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주교회의 문헌
1989-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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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들과의 대화: 사목 신학적 반성

종교들과의 대화

― 사목 신학적 반성 ―

 
“종교간의 대화에 관한 명제들”은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FABC)의 신학 자문위원회에 의해서 준비되었다. 위원회는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에 속한 모든 주교들의 모임에서 선출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글은 2년이 넘게 위원회의 회원들과 다른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자문을 토대로 작성되었고. 마침내 1987년 4월 싱가폴에서의 모임 중에 채택되었다. 이 명제들은 사목자들과 신학 전문가들의 보다 광범위한 공동체 안에서 지속적인 토론의 기초가 되기를 희망한다. 신학 자문위원회의 회원들은 이 글의 독자들로부터 종교간의 대화를 진작시킬 목적 하에서 기탄없는 관찰과 비판을 진심으로 기대한다.

 

서 문

0.1 대화는 인간 생활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차원이다. 인간만이 외부의 자극에 대해서 언어와 상징을 통하여 반응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응답할 수 있다. 이로써 그들은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의사 전달의 수단이 급격히 증가되고 신속해짐에 따라서 그것이 인간 상호간의 관계와 우정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반면에 인간 생활을 구성하는 상장적 체계들, 곧 타인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욕망과 연결된 언어와 문화와 종교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과 분열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평화와 우정을 지향하는 상징 체계들은 사람들을 그들의 공동 운명에 바탕을 둔 대화로 이끌어 서로의 인격을 받아들이고 상대방의 존엄성과 자유를 존중하도록 촉구한다. 종교는 이 과정에 있어서 특별한 역할을 담당한다. 왜냐하면 종교는 절대적인 가치들을 추구하고 있고 따라서 인간 역사 안에서 제한적이고 분열적인 요소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0.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종교들간의 대화를 강조하였다. “종교들 사이의 대화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모든 종교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하고 필요하다. 오늘의 종교와 신앙인들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초자연적 목적에 도달하고 자신의 진정한 성숙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서로 협력해야 할 사명과, 여러 문화들이 자체의 종교적이고 영신적인 가치들을 사회적 급변 안에서 보존할 수 있도록 도와줄 사명을 지니고 있다”(1984년 3월 3일 비그리스도교 사무국에서의 연설).

0.3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공동체, 그리고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그리로 부르시고 교회가 그곳을 위해 봉사하게 되는 바로 그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는 대화를 선교 사명의 본질적인 차원으로 삼는다. 성서에 소개된 하느님 백성의 이야기는 이 대화의 시작인 동시에 이 대화에 영감을 불러일으켜 주는 역할을 한다.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초대 그리스도교는 그 기원에 있어서나 역사적 성장 과정에 있어서나 여러 민족들로 구성된 복합체였다. 상이한 종교들과 문화적 전통들과의 만남과 대화는 이스라엘과 교회의 역사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0.4 팔레스티나 땅에 이주한 이스라엘은 새로운 현실들과 마주치고 새로운 문제들에 응답해야 했다. 그들은 가나안 민족과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모든 면에서 가나안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모방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만남은 신앙 고백문과 경신례와 계약의 법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신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만남의 궁극적인 결실로 이스라엘은 야훼를 새롭게 체험하고 지상의 현실들을 야훼께 대한 자신들의 신앙 안에서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되었다.

