. 십자가의 희생 제사에 견주어 성찬의 희생 제사를 어떻게 규정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희생 제사의 목적이 해골산의 희생 제사를 재현하고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이 희생 제사가 해골산의 희생 제사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가? 어떻게 이것이 그 희생 제사와 구별되는가?

같은 점과 다른 점

트리엔트 공의회가 원칙적인 답변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속죄의 제사인 성찬례에 대하여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물은 하나이며 동일하다. 곧 십자가 위에서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던 분이 지금 사제의 직무를 통해서 봉헌하시는 바로 그분이시다. 단지 봉헌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DS 1743).
희생 제사의 제물은 동일하다. 성찬례에서 바치는 봉헌 제물은 바로 그리스도이다. 성찬의 희생 제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직접 봉헌되시는 것이다. 우리 구원을 위하여 값을 치르신 분은 언제나 그리고 오로지 그분뿐이시다. 따라서 성찬례 거행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현존하게 된다. 인류 구원과 이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은총을 위하여 아버지께 봉헌 제물로서 바쳐지는 것은 다름 아닌 구세주의 위격을 지닌 그분의 몸과 피이고, 이는 성찬례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주어진다.
마찬가지로, 봉헌 제물을 바치시는 분도 동일하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것이다. 최후 만찬에서 그분께서 직접 빵과 포도주 위에 축성의 말씀을 하심으로써 이러한 봉헌 제물을 바치신 것이다. 더 이상 지상에 계시지 않는 그리스도께서 이후의 성찬례 거행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봉헌 행위를 수행하실 수는 없으시지만, 사제들의 직무를 통하여 활동하신다. 곧 이처럼 보이는 매개를 통하여 그분께서는 보이지 않게 봉헌 행위를 되풀이하시는 것이다. 이는 당신께서 행하시는 것을 되풀이하라는 그분의 명령, 곧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하는 명령에 부응하는 것이다.
일부 신학자들은, 트리엔트 공의회가 모든 미사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바치시는 실제적인 봉헌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했다고 생각해야 하는지, 아니면 단순한 가상의 봉헌, 곧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신 능력에 힘입어 교회가 바치는 봉헌 행위만을 규정한 것인지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그 공의회가 사용한 용어들을 보면, 실질적으로 사제들의 직무 덕분에 수행되는 행위일지라도 그 행위는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시는 봉헌 행위라고 정의를 내리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주신 능력에 힘입어 교회가 수행하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십자가 위에서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던 바로 그분께서 지금 사제들의 직무를 통하여 봉헌 예물을 바치시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공의회는 봉헌의 주체가 같다고 주장하고, 따라서 미사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시는 봉헌 행위로 정의하는 것이다. 성찬의 희생 제사에 대한 그리스도의 관여는 십자가의 희생 제사에 대한 그분의 관여에 뒤지지 않는다. 희생 제물이 동일한 것처럼, 봉헌 예물을 바치시는 분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두 제사의 유일한 차이는 ‘봉헌 방식’일 따름이다. 십자가의 희생 제사는 피 흘림의 제사였지만, 성찬의 제사는 예식 순서를 따르고 피 흘림이 없는 제사이다. 또한, 성찬의 희생 제사는 성사적 표징인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봉헌하는 특별한 요소를 지닌다. 따라서 우리는 성찬의 제사를 성사적인 희생 제사로 정의 내릴 수 있고, 이 점에서 십자가의 희생 제사와 구별된다. 교회의 예배는 성사적 희생 제사를 증가시키는 반면, 십자가의 희생 제사는 유일한 것이다. 해골산 위에서 세상을 구원한 그 희생 제사는 단 한 번에 성취되었다. 그 희생 제사는, 역사의 특정한 시기에 구체적인 환경 안에서 이루어진,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그 유일한 특성을 영원히 보존하게 될 것이다.
이에 비하여, 역사상 유일하고 예외적인 이 희생 제사와 관련하여 거행하는 성사적 희생 제사는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되풀이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십자가의 희생 제사와는 매우 다르면서도, 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전적으로 이에 의지한다. 제물이 같고, 이를 바치는 분이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사적 희생 제사는 예식을 통하여 세상 안에서 구속의 희생 제사를 재현한다.

구속의 희생 제사의 재현

성찬의 희생 제사와 십자가의 희생 제사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재현’(再現)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가시적인 희생 제사”를 남겨 주려 하셨다고 주장한다. ‘가시적인 희생 제사’ 안에서 십자가 위에서 단 한 번 모든 이를 위하여 성취된 그 피의 희생 제사가 재현되고 세상 끝 날까지 영원히 기념된다”(DS 1740). 마찬가지로 회칙 「신앙의 신비」에서도 “성체 신비로 십자가의 희생 제사가 놀랍게 재현된다.”17)고 말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트리엔트 공의회 모두 성찬례에서 “그분 죽음의 승리와 개선이 재현된다.”18) 고 주장한다.
그러나 ‘재현하다’라는 동사는 더욱 강력한 의미를 지닌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곧 여기에서 ‘재현하다’는 말은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다시 한 번 현존하게 한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단순히 과거 사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거나 기념하는 데에 그치는 ‘재현’의 문제가 아니다. 그 재현은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성사적으로 되살리는 것이다. 곧 그 희생 제사를 현존하게 함으로써 그 열매를 교회가 누리게 하는 것이다.
봉헌 행위와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피 흘림 없는 방식으로 당신의 희생 제사를 새롭게 하신다. 여기에는 사형 집행인도 없고 자연사도 없다. 구속의 희생 제사에는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치는 봉헌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본질은 내적이면서 영적인 본성을 지닌다.
이러한 행위는, 희생 제사를 이미 완수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구세주로서 천상 신분에서 그리스도께서 완수하시는 것이다. 그 행위가 새로운 가치를 얻을 수는 없지만 더욱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는 있다. 따라서 성찬례에서 바치는 새로운 봉헌은 십자가의 희생 제사에서 그 모든 가치를 이끌어 내고 그 공로를 이용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희생 제사의 봉헌을 사제의 직무를 통하여 성사적으로 새롭게 하신다. 이 구원 행위를 재현하는 이유는 그것의 성사적 성격에 있다. 십자가의 희생 제사는 그 자체로서 완벽하여 인류의 구원과 영성 생활에 필요한 모든 은총을 받기에 충분했지만, 그것의 성사적 재현으로 그 효과가 더욱 광범위하게 미치게 된다.

축성을 통하여 의미를 지니게 되고 실현되는 희생 제사

희생 제사의 본질은 미사 때 하는 축성에서 발견된다. 실제로 빵과 포도주 위에 선포되는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맡기신 그 기념제를 이룬다. 따라서 성찬의 희생 제사의 봉헌은 축성을 통하여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봉헌을 하나의 예식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 자체로 볼 때, 빵과 포도주의 봉헌은 희생 제사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를 준비하고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라는 말씀을 희생 제사의 유효하고 실제적인 표징으로 간주하여야 한다. 그러한 효과적인 표징을 통해서 희생 제사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실현하는 것이다.
효과적인 표징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은총의 효과적 표징으로 정의되는 성사의 개념과 연결된다. 축성 말씀의 효과적인 표징의 경우에, 그 표징은 정확히 은총의 표징이 아니라 은총의 원천이신 분의 위격적 봉헌의 표징인 것이다. 따라서 성사의 개념은 지극히 탁월한 방식으로 입증된다고 말할 수 있다. 성사의 희생 제사는 지극히 탁월한 성사로서 그리스도의 봉헌과 현존에 대한 표징이다.
축성 말씀은 빵과 포도주로 나누어서 하기 때문에 흔히 희생 제사의 표징으로 해석되어 왔다. 곧 빵과 포도주로 나누어 이중으로 축성함으로써 그 형상들이 몸과 피로 나누어진 표징이 되고, 따라서 죽음의 표징, 희생 제사의 표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우리는 희생 제사의 표징이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가 22,19)라는 말씀에서 비롯한다는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포도주 축성과 분리되어 있는 이 말씀은 희생 제물로 내어 준 그 몸을 말한다. 또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내 살”이라는 말은 희생 제물의 살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르 14,24; 마태 26,28)라는 포도주 축성의 말씀은 따로 떼어 놓고 보더라도 희생 제사에 대하여 명백히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축성 말씀은 희생 제사의 표징을 이루는 형상들을 단순히 나누는 것이 아니라, 몸과 피의 현존을 단언하는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축성 예식으로서, 예식의 모든 부분과 모든 측면에서 그러하다. 축성 말씀은 현존에 대한 단언이지만, 그러한 현존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위격으로, 엄밀히 말해서 당신의 살과 피로 주시는 은총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축성 말씀은 봉헌의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제가 선포하는 그분의 말씀으로,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새롭게 하고 또한 교회의 유익과 행복을 위하여 그 희생 제사를 재현하는 봉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봉헌물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통하여 희생 제사를 규정하는 일부 이론들은 성찬의 희생 제사의 표징으로서 ‘실체 변화’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희생 제사의 본질은 변화에 있지 않으며, 또한 빵이나 포도주가 변화하는 실체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다. 빵도 포도주도 제물은 아니다. 성찬의 희생 제사의 제물은 십자가 희생 제사의 제물과 동일하다. 각각의 경우에 희생 제물은 하나이고 유일하다고 공의회는 선언한다.
물론 실체 변화는 희생 제사의 표징에 포함되지만, 이는 제물 안에서 이루어지는 변화 때문이 아니다. 제물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바치신 봉헌 속에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희생 제사를 실현하는 것은 축성 말씀으로 의미를 지니게 되는 이러한 봉헌인 것이다.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봉헌

성사의 희생 제사는 그리스도의 봉헌을, 더 특별하게는 십자가의 비극에 휩싸이신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봉헌을 현존하게 한다. 그러한 비극에 이어서 그 희생 제사는 실제로 성취되어 효력을 나타냈다. 아버지께서는 다가올 세상 안에서 당신 아드님을 받아들이시어 하느님의 영광으로 감싸 주셨다. 실제로 생전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기회에 사람의 아들이 죽었다가 사흗날에 부활하리라는 것을 예고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예고하시는 죽음이 그 영광의 상급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자 하셨다. 그 희생 제사는 오로지 그러한 행복한 결과에 대한 전망 안에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메시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결코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다. 그 두 사건은 확고하게 일치되어 있고, 부활만이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에 빛을 비추어 줄 수 있다. 예수님의 죽음에 예수님의 영광이 수반되지 않았다면 성찬의 희생 제사는 예수님의 죽음의 봉헌을 되풀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친히 성찬례를 예고하시며, 당신의 몸과 피가 양식의 가치를 지닐 전제가 되는, 사람의 아들이 누릴 영광스러운 신분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셨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다. 그분께서 승천하심으로써 얻게 되실 이 신분은 성찬의 식사에서 드러날 생명을 주는 힘의 전제 조건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최후의 만찬이 거행되던 순간에 구세주의 영광스러운 신분이 예고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오로지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만 희생 제사를 통하여 당신의 몸과 피의 봉헌을 새롭게 하실 권능을 지니고 계신다. 그러한 까닭에,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기념뿐만 아니라 그분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기념으로 거행된다.
제대에 내려오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구세주이시다. 성찬의 식사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분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그분이 바로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우리와 똑같이 지상 생활을 영위하셨으며 십자가 위에 들어 높여질 때까지 당신의 사명을 헌신적으로 완수하셨던 그 그리스도이시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천상 상태의 더욱 고결한 생명, 성령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흘러드는 생명 안에서 그분과 친교를 맺는다.
그러므로 성찬의 희생 제사의 표징에 대하여 우리가 앞에서 한 말을 마무리할 필요가 있다. 빵과 포도주에 대한 이중의 축성은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각기 나누어 하는 축성일 뿐만 아니라 결합의 표징이기도 하다. 그 축성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부활로 죽음을 이기신 승리를 상기시키는 몸과 피의 결합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는 내 몸이다.”라는 말씀에서 몸은 살아 있는 살을 의미한다. 이는 살이 생명을 유지하고 자라게 하는 음식이 되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로써 확인된다. “이는 내 피의 잔이다.”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포도주의 표징을 통하여 일종의 영적인 도취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성 말씀에서, 우리 자신이 더욱 고결한 생명의 상태에 들어감으로써, 곧 그리스도께서 누리시는 영광스러운 신분을 함께 누림으로써 완성되는 희생 제사의 표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 표징은 성찬의 봉헌에서 그리스도의 이 영광스러운 신분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 봉헌을 단순히 구원 사건의 관점에서 그리고 구세주께서 겪으신 처참한 고통과 관련지어 생각했다면 고난의 분위기가 요구되었을 것이고, 기념제는 본질적으로 슬픔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이다. 그 봉헌은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바치시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이 기쁨으로 바뀌는 변화를 수반한다.
성찬례는 기쁨의 분위기에서 잔치처럼 거행된다. 그러한 우리의 기쁨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운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온갖 세력을 무찌르고 승리하신다는 기본 진리를 확인시켜 준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힘을 얻는 성찬례를 통하여 인류는 가장 고귀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는, 구원의 성사의 효과가 죄의 용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불러일으키시고 유지시키시는 생명인 그리스도의 신적 생명을 성장시킨다는 것을 보여 준다. 부활의 힘은 인간 생명이 지닌 모든 연약함과 약점을 치유한다. 승천의 힘 또한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어서 상처 입거나 마비된 모든 사람을 낫게 해 주고 인간을 가장 드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구원 활동과 성찬례의 관계는 그 모든 의미를 얻는다. 성찬례는, 세상의 면모를 바꾸어 놓은 해골산의 숭고하고 영웅적인 봉헌, 하느님의 용서를 충만히 얻어 준 그 봉헌을 성사로써 재현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새로운 인류의 창조 활동을 계속하게 하는 부활의 신비로 자양분을 얻는다. 인류는 승천의 신비에서,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고 아버지의 모든 권능을 나누어 받으신 그리스도의 힘을 받아 누린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봉헌을 새롭게 하시므로, 부활을 바로 그 원천으로 삼고 승천을 그 추진력으로 삼아 온 인류의 무게를 떠받들어 올리시고 인간의 실존에 새로운 힘을 주신다. 성찬례를 바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온 인류가 기쁨과 열정 안에서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도록 인도하는 예수님의 봉헌이 지닌 힘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교회의 희생 제사