0.5 그리스도교가 유다이즘과 헬레니즘을 만났을 때 신약성서, 특히 바오로와 요한의 저서에 표현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사건과 교회의 모습은 새롭고 폭넓은 차원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0.6 바오로는 의식적으로, 유다인들을 얻기 위해서 유다인들에게는 유다인이 되었고 이방인들을 얻기 위해서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이 되었다(1고린 9,19-23). 리스트라에서의 설교(사도 14,25-27)와 아레오파고스 법정에서의 설교(사도 17,22-31)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발전시켜 이방인 종교 역사의 논리적 귀결로 삼는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로 인도되고. 이방 세계의 역사는 미지의 신의 자리를 그리스도교적 복음 선포에 내줌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0.7 헬라적 언어와 사상을 반영하는 요한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팔레스타나의 복음 전승과 헬라계 및 그 이상의 폭넓은 세계를 이어 주는 다리 역할을 하였다. 요한의 대화식 접근은 그 리스도 사건을 묘사하는 복음서의 서두에 잘 나와 있다(요한 1,1-18). 서두 전반부에서 요한은 “말씀”, “생명”, “빛”, “세상” 등과 같이 주변 종교들에 생소하지 않은 일반적 용어들을 사용하여 그리스도 사건을 묘사하고, 후반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은총”, “진리”, “하느님의 외아들” 등과 같은 그리스도교 특유의 용어들로써 그 사건을 묘사한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하느님 현존의 신비스러운 실재를 전달해 주는 “말씀”으로 표현함으로써 다른 종교 전통 안에서도 하느님이 스스로를 계시하신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요한이 그리스도 사건을 지역 교회의 체험 수준에 국한시키지 않고 보편적인 체험에로 끌어 올려 일반적 용어로 표현했다는 것은 요한의 교회가 주변의 종교적 전통들과 대화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0.8 지난 2천 년 동안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와 종교들을 만나 여러 차원에서 대화를 시도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 특별히 아시아 지역의 대 종교들 사이에서 교회는 매우 생소한 상황에 부딪치게 된다. 이 종교들은 부흥과 쇄신을 도모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교회가 다른 문화와 종교에 대하여 갖는 관계를 문젯거리로 삼지 않는다. 우리는 오히려 종교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복합적인 세계 안에서 교회의 위치와 역할이 과연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있다. 이렇게 변화된 상황은 오늘의 아시아 지역 교회의 본질과 선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문과 질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0.9 다음에 소개되는 명제들과 이들에 대한 해설들이 위의 질문들에 완전한 답변을 준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보다 명확한 토의를 위해서 우리의 관심사를 종교와 인간 사회의 변화 상황에 국한시켰다. 그러나 두 종교인 사이의 관계는 종교인과 무종교인 사이의 관계와 다르다. 아래 명제들은 상호 관계의 다양한 요소들을 포괄하면서 전반적으로 당면 과제에 대하여 새로운 접근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우리는 이 명제들이 종교적으로 복합적인 세계 안에서 교회의 참모습과 올바른 선교 사명을 제대로 밝혀 줄 것으로 기대한다. 이리하여 교회가 전세계를 하나로 일치시키시는 성령의 활동에 협력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제1명제: 해방과 온전성을 향하여 몸부림치는 아시아의 다종교적 사회들 안에서 모든 종교들은 이 노력에 대한 공통적이고 보충적인 윤리적, 종교적 근거를 제시할 의무가 있으며 동시에 각 종교들은 소외와 갈등의 원인이 되기보다 성숙과 일치의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오로지 대화와 협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종교는 공적 활동에 있어서 예언자적 역할을 담당한다. 모든 종교는 종교를 비정치적이고 사적인 단체로 전락시키거나 반대로 정치적이고 공동 적인 목적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것을 제도화하려는 사람들의 희생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1. 해설