희생 제사에 대한 교회의 참여

성찬의 희생 제사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제물이시고 또한 그분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교역자를 통하여 활동하시는 으뜸가는 최고의 사제이시다.
그러나 성찬의 희생 제사는 동시에 교회의 희생 제사이다. 이것이 성찬의 희생 제사가 존재하는 이유의 전부이다. 성사의 희생 제사는 오로지 교회와 그 지체들의 선익을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십자가의 희생 제사가 교회의 희생 제사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늘 새롭게 바치는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해골산 위에서 이루어진 그 희생 제사는 되풀이될 필요가 없다. 이는 유일하고, 단 한 번 영원히 인류를 위하여 구원에 필요한 은총들을 얻고자 바쳐진 것이다. 그러한 희생 제사를 시간이 흘러도 재현하는 것은, 이러한 ‘재현’이 교회의 십자가의 희생 제사 참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자기 것으로 삼고 그 희생 제사와 결합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성찬의 희생 제사는 그리스도께서 해골산 위에서 바치신 봉헌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더 많은 결실을 이루고자 그 봉헌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은,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에서 제정하신 예식의 이행을 통하여 구세주의 봉헌이 성사적으로 교회의 봉헌이 된다는 의미에서, 객관적인 자기화이다. 축성의 말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교회의 희생 제사가 되게 한다.
예식으로 보장되는 이러한 객관적인 자기화는 주관적인 감사의 마음으로 보완되는 경향이 있다. 곧 성찬례에 참여하는 사제와 신자들은 각자 준비된 마음가짐으로 구원의 희생 제사의 봉헌에 결합되도록 초대받는다. 성찬례 거행은, 구세주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물로 바치셨을 당시 그분의 마음과 의지를 공유하도록 그들을 인도하는 경향이 있다.

성찬례의 희생 제사에서 교회의 협력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발표한 전례에 관한 교리는 성찬례와 관련된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완전한 영광을 받으시고 사람들이 거룩하게 되는 이 위대한 행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사랑하시는 당신 신부인 교회를 언제나 당신과 결합시키시며, 교회는 자기 주님을 부르며 또 주님을 통하여 영원하신 아버지께 예배를 드린다”(전례 헌장, 7항).

따라서 “모든 전례 거행은 사제이신 그리스도와 그 몸인 교회의 활동이다”(같은 곳, 7항; DS 4008).

사제 직무를 통한 협력

희생 제사에서 교회의 협력은 무엇보다도 사제 직무를 통하여 표현된다. 직무상 희생 제사를 바치는 사람은 바로 사제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의미에서 봉사자일 따름이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성의 말씀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의 잔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현존하게 한다. 그는 오로지 자신이 받은 사제품의 힘으로 이 말씀들을 선포할 수 있다. 이 힘은 교회의 권위로 그에게 수여된 것이다. 그가 이 힘을 교회의 이름으로 행사할 때,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도 이를 행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찬의 희생 제사 완수는 직무 사제직에 특별히 위임된다. 어떤 이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보편 사제직의 이름으로 성찬례를 거행할 권한이 있다고 강조해 왔지만, 1941년의 회칙 Mediator Dei 는 이에 대한 전통적인 교회의 입장을 상기시키며 이러한 지나친 해석에 대응하였다.

“그러나 신자들이 성찬의 희생 제사에 참여한다고 해서 그들도 사제의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 오늘날, 오래 전에 오류로 판정된 것들에 매달려, 신약성서에서 ‘사제직’이라는 말은 세례 받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사제직만을 의미한다고 가르치며,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사도들에게 당신의 일을 계속하라고 하신 명령은 온 그리스도교 교회에 직접 적용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정한 사제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신자들이고, 사제는 다만 공동체의 위임을 받은 직무만을 수행한다고 주장합니다”.19)

여기에서 그 회칙은 “사제는, 모든 지체의 머리이시며 그 지체들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신자들을 대표한다.”(같은 곳, 69항)는 원칙을 되새겨 준다.
따라서 성찬례의 희생 제사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치는 권한은 오로지 사제에게만 있다.
또한 최근에는 성찬례 거행에서 사제의 이러한 개입에 대한 필연성이 몇 가지 문제들을 낳고 있다. 많은 지역에서, 성소의 감퇴로 일부 본당 공동체에서는 사제의 봉사를 받지 못하고 있다. 사제 없는 주일 집회가 흔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 회중은 함께 기도하고 성서를 봉독하며 성체를 분배하지만, 그리스도교 예배의 가장 중요한 행위인 성찬의 신비 거행에는 참여하지 못한다. 빵과 포도주의 축성과,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뀌는 변화는 사제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우리는 특히 성체 신심이 돈독한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박탈당할 때 겪는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상황은 성소의 씨앗을 뿌리고 자라게 하여야 할 그리스도인의 책임감을 일깨울 수도 있다.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이들 공동체는 젊은이들이 사제 생활에 대한 부르심을 들을 수 있고, 그 부르심이 지속적으로 아낌없는 응답을 들을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형성되도록 가정과 개인 안에 깊은 신앙생활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성직자 부족으로 성찬례를 드리지 못하는 공동체들의 영적 어려움은 사제의 현존과 사명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가져다주시는 모든 영적 부요의 성장을 위하여, 특히 성찬례 거행의 증가를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모든 신자의 참여

온 교회의 성찬례 거행 참여와 관련하여, 앞에서 사제 직무의 중요성을 확인하였으니, 이제 모든 신자의 성찬례 거행 참여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똑같이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신자들의 성찬례 참여는 세례 받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편 사제직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그 사제직은 세례대에서 받는 축성으로 이루어지며, 세례 받은 이들이 성사 생활에서 완전한 발전을 이루고, 더 특별히는 성찬의 희생 제사의 봉헌에 참되게 참여할 수 있게 해 준다. “신자들은 자신의 왕다운 사제직의 힘으로 성찬의 봉헌에 참여한다.”(교회 헌장, 10항)라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말한다. 비오 12세께서는 신자들이 사제의 손을 빌어서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사제와 일치하여 희생 제사를 바친다고 이미 설명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신자들이 사제와 함께 희생 제사를 바친다는 결론은, 그들도 사제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에 가시적인 전례 예식을 수행한다는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시적인 전례 예식의 수행은 하느님의 능력으로 그 직무에 임명된 교역자만의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자들이 사제, 나아가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기도와 뜻에 마음을 합하여 찬미와 탄원, 속죄와 감사를 드림으로써 하나의 동일한 제물을 바치며 사제의 가시적인 예식에 따라 하느님 아버지 앞에 나아간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물론 외적인 희생 예식은 그 본질상 내적인 마음의 예배를 드러내야 합니다. 이렇듯 새로운 율법의 희생 제사는 으뜸 봉헌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그분과 함께 그분을 통하여 신비체의 모든 구성원이 하느님께 합당한 영예와 존경을 드리는 최고의 예배를 의미합니다”(Mediator Dei, 93항).

이 회칙은, 제물에 대한 참여가 없는 희생 제사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신자들이 이러한 희생 제사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거룩한 제물을 바치는 봉헌이 충만한 효과를 지니게 하려면 신자들도 각별한 것을 보태야만 합니다. 곧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같은 곳, 98항).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라는 장엄한 말이 선포되고 이 말에 ‘아멘.’하고 대답하는 순간, ……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위의 거룩하신 구세주와 하나 되어 그들 자신을, 곧 그들의 근심과 슬픔과 고민과 요구를 바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같은 곳, 104항).
성사의 희생 제사라는 개념은 그것이 요구하는 것들과 관련하여, 또 그것의 목적을 바탕으로 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성사 예식이 중요한 까닭은, 빵과 포도주의 축성을 통하여 구원의 희생 제사의 봉헌이 재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예식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을 유일한 십자가의 희생 제사에 동참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가 될 뿐 아니라 온전히 교회의 희생 제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예식의 봉헌은 신자 개개인의 봉헌으로서 신자들의 활발한 참여를 요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내면의 참여 없이 그저 예배 행위로 미사에 참석해서는 안 된다. 예식이 외적인 것에 머무르면, 외적인 행위에 상응하는 내적인 마음가짐을 불러일으키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성찬의 희생 제사는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의 근본적 봉헌 행위에 동참시키고자 거행하는 것이다.
모든 성찬례 거행이 참석자들에게 제기하는 문제는 그 봉헌이 구세주의 봉헌과 결부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모든 신자는 자신들이 무엇을 봉헌하여야 하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희생 제사는 개인의 이러한 참여 없이는 그 목적을 결코 달성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봉헌은 우리 자신이 그분과 결합될 때 비로소 성사적으로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사실, 완전한 그리스도인 생활은 성찬례가 없이도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 활동에 결합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찬례는 세상 구원을 가져다준 그 봉헌을 우리 앞에 보여 줌으로써 그러한 결합에 더욱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한다. 더 정확히 말해서, 성찬례는 우리가 해골산의 영웅적인 봉헌을 응시하면서 슬픔이나 고통과 같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바치라는 초대이다. 우리가 겪는 고통이 극심할수록, 우리는 이른바 우리의 고통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뇌, 때로는 우리를 애태우는 근심, 밖으로 분출되거나 잠재되어 있는 모든 내적인 극적 요소를 지닌 우리의 도덕적 상황,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서 오는 모든 종류의 긴장들을 ‘지향으로 바쳐야’ 한다.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모든 것은 성찬례에 봉헌물로 바쳐져 그리스도의 구원의 고통과 결합됨으로써 더 높은 품위를 얻기에 합당한 것들이다.
예수님의 숭고한 봉헌을 본받아 완전한 자기 증여로 표현되는 삶이나 특별한 헌신이 요구되는 활동에 투신하거나 더욱 헌신하게 될 때 성찬례 거행에서 개인의 봉헌 문제는 매우 관대한 응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가장 일반적인 삶의 환경에서도 제기된다. 삶에서는 어려움이 적지 않으며, 그러한 어려움들은 불평이나 낙담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나, 성찬례의 희생 제사는 그러한 난관들을 더욱 기꺼이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더 깊은 사랑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봉헌의 정신을 길러 주는 경향이 있다.
희생 제사의 성사적 본성은 그 지향이 신비주의와 반대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 예식이 개인의 주관적인 마음가짐에 관계없이 객관적인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는 객관적인 실재를 지닌 성사가 구원의 봉헌의 신비에 대한 주체적인 참여를 강하게 요청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 참여는 예수님의 위격과 더욱 긴밀하게 결합되므로 신비적인 측면을 띠며, 세상에 구원의 은총을 전파하는 데 이바지하려는 염원과 봉헌에 동참함으로써 이러한 결합을 최대한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성찬의 희생 제사는, 특별한 범주의 영성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위하여 바치신 봉헌의 숨결을 전해 줌으로써 그들의 지극히 평범한 삶을 변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성찬의 희생 제사의 열매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의 봉헌은 사제 직무를 통한 축성으로 실현되어 특별한 열매를 맺는다. 이 열매는 성사 행위의 집행만으로도 얻어지는 것으로, 신학자들은 이를 ‘사효성’(ex opere operato)이라 일컫는다.
성찬례 거행의 모든 열매는 십자가의 희생 제사에서 나온다. 실제로, 성찬의 희생 제사만이 모든 은총의 원천인 유일한 구원의 희생 제사를 현존하게 한다. 미사의 유일한 힘은 해골산의 봉헌 제물에서 나오는 것이다.
신학적 성찰에 따르면, 희생 제사의 네 가지 목적인 흠숭, 감사, 속죄, 은총의 획득 덕분에 미사 안에 네 배의 효력이 있다고 본다. 이 네 가지 목적에 따라 희생 제사는 찬미, 감사, 속죄, 기원의 제사라 불린다. 속죄와 기원의 효력은 각각 산 이와 죽은 이에게 이중으로 적용된다.
성찬의 희생 제사의 봉헌이 죽은 이에게 유익하고 그들이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확신은 교회의 가장 오랜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다. 죽은 이를 위하여 미사를 거행하는 관습은 이미 2세기에 시작되었다. 명백히,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할 때 죽은 이를 위하여 전구할 힘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간청이나 기도의 효력보다 뛰어난 것으로 여기는 성찬의 희생 제사의 효력을 특히 신뢰한다.
성찬의 희생 제사의 봉헌은 또한 산 이에게도 은총의 효과를 낳는다. 온갖 은총을 얻기 위하여 사제들에게 특별 지향을 바치도록 요구하는 관행은 전통에 굳게 뿌리박혀 있다.
개별 집전이 아닌 공동 집전의 경우에도, 하나의 특별 지향을 위해서 미사를 바쳐 달라고 사제에게 요청할 수 있다. 각 공동 집전자는 하나의 구체적인 지향을 위하여 미사를 바칠 수 있다. 공동 집전 미사에서 우리가 하나의 희생 제사를 드린다 하더라도, 공동 집전자는 각자가 그 봉헌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러한 참여 덕분에, 각자가 이바지하는 희생 제사가 하나의 특별 지향을 위하여 바쳐지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사의 모든 효력이 특별 지향에만 돌려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성찬의 희생 제사에서 드리는 봉헌은 특별히 또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지향들을 초월하는 열매를 낳는다.
사실 모든 성찬 거행은 교회 생활을 더욱 발전시키는 열매를 맺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더 널리 현존하시고자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현존하신다. 우리는, 바오로가 강조한 성찬례와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의 유대를 떠올릴 수 있다. “여러분은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1고린 11,26). 이는 단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선포와 이 세상의 종말을 알려 줄 재림 사이의 유대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다. 구세주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뒤, 오순절에 드러나 교회 안에 지속되고 있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권능을 통하여 재림이 시작되었다. 성찬례는 구원의 희생 제사의 봉헌을 새롭게 함으로써 이 재림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는 데에 이바지하고,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이 세상에 실현하시는 활동의 지속적인 성장을 촉진한다.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린 계약의 피에 관한 성찬 축성의 말씀은 거룩한 계약의 확장을 통하여 그리고 온 인류를 지속적으로 변화시키는 구원 은총의 힘을 통하여 실현된다. 성찬례 거행은 끊임없이 열매를 맺는다.
그것은 사제의 행위와 말을 통하여 희생 제사를 바치시는 그리스도의 최고의 행위이기 때문에 본질적인 열매이며, 집전자 개인의 마음가짐과는 별도로 언제나 열매를 맺는다. 물론 성찬례를 집전하는 사제가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하여 그 희생 제사의 봉헌에 전념하고, 자신도 구세주의 자세를 닮고자 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그럴 때에 그는 교회와 인류를 위하여 성찬의 희생 제사를 비옥하게 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축성에서 흘러나오고 그리스도인 공동체 전체의 영적 풍요를 보증하는 기본적인 결실이 있다. 모든 미사는 교회의 더욱 깊은 성화에 이바지하고, 구세주의 사랑이 온 인류의 운명에 더욱 활발한 영향을 미치게 하는 데에 이바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례 안에서 교회에 끊임없이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성령의 고무적인 역동성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오로지 교회만이 성찬례를 낳는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해도 틀리지는 않지만, 성찬례가 교회를 낳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성찬례 거행은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영적으로 성장시킨다. 구원의 봉헌을 통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활동인 성찬례는 이 사랑을 발전시켜 신앙과 구세주의 지고한 생명으로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결합시킨다.

 

제7장  친교의 식사


식사의 가치

잔치 제정의 의미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의 근본 뜻은, 교회 안에서 당신 제자들을 영원히 먹여 살릴 수 있는 식사를 베풀어 주시려는 것이었다. 이 식사로써 구세주께서는 희생 제사의 봉헌을 실현하는 예식을 통하여 당신의 희생 제사의 열매를 전달해 주고자 하셨다. 그분께서는 해골산 위에서 희생 제물로 바쳐질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고자 하시면서 그 몸과 피가 유일한 가치를 지닌 식사의 음식과 음료가 되기를 바라셨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성찬을 제정하신 목적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의 현존을 드러내는 감각적 표징으로 빵과 포도주를 선택하시어 성찬을 제정하시려는 당신의 의향을 명확히 드러내셨다. 예수님께서는 희생 제사를 되풀이하는 것에 만족하시지 않고, 이 식사를 통하여 당신의 희생 제사가 인간의 삶에 깊이 파고들어 그 삶을 변화시키기를 바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뜻에 당황해서는 안 된다. 식사는 특히 사회생활의 한 행위이며, 일상생활에서 인간의 유대와 친밀감이 표현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믿음과 사랑이 충만한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셨으므로, 그분께서 그러한 공동체의 형성과 발전을 위하여 식사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신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복음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시며 식사를 통하여 당신 제자들과 우애의 관계를 다지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고자 하셨음을 보여 준다. 그분을 초대한 이들도 그분께서 식사 자리에서 당신의 가르침을 펴시거나 당신의 메시지에 담긴 참뜻을 밝혀 주시기를 내심 바랐던 것이다. 단식을 하던 세례자 요한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그 시대 사람들과 더불어 음식을 드셨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마태 11,19) 하였다. 예수님께서 주변 사람들의 삶에 동참하시고자 먹고 마신 식사는 강생의 신비로 필수적인 것이 되어 버린, 인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었다.

거룩한 식사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영적인 식사를 베풀어 주시려는 예수님의 결정은 단순히 일반 사회생활에서 식사가 차지하는 중요성에서 나온 결정이 아니다. 유다교에서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서 식사의 역할을 무시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거룩한 식사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본문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것과 관련하여 두 가지 전승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희생 제사를 계약의 필수적인 예식으로 설명하고, 다른 하나는 식사 안에 계약이 표현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후자의 전승에 따르면, 모세와 산 위에 올라간 이스라엘의 원로 칠십 명은 하느님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오며 먹고 마셨다”(출애 24,11). 이렇게 당신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여 주신 것이다. 다른 본문에 따르면 죽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관상이 식사와 어우러져 하느님과 친교를 맺게 됨을 확인해 준다. 누군가의 면전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다.
따라서 거룩한 식사는 하느님과 친교를 맺게 해 준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이유에서,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거처, 곧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장소에서 식사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너희는 너희 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붙이시고 당신께서 계시는 곳으로 삼으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가운데서 고르신 그곳을 찾아 그리로 가야 한다. 너희의 번제물과 친교 제물과 십일조와 흔들어 바치는 예물과 서원 제물과 자원 제물과 소와 양의 맏배를 그리로 가져다 바쳐야 한다. 그곳이 너희 주 하느님을 모시고 먹으며 즐길 자리, 너희와 너희 식구들이 손으로 일해 얻은 모든 것, 너희 주 하느님께서 복으로 주신 모든 것을 먹으며 즐길 자리다”(신명 12,5-7).

이 설명은 우리에게 희생 제사와 식사의 유대를 보여 준다. 희생 제사는 하느님께서 고르시고 동시에 하느님께 봉헌된 성소에서 드려야 하고, 식사도 같은 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식사가 공동체의 유대를 형성하는 특성을 지닌다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식사들은 하느님과 더욱 깊은 생명의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출발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친교나 계약 관계를 맺으시려고 식사를 마련하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곧 주도하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식사를 마련할 성소로 백성을 불러 모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식사하는 동안 내내 함께하신다. 이러한 식사는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하느님과 친교의 관계를 발전시키게 된다.
즐기라는 초대는 식사의 법칙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너희는 너희 주 하느님을 모시고 그 앞에서 즐겨라. 너희뿐 아니라 너희 아들딸, 또 너희 남종과 여종, 또 너희처럼 유산으로 받은 몫이 따로 없이 너희 성문 안에서 사는 레위인들도 함께 즐기게 하여라”(신명 12,12). 즐기라는 초대는 가족뿐 아니라 종들을 포함한 모든 식솔을 향한 초대이다. 모든 이가 하느님의 축복이라 볼 수 있는 식사의 기쁨에 참여하라는 초대인 것이다.
기쁨의 흥을 더욱 돋우려면 하느님께서 고르신 자리에 원하는 음식을 모두 모으라고 권고하였다. “그 돈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사서 먹으며 즐겨라. 소, 양, 포도주, 술, 무엇이든지 먹고 싶은 것을 사서 너희 주 하느님을 모시고 너희와 너희 온 집안이 먹으며 즐겨라”(신명 14,26). 그렇게 하여 주님의 식탁에 초대받은 이들의 모든 바람에 응해 주시려는 하느님의 뜻이 드러 난 다. 하느님 사랑에서 가장 우선되는 것은 선택받은 백성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다. 음식의 선택을 제한하고 독한 술을 금하는 규정을 부과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풍성히 차려진 매우 특별한 식사를 통하여 인간을 행복하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가장 근본적인 계획을 드러내고자 하신다. 그러한 식사는 잔치로 베풀어진다. 종교적 축제는 잔치의 특성을 지니며, 거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최대의 기쁨을 보장해 주는 가장 후하신 분으로 제시된다.

종말론적인 만찬

‘묵시록’이라 불리는 이사야서 후반부에는,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마련해 주신 지복을 호화로운 잔치로 묘사하고 있다. 그 식탁은 시온 산 위에 차려지지만, 히브리 백성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몫에서 혜택을 받아 누릴 ‘모든 민족’을 위하여 마련된 것이다.

“이 산 위에서 만군의 주님,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차려
주시리라.
살진 고기를 굽고 술을 잘 익히고
연한 살코기를 볶고 술을 맑게 걸러 잔치를 차려 주시리라.
이 산 위에서 모든 백성들의 얼굴을 가리던 너울을 찢으시리라.
모든 민족들을 덮었던 보자기를 찢으시리라.
그리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님, 나의 주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벗겨 주시리라.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약속이다.
그날 이렇게들 말하리라.
‘이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다.
구원해 주시리라 믿고 기다리던 우리 하느님이시다.
이분이 주님이시다.
우리가 믿고 기다리던 주님이시다.
기뻐하고 노래하며 즐거워하자.
그가 우리를 구원하셨다’”(이사 25,6-9).

잔치의 호화로움을 한층 강조하고 설명을 곁들여 그것을 묘사함으로써 고통이 사라지고 기쁨을 선물로 받은 것을 더욱 명확히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백성의 거룩한 희망에 응답하신다.
이사야서에서 ‘위로의 책’이라고 불리는 부분에서는 식사가 거저 베풀어지는 것임이 한층 더 명확히 드러난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값 없이 술과 젖을 사서 마셔라.
그런데 어찌하여 돈을 써 가며 양식도 못되는 것을 얻으려
하느냐?
애써 번 돈을 배부르게도 못하는 데 써 버리느냐?
들어라, 나의 말을 들어 보아라. 맛 좋은 음식을 먹으며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나의 말을 들어라.
너희에게 생기가 솟으리라.
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라.
다윗에게 약속한 호의를 지키리라”(이사 55,1-3).

그 옛날 모세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계약을 체결하였던 최초의 식사에 상응하는 것은, 다윗에게 하신 약속에 충실하여 영원한 계약을 체결하게 될 마지막 식사이다. 식사는, 이 계약으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풀어 주실 모든 혜택과 모든 은총을 설명한다.
또한 연대기적으로 그리스도 시대와 더욱 가까운 「에녹서」(Book of the Parables of Enoch)에서는 앞으로 누릴 생명의 지복이 천상 잔치의 모습으로 제시된다. “성령의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머무르시리라. 그리고 그들은 사람의 아들과 같이 먹고, 영원히 그분 식탁에 참여하리라”(62,14). 따라서 행복은 모든 영들의 주님이신 분, 곧 하느님 바로 곁에 계시는 메시아이신 사람의 아들의 식탁에 동참하는 데에 있다. 영원한 행복에 대한 약속의 바탕이 되는 것은 특히 바로 이러한 동참이다.

영적인 식사

하늘나라의 잔치를 선포하며, 몇몇 묵시적 예언들은 하느님의 관대함을 보여 주고자 그 훌륭한 잔치 음식을 강조하였다. 하느님 지혜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사조들도 있었다. 잠언은 지혜가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잔치를 묘사하고 있다.

“지혜가 일곱 기둥을 세워 제 집을 짓고
소를 잡고 술을 따라 손수 잔치를 베푼다.
시녀들을 내보내어 마을 언덕에서 외치게 한다.
“어리석은 이여, 이리 들어오시오.”
그리고 속없는 사람을 이렇게 초대한다.
“와서 내가 차린 음식을 먹고
내가 빚은 술을 받아 마시지 않겠소?
복되게 살려거든 철없는 짓을 버리고
슬기로운 길에 나서 보시오”(잠언 9,1-6).

지혜의 빵을 먹고 지혜의 술을 마시라는 초대는 자신의 마음과 삶 안에 이 지혜를 받아들이라는 권유이다. 이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참생명을 얻으며, 가장 정의롭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 권유는 특별히 가장 단순한 사람, 곧 이미 지혜를 받았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을 향한다. 하느님의 지혜의 선물은 멸시받는 이들에게 주어진다. 하느님의 사랑은 특별히 가난한 이들과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아낌없이 쏟아져 내리기 때문이다.
집회서에서, 하느님의 지혜는 풍성하고 흡족한 식사를 약속하는 은총의 원천으로 제시된다.

“지혜는 그 열매로 사람들을 흡족케 한다.
지혜는 그들의 집안을 재물로 가득 차게 하고
그들의 곳간을 곡물로 채워 준다”(집회 1,16ㄴ-17).

지혜는 자신의 열매를 끝없이 풍성하게 베풀어 준다. 지혜는 자신을 먹고 마실 것으로 내어 준다.

“나를 원하는 사람들은 나에게로 와서,
나의 열매를 배불리 먹어라.
나의 추억은 꿀보다 더 달고,
나를 소유하는 것은 꿀송이보다 더 달다.
나를 먹는 사람은 더 먹고 싶어지고
나를 마시는 사람은 더 마시고 싶어진다”(집회 24,19-20).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드린 말씀 속에는, 구약 성서가 지혜의 잔치를 통하여 한 예고가 완성되어 있다. 또한 이러한 구약의 예표의 완성은, 구약의 지혜처럼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내어 주시는 성찬례에서 확인된다.


성찬의 식사

강생과 식사

구약에서 지혜의 잔치에 대한 예고는 실질적으로 성찬례를 지향한 것이었다. 지혜는 예수님 안에서 인격을 갖추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지혜와 동일시하셨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다”(마태 11,19). 예수님의 기적들과 그분의 구원 활동 전체는 지혜의 행위이다. 
예수님께서는 지혜가 잔치에서 차려지기를 바랐던 것, 곧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장 구체적으로 실현하신다. 지혜의 말은 비유적인 의미만을 지닐 수 있었다. 지혜가 “나를 먹는 사람은 …… 나를 마시는 사람은 ……”이라고 했을 때, ‘먹다’와 ‘마시다’라는 동사가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의미는 상징적인 것이었다. 정확한 의미에서, 지혜를 먹거나 마시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지혜를 추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지혜를 자신의 사고방식을 바꾸어 놓는 하느님의 선물로 생각하고 취급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 먹고 마시는 행위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요한 6,54)라고 성찬 제정을 약속하는 말에서 매우 분명히 드러나듯이, 그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물론 먹고 마시도록 주어진 것은 평범한 음식이나 음료가 아니다. 우리가 먹는 것은 영광스러운 상태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살, 성령으로 충만한 살이며, 우리가 마시는 것은 같은 상태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피인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요한 6,55).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현존의 신비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그 식사는 먹고 마심으로 이루어진다.
이 먹고 마심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강생의 근원적인 신비다. 지혜는 사람들 가운데에 왔지만, 강생하지 않은, 곧 살도 피도 없는 하느님으로 묘사되어 왔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강생의 완전한 실재로 이 세상에 오시어 여느 인간과 똑같이 살과 피를 지니신 하느님이시다.
강생의 힘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성찬의 빵으로 정의하신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 요한 복음서의 이 표현으로, 우리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새 생명을 위하여 인류에게 주어진 양식이라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오로지 당신께 딸린 몸과 피를 통하여 생명의 빵이 되시지만, 자신을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내어 주시는 분인 하느님의 아들이신 것도 사실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요한 6,33)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성자의 신격이 성찬의 식사에 관여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신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의 선물은 강생의 선물과 연결되어 있다. ‘빵’이라는 말은 우리가 그분의 선포에서 성찬례를 인식할 수 있게 해 준다. 성체 축성으로 성자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고, 성찬의 식사로 세상에 생명을 주신다. 이러한 방식으로 성찬례는 강생의 과정을 끊임없이 새롭게 한다. 하느님의 빵은 단순히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이 아니다. “나는……이다.”라는 단언으로 실제로 하느님께서 빵으로 봉헌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성찬례 안에 당신의 몸과 피만이 아니라 당신의 전 존재로 관여하신다. 이처럼 성찬의 식사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의 생명을 전달해 주시는 자리이다. 이는 하느님의 생명 자체를 전달해 주는 것이다. 성자께서 소유하신 이 생명은, 그분과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예정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요한 6,54)라는 선포 속에 담긴 모든 것이다.
은총의 생명은 그 자체로 성자의 이 영원한 생명을 전달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달은 성찬례에서 가장 탁월하게 이루어진다. 먹고 마시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개인의 내부에 더 깊이 스며들고, 각자의 생명이 강생하신 성자의 지고한 생명에 더욱더 완전히 동화되는 것이다.

생명을 주시는 성령으로 활기를 띠는 잔치

구약 성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당신을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내어 주시는, 지혜가 베푸는 영적 잔치를 선포했다. 이 선포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로 당신 자신을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봉헌하심으로써 실현된다.
그러나 복음서의 설명에 따르면, 영적 잔치에는 성령의 필수적인 도움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청중들이 성찬의 양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이 지상에 현존하는 예수님의 살이라고 생각하자 이에 단호한 반응을 보이셨다. 우리는 이미, 음식으로 내어 준 그 살은 승천하신 사람의 아들의 살, 곧 성령께서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살이라고 강조하시는 예수님의 답변에 대하여 설명한 바 있다. 살은 그 자체로는, 살이라는 그 속성만으로는 “아무 쓸모가 없기”(요한 6,63) 때문이다.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요한 6,63).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와 관련된 모든 말씀을 어떤 의미로 이해하여야 하는지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이 말씀들은 ‘성령과 생명’의 말씀이다. 이 살과 이 피는 성령의 생명, 곧 살과 피에 완전한 의미를 부여하는 생명을 발견할 수 있는 실재들이다.
우리가 성찬의 식사에서 먹고 마시는 분인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신적 생명을 전달해 주신다고 단언할 때, 이 생명은 성령을 통하여 전달된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밝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찬의 음식과 음료로 활동하실 때에도 성령을 통하여 활동하시고 인류를 변화시키신다. 베드로의 설교에 따르면, 오순절에 교회가 탄생하던 그 순간, 성부께 받은 당신의 성령을 부어 주신 분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이시다(사도 2,33 참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이 첫 출현에는 성령께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시게 될 미래의 모든 발전 원리와 원천이 담겨 있었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시고 변화시키시는 활동을 전개하신다는 이 원리에 맞게, 성찬례에서 양식으로 주어진 살은 그 안에 성령께서 불어넣어 주신 특별한 생명을 담고 있으므로, 성찬의 식사는 성령의 생명을 전파한다. 이는 성찬례를 성령의 성사로 생각하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성찬의 식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이루어진 음식과 음료이다. 성령의 임무는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고(요한 16,14 참조), 성령의 힘을 받은 그리스도의 증인들을 낳는 것이다(사도 1,8 참조). 이처럼 음식과 음료로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분은 언제나 그리스도이시지만, 그 음식과 음료의 영적 효과는 그것들을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성령에게서 흘러나온다.
따라서 성찬의 잔치를 통하여, 성령의 은총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내린다. 바오로 성인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교회 생활과 그 성장을 특징짓는 성령의 선물, 곧 은사의 다양성에 대하여 설명한다(1고린 12,1-11 참조). 이는 성령의 통치 의지에 따라 전반적으로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은총들로서, 거기에 성찬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곧이어 바오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큰 은총, 믿음, 바람, 그리고 특별히 사랑을 열망하라고 권고할 때(1고린 12,31; 13,13 참조), 우리는 이러한 은총을 얻는 데에 성찬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사랑의 경우에 성찬례의 특수한 역할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13,34 참조)라고 말씀하시며 새 계명을 세우셨을 때, 성찬례와 사랑의 유대를 보여 주셨으며, 자주 알력을 드러내는 제자들에게 성찬례로써 사랑과 이해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영적인 힘을 베풀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위대한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시고자 성찬의 잔치에 의지하셨다. 이 식사 안에 담긴 하느님의 은총, 모든 반목을 이겨 내는 사랑의 승리의 은총은 바로 성령의 은총이었다.
성찬례는 성령의 은총이 베풀어지는 유일한 통로는 아니지만, 특별히 사랑의 확산을 위하여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양식으로 당신을 내어 주시어 성령을 통하여 모든 사람의 마음에 사랑의 불을 밝혀 주신다.

성찬과 성령 청원(epiclesis)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내어 주는 은총에 작용하시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께서는 희생 제사의 봉헌과 식사의 영적인 효과에 특별한 역할을 하신다. 이 역할은 전례 안에서 성령 청원을 통하여 드러난다.
성령 청원은 성령의 은총을 얻기 위한 청원이다. 성령 청원은 특히 축성에 영향을 끼친다. 성령 청원의 목적은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로 변화되는 것이다. 또한 일치를 목적으로 하는 성령 청원에서는 성찬의 잔치의 영적 효력을 성령께 청원한다.
축성과 연관된 성령 청원 문제에서 정교회와 가톨릭은 일치하지 않고 있다. 정교회는 성령 청원을 축성의 효력을 지닌 핵심 기도문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성찬 제정의 말씀은 그저 성령 청원으로 유효하게 된 것을 표현하는 것일 따름이다. 피렌체 공의회의 아르메니아 교령은 성사의 형식은 구세주의 말씀, 곧 성찬 제정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고 천명한다(DS 1321). 교황청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축성의 유효성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수없이 천명하였다. 비오 10세께서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씀하신다. “성체성사에 관한 가톨릭 교리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축성 말씀은 성령 청원 기도를 드린 다음에야 그 목적이 이루어진다는 그리스인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도록 끈질기게 가르치기 때문이다”(DS 3556). 1957년 5월 23일 성무성성은 축성 말씀의 선포로 거행이 유효하다고 선언하였다.20)
그러나 이 때문에 성령 청원이 효력이 없다고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성령의 강림은 성찬 신비의 완성이기 때문에 성찬례 거행에서 성령의 강림을 청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봉헌이 성부께 올라가고, 이 봉헌 안에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것은 바로 성령을 통해서이다.

 

제8장  성체 현존에 대한 공경


실재적 현존에 대한 공경의 발전

성체 현존은,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1고린 11,24-25; 루가 22,19) 하신 그리스도의 두 번의 명령을 바탕으로 괄목할 만한 전례 발전의 근거가 되고 있으며, 수세기를 흘러오면서 그 발전의 폭도 넓어지게 되었다. 빵과 포도주의 축성을 중심으로, 기도와 예식, 독서가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이와 더불어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구세주께서 제정하신 기념제에 최대한 적극적으로 동참하려고 노력한다.
특히 상대적으로 뒤늦은 성체 현존에 대한 신심의 발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세기에, 성체는 미사와 영성체 때에만 공적으로 공경을 받았다. 축성된 제병의 보존은 본래 병자와 미사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성체를 모셔 가려는 목적에서 생겨났다. 중세에 이르러서야, 서양에서 성체 흠숭을 강조하면서 실재적 현존에 대한 공경이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12세기에는 축성 직후에 축성된 제병을 높이 들어 올리는 새로운 예식이 미사에 도입되었다. 이러한 성체 거양은 그리스도의 현존을 더욱 분명하게 인정하고 그분을 공경하라는 권유이다.
13세기에는 성체 행렬에 대한 대중의 참여와 더불어 미사 밖에서 성체 공경이 발전하였다.
1247년 벨기에 리에주에서 몽 코르니용의 쥴리앙 성인의 열의로 성체 축일이 도입되었고, 1264년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칙서 Transiturus에서 이 축일을 보편 교회로 확대시켜, 이 지극히 고귀한 성사를 “공경하고, 흠숭하고, 찬양하고, 사랑하며, 감싸 안고자”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로 제정하였다.
14세기에는, 성체 현시대에 성체를 현시하는 관행이 도입되었다. 이후, 어떤 지역에서는 법정 시간경을 바치는 동안 성체가 현시되었다. 또한 성체 강복이 증가하였다. 15세기 말, 주님께서 무덤에서 보내신 40시간을 기념하는 40시간 성체 조배가 시작되었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감실이 주 제대 위에 설치되었다. 18세기에는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성인의 영향을 받아 사적 성체 조배가 확산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발전 안에 담긴 교리적 가치를 인정하여야 한다. 현대의 교리는 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믿음 위에서 발전되어 온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의 기도는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이 이미 앞서 노래한 것임을 주목해 볼 가치가 있다. 이는 이 대축일 제정이 신학적 성찰과 일치하였다는 표시이다. 그 성인의 시구절 “혀여 노래하라”(Pange Lingua)를 떠올려 보자.

내 혀여 노래하라, 구세주의 영광을.
그 살과 고귀하신 피의 신비를 노래하라.
세상을 위해 값을 치르신
고결한 태중의 아드님이시니.

흠 없는 성모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사람이 되신 주님께서는
풍요로운 말씀으로 민족들 가운데에 씨 뿌리시고
자애로운 사랑으로 당신의 생명을 완성하셨네.

최후 만찬의 저녁에 형제들과 함께하시고
과월절의 거룩한 예식을 글자 그대로 성취하시며
놀라워하는 사도들에게 당신 자신을 양식으로 주셨으니.

주님의 말씀이
빵과 포도주를 변화시키셨네.
주님께서 빵은 살로, 포도주는 피로
축성하시어 기념하게 하시니
이는 감각이 아니라 믿음이 증명하는 진리.

우리 모두 공경하세,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신 그 성사를.
새로운 계약, 새로운 예식이 믿음으로 성취되었으니
그 신비의 근원은 예수님 말씀이라네.

전능하신 성부께 영광,
구세주 성자께 영광,
영원한 사랑이신 분께 크나큰 찬미와 높으신 영예를!
거룩한 삼위일체께 무한한 영광과 끝없는 사랑을!
아멘.

트리엔트 공의회는 실재적 현존과 실체 변화를 선포한 다음에 성체에 합당한 흠숭 예절의 기본 원리를 공표하였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가 언제나 받아들여 온 관행대로, 모든 신자가 성체에 대한 공경으로 참하느님께 합당한 최고의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 참으로 마땅하다. 실제로 양식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이를 제정하셨다는 사실이 성체 공경을 방해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체 안에 같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믿는다.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그분을 세상에 보내시며 말씀하신 대로 ‘신들이 모두 다 주님 앞에 부복하고’(시편 96〔97〕,7) 박사들이 ‘엎드려 경배하였다’(마태 2,11). 마지막으로 성서는 그분의 사도들이 갈릴래아에서 그분을 뵙고 ‘엎드려 절하였다’(마태 28,17)라고 증언한다”(DS 1643).


성찬례 거행에서 실재적 현존에 대한 공경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제정하신 직후 곧장 당신의 몸과 피의 현존을 말씀하신 것은 이를 상기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권유하시는 중이었으므로, 그저 “내 몸을 먹어라.”, “내 피를 받아 마셔라.” 하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라고 하시며 당신의 살과 피의 실재를 선언하는 말을 택하여 사용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이 실재를 믿으라고 당부하셨다. 따라서 최후의 만찬이 있기 한 해 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신앙 행위를 요구하셨던 것이다. 이 신앙 행위는 성찬례를 선포하던 순간에 발생했던 대부분의 이탈 행위에 반발하는 것인 만큼 더더욱 가치 있고 유효한 신앙 행위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계속해서 따르려면 받아들여야 할 조건으로서 그러한 신앙 행위를 요구하시며, 열두 제자에게 이렇게 물으셨던 것이다.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스승과 함께 머무르려면, 제자들은 사람의 아들이 자기 살을 먹을 것으로, 자기 피를 마실 것으로 내어 주는 그 신비로운 식사를 믿어야 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며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심을 인정하여야 한다.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신앙 행위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신격을 믿는 신앙 행위이다. 오직 한 분 하느님께서만이 친히 인간을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되시어 세상에 생명을 보장해 주실 수 있다.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한다.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요한 6,68) 실제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거룩함을 지니신 분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는가.
성찬례에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근본적인 선언이 담겨 있다. 따라서 공경에 대한 권유가 담겨 있는 것이다. 당신의 몸과 피로 자신을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내어 주시는 분께서는 당신의 선물이 지닌 거룩한 힘의 효용으로 당신을 받아 모시도록 요구하신다.
예수님께서 성체 안에 계신 당신의 위격적 현존에 관하여 하신 말씀은 모두 거기에 함축된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 의미들은 당신의 살을 음식으로 내어 주고, 당신의 피를 음료로 내어 준다는 선포 이상의 것이다. 위격의 현존은 그 효용이나 역할로 축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라고 말씀하실 때도, 그분께서는 자양분의 역할만이 전부가 아닌 위격적 현존에 대하여 암시하신 것이다.
성체의 현존을 결코 몸과 피로 구성된 어떤 물체의 현존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기 몸과 피를 통하여 “나는 …… 이다.”라고 말씀하신 분의 현존이다. 이 현존은 사랑으로, 더 정확하게는 신격의 최고 존위로 현존하게 된 한 위격의 존위로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찬례 거행에 참여할 때, 친교의 식사에 앞서, 현존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먼저 공경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공경만이 합당한 존경과 경외심으로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는 그리스도인의 마음가짐이다. 이러한 공경만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과 개별적인 친밀한 관계를 맺게 하는 영성체에 참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여기에서 공경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실제로 우리는 밀떡에 공경을 할 수 있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이 공경은 그리스도 몸의 현존에 대한 감각적 표징에 불과한 밀떡 자체를 넘어서는 공경이다. 이 몸은, 하느님 아드님의 신격에 속해 있기 때문에 공경받을 수 있는 것이고, 또 공경받아야 한다. 실제로, 그 공경은 오직 그 위격을 향한 것이다. 이러한 공경은 오래된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Adoro Te Devote)의 심오한 말 속에 드러나 있다.

엎디어 절하나이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하느님,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삽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보고 맛보고 만져 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

십자가 위에서는 신성을 감추시고
여기서는 인성마저 아니 보이시나
저는 신성, 인성을 둘 다 믿어 고백하며
뉘우치던 저 강도의 기도 올리나이다.

토마스처럼 그 상처를 보지는 못하여도
저의 하느님이심을 믿어 의심 않사오니
언제나 주님을 더욱더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사여,
사람에게 생명 주는 살아 있는 빵이여
제 영혼 당신으로 살아가고
언제나 그 단맛을 느끼게 하소서.

사랑 깊은 펠리칸, 주 예수님,
더러운 저, 당신 피로 씻어 주소서.
그 한 방울만으로도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구해 내시리이다.

예수님, 지금은 가려져 계시오나
이렇듯 애타게 간구하오니
언젠가 드러내실 주님 얼굴 마주 뵙고
주님 영광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아멘.


성찬 거행 밖에서 이루어지는 실재적 현존에 대한 공경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성체 현존에 대한 공경을 성찬의 희생 제사와 영성체 거행 밖에서 하라고 분명하게 요구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축성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몸과 피의 현존을 주셨으며, 이 현존에 아무런 제한도 두지 않으셨다.
실제로, 그분께서는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성사적으로 재현하는 희생 제사의 봉헌 안에서 당신의 몸과 피를 주셨으며, 바로 그 십자가의 봉헌을 통하여 성찬례 안에 위격적으로 현존하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러한 현존을 성찬의 희생 제사의 봉헌에 필요한 장소와 시간 안에 국한하지는 않으셨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현존을 빵과 포도주의 표징 아래 있게 하시면서 그분께서 생각하신 것은 친교의 식사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단 그 식사가 끝나면 당신의 몸과 피의 봉헌도 끝이 나야 한다는 뜻을 물론 표명하지는 않으셨다.
우리는, 먹고 마시라는 초대를 포함하여 예수님께서 신중하게 선택하신 축성 말씀은 성체와 성혈의 실재에 관한 언급에 국한될 뿐, 그 현존을 위한 시간에는 어떠한 제한도 두지 않았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성체의 두 ‘형상’이 썩지 않고 존속하는 한, 그 몸과 피는 변함없이 현존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라는 말씀이 인간에게 베풀어진 선물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내 몸을 보아라, …… 내 피를 보아라.”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이 은총은 무한히 아낌없이 베풀어지는 선물이다. 이처럼 지극히 간단한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성사적 현존을 당신 제자들에게 남기셨지만, 이 현존이 지속하는 기간에 대해서는 제한을 두려고 하지 않으셨으며, 이 현존과 관련된 무한한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는 그 현존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당신 교회에 맡기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성체 현존은 아무런 제약이 없는 완전히 열려 있는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성체 현존은 본질적으로 성찬의 희생 제사와 친교의 식사를 거행하기 위한 은총이다. 성체 현존을 결코 성찬 거행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과 따로 생각하거나 공경해서는 안 된다. 실재적 현존에 대한 공경은 희생 제사의 봉헌과 영성체를 위한 준비이다. 또한 성체 현존의 유효성은 희생 제사와 식사가 거행된 다음, 그 희생 제사와 식사에서 흘러나온다. 다시 말하여, 성체 현존은 거행의 입문인 동시에 그 거행의 열매이다.
당신 현존에 대한 공경을 발전시키고자 하신 그리스도의 뜻은, 그분께서 마지막으로 지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하신 약속에서 더욱 특별히 드러난다. 마태오 복음서를 마무리하는 이 약속은 독특한 힘을 지닌다. 이는 앞서 마태오 복음 1장 23절에 인용된 하느님의 이름,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인 임마누엘을 암시하고 있다. 이 이름은, 당신께서 제자들의 눈앞에 없을 때에 대한 스승의 염려를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재로 제자들이 슬퍼하리라는 것을 아시고 지속적인 현존을 보장해 주신다. 또한 특별히 ‘너희와 함께’라는 말씀을 덧붙이심으로써, 그것이 그들에게서 결코 떨어지지 않고 영원히 함께하는 현존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 두신다. 이로써,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위격과 떨어질 수 없게 결합되는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은 그들의 전 생애와 함께하는 현존으로서 ‘언제나’ 지속될 것이라고 밝히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인류의 역사가 끝나는 날에야 비로소 끝나게 될, 모든 민족의 복음화라는 위대한 사명을 안고 당신 제자들과 언제나 함께하리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 주신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과 맺고자 하신 지속적인 친교를 통하여 이러한 현존을 보증하려 하셨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체성사 제정을 통하여 직접 제자들의 재량에 맡기신 그 현존을 그들에게 주려 하셨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그분께서 인류와 맺고자 하신 친교는 성사적 측면을 지녔으므로, 그들을 위하여 주려 하신 그 현존 역시 명백히 성사적 측면을 지닌다. 또한 이는 틀림없이 성찬례를 통하여 실현될 것이다. 이토록 모든 이에게 너무도 친밀한 현존, 세상 끝 날까지 날마다 함께할 현존은 성찬례를 통하여 가장 적합하게 실현된다.
최후의 만찬에서 처음으로 축성의 말씀을 선포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의 현존이 인류의 운명을 바꾸어 놓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이 당신의 살을 이상적인 자양분으로 인정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계셨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당신께 이끌어들이시고(요한 12,32 참조), 성찬을 통하여 모든 신자가 드리는 공경의 중심이 되시며,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좀 더 고요한 가운데 예배를 드리고 관상을 통해 친교를 맺을 기회를 주려 하셨다.


실재적 현존의 핵심 역할

수세기를 따라 내려오면서 실재적 현존에 대한 공경은 성찬의 신비의 풍요로움에 대한 인식이 커지면서 함께 발전하였다.
이러한 공경은 희생 제사와 성찬의 식사 거행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성사 봉헌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사람들이 더 잘 깨닫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러한 공경은 성체 안에 계신 구세주의 위격에 더 많은 관심을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일부 공경의 표현에서 신자들이 열정적인 흠숭으로 성찬의 거룩한 선물에 대한 감사를 나타내고자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최후 만찬에서 성찬례 제정 때에 이러한 반응을 바라셨고, 당신 현존의 효력을 깨닫게 해 줄 공경 행위를 불러일으키고자 하셨다는 사실을 언급해야 한다.
이 현존은 믿음과 사랑에 대한 호소이며, 부활로써 세워진 새 성전과 결부되어 있는 현존으로서 그리스도교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성찬례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1고린 11,26) 우리를 그리스도의 수난과 결합해 준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현존은 희망의 샘인 것이다.


동방 교회의 성체 공경

동방 교회에서는 성체 공경이 전혀 없었다. 라틴 교회가 성찬례 거행 동안만이 아니라 이와 별도로 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실재적 현존에 대한 공경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역사적 조건들이 동방 교회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모든 전통은 그 고유한 영감과 예법과 관습에 따라 스스로를 표현할 권리를 지닌다. 실제로, 공의회의 동방 가톨릭 교회들에 관한 교령이 밝히고 있듯이, 교회의 다양한 예법들 사이에서 “놀라운 친교가 왕성하게 이루어져 교회 안의 다양성이 교회 일치를 결코 해치지 않고 오히려 그 일치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가톨릭 교회는 개별 교회나 예법의 전통을 각기 온전하게 보존한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동방 가톨릭 교회들에 관한 교령 「동방 교회들」[Orientalium Ecclesiarum], 2항). 마찬가지로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천명하였듯이, 교회는 모든 예법과 모든 전통, 모든 영적 유산에 대하여 “같은 권리를 누리고 같은 의무를 지닌다.”(같은 곳, 3항)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나 동방 교회에서 미사와 별도로 이루어지는 성체 공경의 전통(성시간, 성체 강복, 성체 행렬 등)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이들 교회들은 (로마 주교와 친교를 이루는 교회들과 완전한 친교 안에 있지 않은 교회들 모두) 거룩한 전례 거행 밖에서도 성체에 대한 지극한 공경심을 길러 왔다.
전통적으로, 이 교회들은 특히 위격적 현존의 ‘준성사’로 간주되는 성화상에 대한 외적 공경에 더 치중하였다. 이들 성화상에 나타나는 얼굴(특히 그리스도의 얼굴)이나 구원 역사의 사건들(특히 그리스도의 신비와 하느님의 어머니의 신비)은, 성찬례 거행과 일치하며, 또한 전례력에 엄격히 맞추어져 신자들에게 거행되는 신비를 드러내 주고, 그 원형을 본받도록 이끈다. 여기에서 제7차 세계 공의회(성상에 관한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이렇게 가르친다.

“이러한 성화상을 관상하면 할수록 그 실재 인물들을 더욱더 기억하게 되고 그들을 더욱더 갈망하게 되며, 그들에게 입맞춤으로써 그들을 존경하고 흠숭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다.…… 성화상에 대한 공경은 실제로 거기에 나타나 있는 분에 대한 공경이고, 성화상을 공경하는 사람은 거기에 그려진 인물의 실재를 공경하는 것이다”(Mansi, 13, 482).

성찬례는 탁월한 성화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성찬례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eikona)”(골로 1,15)이신 분의 성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퍼져 있는 분열은 크나큰 고통의 씨앗이다. 교회 생활과 일치의 성사의 “핵심이며 정점인” 성찬례에 함께 참여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찬례는 일치를 표현하는 동시에 은총을 전달한다. 일치의 표현인 성사 교류는(communicatio in sacris) 불가능하다. 교회의 권위가 결정한 구체적인 상황에서만 은총의 수단으로서 성사 교류를 허락할 수 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Unitatis Redintegratio], 8항 참조).
동방 정교회들은 대개 사도 계승 덕택에 참된 성사들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교회 권위의 지침에 따라, 특정한 상황에서 성사 교류는 허용될 뿐만 아니라 적극 권장되고 있다(같은 곳, 15항 참조).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개신교 전통의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은 성체 신비 본연의 완전한 실체를 보존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성찬례에 대한 공동 참여가 불가능하다. 성사들과 교회의 직무에 관한 교리를 대화의 주제로 삼아야 한다(같은 곳, 22항 참조). 실제로, 이미 일치를 향한 뜻 깊은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님의 한 식탁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열렬한 기도 지향이 되어야 한다.


성체 대회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히 그리스도교 제삼천년기를 맞이하도록, 2000년 대희년은 그리스도인들을 북돋워 새로운 눈으로 하느님의 강생의 신비를 바라보게 한다. 나자렛의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의 삼위일체적 신비를 드러내시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사람이 되셨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 신비는 역사를 통하여 확대되었다. 모든 시대에 걸쳐 인간은, 하느님께서 십자가 위의 죽음이라는 지고한 행위로 신성을 내어 주실 만큼 그토록 강렬한 사랑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자문해 왔다. 이 사건은 과거 사실에 그치지 않고, 성찬례를 매개로 하여 세상 끝 날까지 날마다 재현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는 예수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어 하느님과 화해하게 하시고 하느님과 생명의 친교를 나누게 해 주신다.
따라서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대희년 기간에 세계성체대회를 거행하기를 바라셨음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교황 교서 「제삼천년기」(Tertio Millennio Adveniente)에서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시므로, 교회와 세계 안에 살아 계시고 구원하시는 그분의 현존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대희년을 계기로 세계성체대회가 로마에서 개최될 것입니다. 2000년은 열렬한 성찬의 해가 될 것입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20세기 전에 마리아의 태중에서 육신을 취하셨던 구세주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적 생명의 원천으로서 인류에게 계속하여 내어 주십니다”(55항).

그러므로 성년은 세계성체대회에서 그 정점에 이르게 된다. 성체 신비의 거행이 교회 생활 전체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성년과 세계성체대회는 다른 두 행사가 아니라 서로에게 빛이 되는 하나의 동일한 행사로서 각각 충만히 거행될 것이다. 
세계성체대회는 대희년 중반에, 베드로와 바오로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가장 숭고하게 증언한 그 도시에서 일정 기간 열리게 될 것이다. 우리 눈앞에 그리스도교 새 천년기의 문이 활짝 열렸다. 이 성체 대회는 사람들의 다양한 내적 요구에 확신을 가지고 응답할 수 있도록, 더욱 일관된 신앙의 증언을 요구한다. 자매 교회들에 대한 고유의 특수한 사명을 잘 알고 있는 로마 교회는 교황 성하의 요청을 받아 성체 대회를 거행함으로써, 완전히 숨겨진 하느님의 섭리의 계획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직 로마 교회에만 맡기신 그 사명에 다시 한 번 충실할 것을 표현하여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성체 대회를, 새로운 복음화를 통하여 자신들의 사명에 언제나 부응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을 길어 올리는 행사로 거행하도록 부름 받았다. 대희년 기간에 순례자들은 성찬례가 베푸는 풍부한 은총을 모아들일 수 있어야 하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시리라는 기대를 안고 커다란 희망에 마음을 열어야 할 것이다.

 

제9장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성찬례


그리스도와 이루는 긴밀한 결합

성찬의 첫 효과는 예수님과 더욱 긴밀하게 결합하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음식으로 신자들 개개인 안에 들어가시어 신자들과 지극히 깊은 유대를 이루시고 그들의 내면생활 전체를 변화시키신다.
예수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한 6,56)라고 선포하신다. 그러므로 성찬의 목적은 일시적인 결합이 아니라 영원한 결합이다. 영성체로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시는 사람은 영원히 지속될 친교를 누리게 된다.
최후의 만찬에서 은총 생명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포도 나무로 규정하신다. 가지들이 해야 할 일은 포도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마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요구와 경고를 따르면 무엇보다 먼저 생명의 풍부한 결실을 보장받게 된다. “포도 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나에게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요한 15,4).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5). 그러나 풍부한 결실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지 유일한 목표가 아니다. 그리스도께 결합되어 ‘머무르는 것’,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듯이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그 자체로 추구하여야 하는 목표이다. 바오로 성인의 예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열망, 적어도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분을 믿는 사람의 근본적인 열망임을 보여 준다. 바오로는 다음 세상에서 누릴 행복에 대한 자신의 바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필립 1,23).
성찬례는 현재 생활에서 이러한 열망에 답할 수 있다. 성찬은 그리스도와 맺는 친교의 식사, 다시 말하여 그분과 일치를 이루는 식사, 우리의 전 존재와 관련된 식사로서,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듯 신자들이 그분 안에 머무를 수 있게 해 준다.


성찬례를 거행하는
공동체 안에 계신 성모님의 현존

성체와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체험

교회의 영혼인 성찬례는 큰 주교좌성당뿐 아니라 작고 가난한 선교 지역 성당들의 살아 있는 심장이다. 그러나 신자들의 신심은 성체와 더불어 언제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모습을 향하고 있다. 이는 성모 마리아께서 성찬례를 거행하는 공동체 안에서 당신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성모님께서는 마치 성체성사로 얻는 영적 자양분과 영적 친교의 필요성을 강조하시려는 듯이 성체의 그리스도에 대하여 본질적이고 지속적인 언급을 하신다. 동정 마리아께서는 신자들을 성체로 인도하는 은혜로운 임무를 맡으신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는 성모 순례지와 성지에서는 모든 것이 성체에 집중된다. 성체야말로 모든 성모 신심과 성모 영성의 원천이며 정점이기 때문이다.

성서적 토대

성찬례를 거행하는 공동체 안에 계시는 성모님의 현존은 ‘가톨릭만의 고유한 특징’인가? 아니면 성서에 근거를 둔 것인가?
언뜻 보기에 성서에는 이 주제와 간접적으로 관련된 구절들만 있는 듯하다. 예를 들면,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였다거나(1고린 11,16-20 참조) 빵을 나누었다는(사도 2,42-47; 20,7 참조) 구절들에서, 성모님께서 사도들이 집전하는 성찬례에 참여하시어 공동체 생활을 함께하셨을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또 다른 문제는 성모님께서 최후의 만찬에 참석하셨는지의 여부이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분의 참석을 배제할 수 없다. (1)요한 복음 19장 27절에 따르면, 성모님께서는 분명히 그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계셨다. (2)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과월절 만찬에 대한 유다인들의 관습에 따르면, 등불을 켜는 일은 그 가정의 어머니가 맡는다. 따라서 최후의 만찬 때에 이 의무를 이행하신 분은 성모님이셨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가가 강조하듯이,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은 결정적으로 성찬례를 상징한다(루가 2,7.12.16). 일반적인 어원에 따르면 ‘베들레헴’은 ‘빵집’이라는 의미이며, 성모님께서는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의 훌륭한 ‘집’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아기를 눕힌 구유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요한이 제공해 주는 훨씬 더 의미 있고 타당한 자료가 있는데, 성모님께서 예수님 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계시는 두 장면이 그것으로서, 성찬례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상징적이다. 하나는 요한 복음 6장의 빵의 기적 이야기와 비교하여 이해하여야 하는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요한 2장)이고, 다른 하나는 요한 복음 19장에 나오는 해골산 이야기이다.
포도주의 표징은, 성모님께서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하고 이르심으로써 결정적으로 먼저 사용하신 것이다. 가나는 빵의 표징을 포함한 표징들의 시작이고, 성찬례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성사 ‘경륜’의 시작이다.
이 새로운 경륜에서, 성모님께서는 ‘어머니’가 아니라 ‘여자’로 불리신다. 이 구절은,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서 새로 탄생하는 ‘가정의 창시자’(창세기 2,23의 “여자” - 새 번역), 곧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로 성장하는 교회 공동체라는 가정의 창시자가 되심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부활 이후 교회 공동체에서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 맡으신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은 표징에 대한 기록뿐 아니라 수난에 대한 기록에서도 마리아라는 인물이 지닌 성찬례의 차원을 제시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한다. 요한 복음 19장 25-2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모님께 제자를, 제자에게 성모님을 맡기신다. 이는 예수님의 효성스러운 행위일 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계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신비로운 모성을 지니신 분이 된다. 여기에서도 그분께서는 다시 한 번 ‘여자’로 불리심으로써 그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탄생, 곧 그리스도의 찔린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교회의 시작이 강조된다. 그리스도의 찔린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 바로 교회를 성사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이다.
그리스도의 역사적 구원의 현존인 교회를 통하여 시작된 새로운 성사 경륜 안에서 성모 마리아께서는 어머니로 남아 계신다. 성모님께서 처음에는 단지 성자의 어머니이셨지만, 이제는 교회의 어머니시기도 하다. 성모님께서 처음에는 육신의 어머니셨지만, 이제는 영성의 어머니이시다. 해골산 위에서, 예수님의 어머니께서는 제자들의 어머니가 되신다.
성모님의 육체적인 모성은 말만이 아니라 지극히 실재적인 방식으로, 곧 그분 아드님의 육체적인 죽음으로 사라지는 듯하지만 영적인 모성이 이를 계승하여, 성모 마리아께서는 제자들의 어머니가 되신다. 처음에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신 분은 예수님이셨지만, 이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당신 아드님에게서 새로운 탄생을 받아들이시는 분은 동정 마리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더 이상 ‘어머니’가 아니라 ‘여자’라 부르신다. 그분이 남자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창세 2,23 참조 - 새 번역). 성모님과 하느님이신 당신 아드님의 관계에서 이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상상할 수 없다.
예루살렘이라는 곳에서, 하느님께서 그 울타리와 성전 안으로 불러 모으신 흩어진 이들의 어머니인 ‘시온의 딸’이, 예수님께서 새 계약의 성전 안으로 불러 모으신 흩어진 자녀들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가 된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받으시고자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리신 피와 몸이 새 계약의 성전이 된다. 새 계약의 경륜 안에서 성모 마리아께서는 성찬의 그리스도에게서 성사를 통하여 생명을 얻는 새 예루살렘, 곧 교회의 구현이 되신다.
따라서 성모님께서는 강생과 교회의 성사 경륜에 모두 현존하시며 거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다. 두 경우 모두, 그분께서는 믿음과 바람과 사랑으로 “예.” 하고 순종하셨다. 두 경우 모두,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새로운 탄생의 설립자가 되신다. 첫 번째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의 탄생,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성장하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교회 공동체의 탄생이 그것이다.
구원의 성사인 교회는 본질적으로 성찬의 교회일 뿐만 아니라 존재적으로는 마리아의 특성을 띤다.

성찬례로 이끄시는 성모 마리아

따라서 교회는 성찬을 거행할 때마다 주님의 어머님의 전구를 되풀이하여 간청한다. 미사 때마다, 성모님께서는 교회의 가장 존귀하신 구성원으로서 과거의 강생과 십자가 사건에 동의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공덕을 베풀어 주시고 현재의 영광스러운 어머니로서 전구해 주신다(바오로 6세, 교황 권고 「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 20항 참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Redemp-toris Mater)에서는, “그리스도교 백성들은 동정 마리아에게서 참사람으로 나신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성찬의 전례 ─ 구원의 신비를 기념하는 전례 ─ 에서 마리아의 모성을 특별히 이해하고 체험한다.”(44항)라고 선포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교 백성들의 신앙심은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신심과 성찬 전례 사이의 깊은 관계를 항상 올바로 이해해 왔다. 이것은 서방과 동방의 전례에서, 수도 단체들의 전통에서, 젊은이들의 영성 운동을 포함하는 현대의 다양한 영성 운동에서 그리고 마리아 순례지의 사목 등에서 역력히 볼 수 있는 사실이다. 마리아께서는 신자들을 성체성사로 이끄신다”(같은 곳, 44항).

신자들을 예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게 하는 성모님의 이러한 은혜로운 임무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치하여 강력한 증언의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은총의 선물이며, 어머니로서 그들을 이끌어 예수님과 성사적 친교를 맺게 해 준다.
 

생명의 성장을 위한 조건

친교의 식사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 안에 당신의 생명을 자라게 하는 통상적인 수단으로 제정하신 것으로서, 비록 그분의 몸과 피로 주시는 지극히 은혜로운 선물이지만, 결코 사치스럽지는 않다. 
미래의 성찬례를 예고하는 빵의 기적이 있기 전에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무엇을 가장 염려하시는지 말씀하셨다. “이 많은 사람들이 벌써 사흘이나 나와 함께 지냈는데 이제 먹을 것이 없으니 참 보기에 안 됐다. 그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낸다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그중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마르 8,2-3). 예수님께서 청중들에게 주실 그 빵은 그들을 허기져 쓰러지지 않게 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었다. 이처럼 기적은 명백한 필요에 대한 응답이다.
그 기적이 있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생명을 위한 성찬의 필요성을 분명히 표명하신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요한 6,53).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모든 권위가 담긴 장엄한 선언이다. 예수님께서는 성찬례가 그리스도인 생활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보여 주신다. 성찬례는 참생명을 얻기 위한 조건이다. 14세기 비잔틴의 신학자 니콜라스 카바실라스는 이 구절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만찬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분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한 6,56)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데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또한 어떤 은혜가 우리를 비켜 가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사는데, 우리가 다른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분께서 우리 안에 사시며, 그분은 우리의 거처이십니다. 이러한 거처를 가졌으니 우리는 얼마나 축복받았습니까!
…… 우리의 영혼을 비추는 것은 광선이 아니라 태양 그 자체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아가고,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는 그분과 한마음이 됩니다.”

결과는 어떠한가? 더 우수한 것이 열등한 것을 이기고, 하느님의 것이 인간의 것을 지배하며, 바오로가 부활에 관하여 한 말, 곧 “죽음이 생명에게 삼켜져 없어지게 된다.”(2고린 5,4)는 말과 또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이다.”(갈라 2,20)라고 한 말이 이루어진다.21)
같은 책 뒷부분에서 니콜라스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한 나무의 가지가 다른 나무의 줄기에 접목된 것에 비유한다. 그 가지의 특성은 새 나무의 특성으로 대체되고, 접목된 가지에서는 새 나무의 열매가 맺힌다. 이처럼 우리 자신도 그리스도께 붙어 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생명으로 살아가고 그분의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바로 영성체의 효력이며, 우리는 그 필요성을 분명히 알고 있다(같은 곳).
이 필요성은 교회의 권위를 통하여 실천에 옮겨졌다.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년)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분별력을 가질 나이에 이르면 적어도 부활절에는 자기의 모든 죄를 고백한 다음 성체를 받아 모셔야 한다(DS 812).
이 규정은 이성을 사용할 나이에 이른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는 영성체의 의무가 없다고 가르친다. 세례대에서 다시 태어나(디도 3,5 참조)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어린이들은 그 나이에는 그들이 받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은총을 상실하지 않는다.”(DS 1730.1734)라고 가르친다.
고해성사를 위해서든 영성체를 위해서든, 이성을 사용할 나이란 어린이가 사리 분별을 하기 시작하는 나이로서, 7세 정도의 나이를 가리킨다(DS 3530).
교황 비오 10세께서는 자주, 심지어 날마다 성체를 받아 모실 것을 권장하였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교황께서는, 신자들이 성체를 공경하는 마음에서 스스로 성체를 받아 모시기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느껴 영성체 횟수를 줄임으로써 예수님과 거리를 두려는 사고방식에 반대하셨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의식이 들면 분명히 고해성사를 받아야 하지만, 용서를 받은 다음에 신자가 영성체를 삼갈 이유는 전혀 없다.

“모든 신자가 날마다 영성체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가 바라는 가장 큰 이유는 성체를 통하여 하느님께 결합된 신자들이 거기에서 자신의 욕구를 이겨 낼 힘을 얻고, 날마다 저지르는 작은 잘못들을 정화하며, 인간의 나약함으로 더 중대한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영성체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영광과 공경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공덕에 대하여 보상이나 보답을 받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체를 ‘해독제’라고 부른다. 우리가 날마다 저지르는 잘못에서 우리를 구해 주고 죽을죄에서 지켜 주기 때문이다”(DS 3375).

그러므로 “자주 그리고 날마다 하는 영성체는 품계나 조건을 막론하고 모든 신자가 다가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은총의 상태에 있고 올바르고 경건한 지향을 가지고 거룩한 식탁에 나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도 영성체를 거부당하지 말아야 한다”(DS 3379).
실제로 매일의 영성체는 초대 교회에서 실천하던 것이다. 사도행전의 증언에 따르면(사도 2,46 참조), 날마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은 성찬의 특징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말씀하신 예수님의 권고는 날마다 하는 영성체에 대한 언급이라고 해석하였다.
이처럼 날마다 하는 영성체는, 실제로는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이 생활 여건과 상황 때문에 실천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결코 사려져서는 안 될 하나의 이상이다.
그러나 주일 영성체는 더욱 실천하기가 쉽다. 신자들의 주일 미사 참석에 대한 의무 규정은 성찬의 식탁으로 다가오라는 초대가 담겨 있다. 성찬 거행에 대한 참여는 영성체로 마무리되지 않는다면 완전할 수 없다. 미사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이 규정을 이행하는 것이지만, 성찬은 오로지 성찬의 식탁에서만 온전히 나눌 수 있다.


더 고귀한 힘의 원천인 영성체

사람들은 식사를 통하여 살아가고 활동하는 데 필요한 힘을 얻는다. 성찬을 제정하시며, 예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 생활 전체의 발전에 필요한 힘을 주고자 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도덕 분야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체험한다. 사람들은 중대한 결심을 한 다음 이를 지키지 못할 때 자신의 나약함을 느낀다. 인간의 의지는 제아무리 확고부동하더라도 어려움에 빠지면 힘없이 무너질 수 있다. 복음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의 예를 제시해 준다. 그들은 제 딴에는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스승께 충성을 약속하였지만,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던 순간에 모두 달아나 버렸다. 그들의 확고한 결심은 결국 그들 자신을 드러내야 했던 바로 그 순간에 허물어져 버린 것이다.
이러한 나약함은 오로지 하느님의 도움으로 치유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나약함을 극복하게 해 줄 더 상위의 힘을 필요로 한다. 예수님께서는 성찬을 통하여 일상적으로 이 힘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고자 하셨다. 또한 그분께서는 외적인 도움을 주시거나 단순히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는 자극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인적인 변화를 일으키심으로써 이 힘을 전달하신다. 
실제로 성찬례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양분이 되심으로써 나약한 사람에게 당신의 힘을 불어넣어 주신다. 우리가 생명 유지를 위하여 섭취하는 육체의 음식과는 달리, 성찬의 음식은 우리 안에 흡수되어 우리를 변화시켜 더 고귀한 생명으로 이끌어 준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구세주께 “주님께서 당신 살의 음식으로 저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저로 변하십니다.”22) 하고 말씀드린다.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동화시키는 힘을 지니시고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어, 당신의 몸으로 자양분을 섭취하는 사람들을 변화시키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힘을 전해 주신다.
성찬례는 모든 나약한 상황에 대응한다. 유혹 앞에서 무력해지는 것을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성찬의 음식은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의 유혹을 물리치신 그 순간에 지니셨던 힘을 보장하여 준다. 성찬례는 자신이 받은 사명을 이행할 때 발생하는 장애물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받은 과업을 흔들림 없이 꾸준히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 준다.
앞서 인용한 비오 10세의 권고에 따라, 성찬례는 흠 없고 완벽한 이들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작고 나약한 이들을 위한 힘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신자들이 자신의 나약함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들은 성찬례 안에서 영적인 힘을 구하도록 요구받는다. 죄를 지은 사람이 일단 자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청했다면, 그가 죄의식 때문에 영성체를 단념하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확신은 성체의 그리스도께서 신앙인들에게 전해 주고자 하신 그 힘에 희망을 걸기에 더할 나위 없는 이유가 된다. 구원 활동 전체에 힘을 불어넣어 주는 지극히 명확한 원리, 곧 가장 약한 이들에게 자신을 낮춰 그들을 들어 높이는 자비의 미덕이 성찬례에서 드러난다. 사실 그 식사의 힘은 특별히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사랑의 원천인 성찬

그리스도께서 성찬례가 사랑의 샘이 되기를 바라셨다는 징표는, 사랑의 새 계명을 선포하시려고 선택하신 때가 최후의 만찬이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성찬 제정 때에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선포하셨다. 성찬이 그 계명을 지킬 수 있는 가능성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성찬례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서로 사랑할 수 있게 하셨다.
사랑에 필요한 마음가짐 가운데에는 자기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자세가 있다. 그러나 복음서의 한 구절은 성찬례에 참여하기 전에도 이러한 자세를 요구하는 것 같다는 사실에서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 5,23-24).
이는 우리가 예물 봉헌에 요구되는 사랑의 자세에 관하여 알려 주는 인상적인 대목이다. 예물을 바치려면,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와 화해하려고 노력하고 진실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불화가 다른 이의 탓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노력을 하지 않는 데 대하여 어떠한 핑계도 댈 수 없다.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내가 형제자매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형제자매들이 내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이다. 불화의 탓이 전적으로 남에게 있을 때조차도 내가 먼저 화해를 시도하여야 한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예물을 바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권고에서는 언제나 교훈의 근본적인 의미를 강조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뜻은, 모든 사람과, 심지어 단 한 번 약간의 해를 끼친 사람들과도 화목하게 지내지 못한 사람이 바치는 예물은 하느님 보시기에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진심으로 화목하기를 바라는 이들이 바치는 예물이라면 하느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이다. 그들은 성찬례에 참여하여 영성체를 통하여 진심으로 바라는 화해에 필요한 사랑의 힘을 그리스도께 청할 수 있다. 구세주의 봉헌에 자신의 봉헌을 결합시켜, 그들은 용서와 일치에 대한 완전한 원의를 불러일으키는 은총을 성찬례에서 기대할 수 있다.
여기에 덧붙일 것은, 최후 만찬에서 사도들이 식탁에서 누구를 제일 높게 볼 것이냐는 문제로 옥신각신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나서서 직접 다툼을 해결해 주셨으며,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겸손한 섬김의 표양을 보여 주신 다음, 성찬례를 사도들에게 맡기시며 장차 평화와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자세를 가르쳐 주셨다는 것이다.
희생 제사의 식사인 성찬례는 참석자들에게 그 희생 제사에 깃든 사랑을 전달해 준다. 그 사랑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끼지 않는 영웅적인 행위의 절정에 이른 사랑이다.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내어 준 예수님의 몸과 피는 희생 제물의 온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러므로 성찬의 식사로 자라나고 고무되는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자기 비움의 자세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저 없이 희생을 요구한다. “앙갚음하지 마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마태 5,39-41). 자기 뜻을 강요하거나 상처를 주는 사람에게 반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관용을 베풀 수 있는 다른 반응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고통이 따를 수 있다. 이 경우에 그리스도께서는 성찬례에 대하여 말씀하시지는 않지만, 가능한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는 사랑의 자세를 고취하고자 하셨으며, 성찬례에서 흘러나오는 영적인 힘에 의지하셨다.
성찬례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당신이 그들을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서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제자들에게 주시고자 하셨다면, 당신의 몸과 피를 주심으로써 어떠한 인간 조건에서도 효과가 있는 무한한 사랑의 힘을 그들에게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바오로처럼 열정적인 찬미의 말로 사랑의 절대적 우수성을 전달하실 필요가 없으셨으며,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고린 13,7) 하고 말씀하실 필요도 없으셨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했듯이”라는 말씀으로 본보기를 제시하심으로써, 당신의 삶을 사랑의 본보기, 참된 사랑의 찬미가로 제시하시며 인간 생활에서 모든 사랑의 자세의 원천이 되셨다. 그분의 위격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사랑의 계시이며, 이 위격은 성찬례에서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인간의 마음에 사랑이 자라게 한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성찬례 거행과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덕의 의무 사이의 긴밀한 유대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크리소스토모에 따르면, 주님의 식탁에 함께하려면 어떠한 불일치도 용납되지 않는다. “유다가 이 식탁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라!” 하고 설교자는 외친다. 또한 황금 그릇으로 식탁을 꾸민다고 품위가 충분히 서는 것도 아니다.

“그 식탁은 은 식탁이 아니며,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당신 피의 잔도 황금 잔이 아닙니다. ……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공경하고자 하십니까? 그러면, 그분을 헐벗게 하지 마십시오. 비단옷을 차려 입으신 이곳 성당의 그리스도는 공경하면서, 바깥에서 추위와 헐벗음으로 죽어 가는 주님을 못 본 체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신 분께서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라고 하시며,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배우고, 또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대로 그분을 공경하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여러분의 재산을 나누어 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금으로 된 장신구가 아니라 황금처럼 빛나는 영혼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식탁은 황금의 잔으로 가득 차 있는데 정작 그리스도께서는 굶주림으로 돌아가신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먼저 배고픈 이들을 배불리 먹이고 난 다음 그 나머지 것으로 그분의 제단을 장식하십시오!”23)


기쁨의 샘인 성찬의 양식 

초기 교회의 ‘빵 나눔’, 곧 성찬 거행에 대한 첫 언급은 식사의 두드러진 특징인 기쁨과 소박한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사도 2,46 참조).
따라서 성찬례에 수반되는 이러한 기쁨은 전승에서 자주 기록되고 강조되었다.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은 이를 특별한 방식으로 묘사한다. “영혼은 영적 기쁨 안에서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자애로움에 도취되는 것입니다.”24)
식사는 만족감을 낳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살과 생명을 내어 주시는 것에 대한 성사적 표징으로 식사를 하심으로써 장차 그리스도인의 삶의 분위기를 형성하게 될 영적 만족을 특별히 강조하셨다.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선택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실 것으로서 당신의 피를 내어 주시어 영적 도취감을 낳으려 하셨고, 이러한 당신의 뜻을 우리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 성찬의 잔은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잔이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가나의 기적은 성찬례에 대한 첫 번째 예고, 아직은 매우 조심스러운 예고이다. 이 기적으로 우리는 혼인 잔치의 기쁨을 넘어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가져다주시는 풍성한 기쁨을 미리 깨닫게 된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푸는 것에 비유한 이야기에서(마태 22,2 참조) 다시 한 번 잔치의 표상을 발견한다. 최후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게 될 것이다.”(루가 22,30) 하고 약속하셨다.
성찬의 잔치는 하늘나라의 잔치, 곧 한밤중에 돌아와 자기 종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서 시중을 들어 주는 주인처럼(루가 12,37 참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리라고 선포하시면서 말씀하신 그 잔치이다. 그러므로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간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비유(마태 25,1-13 참조)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늘나라의 잔치에서 중앙에 앉으실 분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성찬례에서 우리는 이 잔치를 미리 맛보게 된다. 성찬의 식사는 혼인 잔치인 계약을 기념하는 식사이다. 이는 희생 제사와 연결된다. 이 희생 제사는 기억하면 슬플 수도 있지만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나라에서 영광의 상태로 계시면서, 성찬례를 통하여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신다. 당신의 기쁨을 풍성히 부어 주시려고 당신 자신을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내어 주시는 것이다.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신’(요한 6,62 참조) 사람의 아들이 지상에 천상 기쁨을 쏟아 부어 주시니 그분이야말로 천상 기쁨의 원천이 아니실 수 없다. 성찬의 음식은 끊임없이 기쁨을 자라게 하고, 슬픔도 구원 사건의 완성을 특징지은 기쁨으로 바꾸어 놓는다.
모든 성찬례 거행은 교회와 인류에게 새로운 기쁨의 동기가 된다. 성찬례는 기쁨을 통하여 온갖 시련과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복음화 활동을 진정으로 발전시킨다. 이 기쁨은 혼자만 고이 간직하여야 할 기쁨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모든 이에게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수록 더욱 커지는 기쁨이다.
또한 우리는 성찬의 종말론적 가치를 드러내는 기쁨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기쁨은 하늘나라에서 누릴 기쁨의 전조로서, 아버지의 궁극적인 뜻을 드러낸다. 아버지께서는 인류에게 최상의 기쁨을 보장해 주시고자 모든 구원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성찬례는 하느님을 맛보게 하는 식사이다. 거기에서 신자들은 하느님께 맛 들이게 되고 하느님을 소유하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된다. 성찬은 어떠한 기쁨도 하늘에서 오는 그 기쁨에 비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충만한 행복을 누리시는 분만이 인간에게 그러한 충만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하실 수 있다. 성찬례는 단지 일부분만 맛보게 해 줄 뿐이다. 그러나 성찬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 알 수 있는 보이지 않는 현존을 통하여 그리스도 자신을 줌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성찬의 식사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알려 주려고 몸의 표상을 이용한 바오로 성인은 그 몸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성찬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1고린 10,17).
“빵은 하나이고……”라는 말은 그 문맥 안에서 잘 이해하여야 하는 말이다. 이 말 자체는, 성찬의 식사는 그냥 같은 빵을 먹는 것이고, 그 빵이 하나라는 것은 그 식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토대가 됨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바오로는 하나라는 것은 실제로 음식으로 주어진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라는 의미임을 설명하였다. “우리가 그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1고린 10,16) 잔은 모든 이에게 주어진다. 이 잔을 마시는 사람들이 우선 서로 하나가 됨으로써 무엇보다 먼저 그들 사이에 친교가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찬례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피와 맺어지는 친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는 그리스도의 몸처럼 친교의 원천이다. 성찬 제정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바오로는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이들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아야’(1고린 11,29 참조) 한다고 덧붙여 말한다. 곧 신앙의 분별력을 통하여 실제로 자신이 먹고 마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이 식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 어떤 경우에는 비난받아 마땅할 수 있는 그러한 마음가짐에 대하여 주님의 몸과 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르지 않은 마음가짐으로 영성체하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에 책임을 져야 한다’(1고린 11,27 참조).
성찬의 식사에 이처럼 올바르지 않은 마음가짐으로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이루는 친교의 본질적인 목적에 위배되므로 심각한 일이다. 이는 참가자들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을 저해한다. 영성체는 바로 이러한 일치, 곧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확고한 일치를 이루게 하는 성향이 있다.
성찬례가 제정된 목적은 바로 그리스도의 신비체라 불리는 한 몸을 형성하고 성장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 식사에 함께하는 이들은 이 신비체의 성장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 신비체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성찬의 식사의 첫 결실은 바로 그리스도와 이루는 더욱 깊은 일치이다. 이는 그분의 몸, 그분의 피, 그분의 위격 안에서 이루어지는 친교의 결실이다. 그때 이와 분리될 수 없는 또 다른 열매를 맺는다. 곧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전 공동체, 곧 그분의 신비체, 전 교회, 그 개별 지체들과 이루는 더욱 깊은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결실은 사랑의 원천인 성찬의 식사의 속성과 관련하여 파악하여야 한다. 성찬례는 “사랑으로 자체를 완성해 나가는”(에페 4,16) ‘몸 전체’의 성장을 촉진한다. 성찬례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13,34 참조)라는 새 계명에 충실함으로써 그 몸의 모든 지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의 유대를 견고하게 한다. 성찬례는 상호 사랑의 모든 측면과 모든 태도를 성숙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럼으로써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지체는 “영양분을 받아 자라나고 사랑으로 자체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에페 4,16 참조).

 

결 론


대희년에는 하느님의 강생으로 드러난 사랑의 은총을 노래하는 삼위일체 찬미가가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다. 성찬의 신비에 대한 이 고찰을 찬미가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찬미가를 통하여 신자들이 믿음으로 성찬의 은총 안에 굳건히 머무르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아래의 찬미가에서 거룩한 찬미의 대상은 바로 성찬의 신비이다. 비록 인간의 언어에 한계가 있어서 하느님의 영광을 이루 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성찬례의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표징 안에 현존하시고 살아 계신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드리며 이 성찬의 신비를 기념하려 한다.

시온아, 구세주를 찬미하여라.
너의 인도자이시며 목자이신 주님께
찬미의 노래 불러 드려라.

너의 온 힘을 다하여 주님을 찬미하여라.
네 아무리 찬미하여도
다하지 못할 지고하신 분이시다.

살아 있는 빵, 생명을 주는 빵!
오늘 그 이름 노래 불러라.
찬미 노래 불러라.

거룩한 만찬의 식탁에서
열두 사도에게
참으로 실제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 분이시다.
찬미의 종을 울리고
기쁨의 잔치를 벌여라.
온 마음 모아 노래하여라.

오늘이 바로 잔칫날
처음으로 그 거룩한 상을 차린 날.

새 임금이 차린 이 상에서
새 율법의 새 파스카가
묵은 것을 벗어 버리도다.

낡은 시대는 새 시대에 길을 내주고
진리가 어둠을 몰아내며
빛이 밤을 흩어 버린다.

그리스도께서 당부하신 대로
그분께서 만찬에서 하신 일을
그분을 기억하며 다시 행하여라.

거룩한 성찬 제정의 가르침대로
축성된 빵과 포도주는
구원의 성체가 되고

그리스도인들의 믿음대로
빵은 살이 되고
포도주는 피가 되도다.

자연계의 질서를 초월하는 그 현상을
우리가 이해하거나 보지는 못해도
생생한 믿음으로 알 수 있나니

빵과 포도주의 형상은
사물이 아닌 표징
그 안에 놀라운 일이 감추어져 있도다.

살은 음식, 피는 음료
그리스도께서는 두 가지 형상 안에
온전히 현존하시는도다.

이를 받아 모시는 이는
갈리거나 쪼개지거나 나뉘지 않은
온전한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는 것이니

한 명이든 수천 명이든
아무리 많은 사람이 받아 모셔도
그 몸도 피도 처음 그대로
온전한 하나로 현존하는도다.

선한 이든 악한 이든
생명 아니면 죽음의
제비를 뽑으니

악한 이에게는 죽음을
선한 이에게는 생명을!
같은 것을 받아먹어도
그 결과는 참으로 다르나니

성체의 쪼개짐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억하라.
쪼개어진 각 부분이
그 전체를 담고 있다는 것을.

그 실재는 나뉘지 않고
단지 표징만 나뉠 뿐
그 표징이 나타내는 것의
상태도 능력도 약해지지 않나니.

나그네들의 양식이 된
천사들의 빵을 보아라.
개에게 던져 주는 빵이 아닌
자녀들의 참양식인 그 빵을.

희생 제물로 봉헌된 이사악
제물로 바쳐진 과월절의 어린양
우리 선조들에게 내려진 만나
이 예표들 안에 예언된

착한 목자이시며 참빵이신 예수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를 지켜 주시어
저희가 산 자의 땅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지상의 인간들을 길러 주시는 주님,
공동 상속인이며 거룩한 도성의 시민으로서
저희가 주님의 천상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아멘. 알렐루야!

 

<원문 The Encharist, Gift of Divine Life, prepared by The Theological-Historical Commission for the Great Jubilee of the Year 2000, New York: A Crossroad Publishing Company>

 

1. 「마태오 복음 강론」(Homiliae in Matthaeum), 50, 2, 『그리스 교부 총서』(PG) 58, 507
2. 『토마스 행전』 27장, ed. Erbetta, 2, 323
3. Letters, 63, no. 12항, trans. Rose Bernard Donna, Saint Cyprian: Letters, Fathers of the Church, Washingto, D.C.: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64, 211면.
4. Hymn on the Crucificxion, 3,2, ed. Lamy, 656.
5. 「마태오 복음 강론」, 25, 3, 『그리스 교부 총서』(PG) 57, 331.
6. Joachim Jeremias, Le parole dell’Ultima Cena, Brescia: Paideia, 1973 참조.
7. The Teaching of the Twelve Apostles, no.14; trans. James A. Kleist, Westerminster, Md.: Newman, 1948, 23면.
8. 성 유스티노, 「호교론」(Apologia), 66, 2, Thomas B. Falls, Washington, D.C.: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n Press, 1948, 105-106면.
9. C. Giraudo, La struttura letteraria della preghiefra eucharistica, Rome: Ponitifical Biblical Institute, 1981, 264면.
10. Constituzioni 39, ed. Metzger, SC 336, 151-217.
11. L. Godefroy, Dictionnaire de theologie catholique, 5, 1349.
12.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교리교육」(Catecheses), 4, 9, PG 33, 1104.
13. 성 암브로시오, PL 16, 439-440.
14. 트리엔트 공의회, 정경 제1조, DS 1751.
15. 트리엔트 공의회, 정경 제3조, DS 1753.
16. 27항, 『사도좌 관보』(AAS) 57(1965), 11면.
17. 27항, AAS 57(1965), 11면.
18.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거룩한 공의회」(Sacrosanctum Concilium), 6항; 트리엔트 공의회,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에 대한 교령(Decretum de Santissima Eucharistia), 제5장 인용.
19. AAS 39(1941), 68항.
20. AAS 49(1957), 370면.
21. Nicholas Cabasilas, The Life in Christ, trans. Carmino J. de Catanzaro, Crestwood, N.Y.: St. Vladimir’s Seminary Press, 1974, 115-116면.
22. 성 아우구스티노, 『고백록』(Confessiones), 제1권, 제7장, 10항.
23.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론」, 50, 2-4, PG 58, 508-509.
24.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3, 879, 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