1.1 아시아 주교들은 삼중 대화, 곧 가난한 이들, 문화들, 종교들과의 대화를 포함하는 아시아의 복음화에 대하여 언급한 바 있다(아시아 주교회의 제1차 총회 <FABC I, 25-28>). 아시아 대륙이 안고 있는 세 가지 문제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 문제이다. 왜냐하면 아시아는 세계의 대종교들의 요람이기 때문이다. 이 종교들은 여전히 활발하고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벌이고 있고 나아가 식민지 시대가 종식된 오늘날, 새로운 상황의 도전 앞에서 부흥과 쇄신을 꾀하고 있다. 이 도전은 두 가지 차원에서 곧, 한편으로 현대 기술 과학의 차원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서구 문화와의 접촉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아시아 대륙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활에 이 종교적 복합주의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1.2 종교는 문화의 가장 심오한 요소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궁극적인 질문들에 답변을 모색한다. 충만한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공동체에게 종교는 영감을 주고 목표를 밝혀 주며 용기를 북돋아 준다. 또한 종교는 인류의 기원과 목적과 관련하여 사람들을 인간 실존의 전분야에 걸쳐 완성에로 나아가도록 유도한다. 종교는 사람들과 그들이 소속된 공동체에 윤리적 행동 규범을 제공한다. 그리하여 종교는 개인 생활이나 단체 생활에서 예언자적 역할을 떠맡는다. 현대의 세속화는 종교를 공공 생활에서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는 사적인 단체로 간주하려고 한다. 따라서 사람들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공공 생활은 평화와 행복, 질서와 효율성 등과 같은 세속적 이상들에 의해서 규제된다. 종교에 뿌리를 둔 윤리적 원칙들에 의해서 통제를 받지 않는 이 이상들은 오래지 않아 개인적 또는 집단적 이기주의, 약육강식의 무분별한 생존 경쟁, 무절제한 소비주의와 이익 추구 등에로 전락하고 만다. 종교가 이런 식으로 공공 생활과 무관하게 되면 그 자체의 의미를 상실하고 고립될 수밖에 없다. 이와는 반대로 종교의 감성적 힘이 광신적 근본주의에 의해 잘못 이해될 때, 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부추겨 그들의 집단을 다른 집단들로부터 고립시키고 사회 안에서 그네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암적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하여 종교는 정치적, 이기적 집단주의와 광신적 근본주의 등의 도구가 되고 갈등의 원인이 된다. 이 두 극단을 피하면서 종교는 공공 생활 안에서 자체의 고유한 영감과 예언자적인 기능을 보존하여야 한다(사목 헌장 42-43).

1.3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존중하는 현대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은 개인으로서나 한 단체의 일원으로서나 자유에 대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지니고 있다(“인간의 존엄성” 2; 사목 헌장 16-17). 각자의 양심은 신성하며 존중되어야 한다. 아시아에서와 같이 다 종교적 사회 안에서 인간 상호간의 존중은 인내하는 것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공동 운명에 직면하여 공통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유대로 묶여진 한 공동체가 개인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를 공공 생활에 연결시켜야 한다. 우리가 상대방의 믿음을 존중하고자 한다면 이는 오로지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대화는 하나의 공동체를 창조하게 해주어 각 사람으로 하여금 그 안에서 자신의 종교적 믿음과 절대적 가치들을 발견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이 가치들을 공공 생활과 경제적, 사회적, 정치 직 제도들의 기초로 받아들이도록 해준다. 우리가 바람직한 다종교적 공동체를 세우기 원한다면 일종의 상호 증여를 포함하는 그와 같은 집단적 기초가 불가피하고 또한 필연적인 것 같다. 이 다종교적 공동체는 개인이나 단체 생활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떠맡음으로써, 한편으로 종교론 개인화시켜 비종교적이고 비윤리적인 사회로 사람들을 유도하지도 않고 다른 한편으로 종교를 사회 전체를 관장하는 지배 원리로 이용하는 잘못도 범하지 않게 된다.

1.4 요한 바오로 2세는 1986년 2월 5일 마드라스에서 타 종교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다. “대화의 열매는 사람들 사이의 일치와 사람들과 하느님과의 일치이다. 하느님은 모든 진리의 원천이시요 계시자이시며, 그분의 성령은 사람들이 서로를 온갖 정직한 태도와 사랑으로 만날 때에야 비로소 그들을 자유롭게 인도하신다. 대화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으로 하여금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도록 한다. 우리가 대화 안에서 서로에게 자신을 개방할 때 하느님에 대해서도 우리를 개방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인간 상호간의 우정과 이해와 내적 설득을 동한 정당한 방법을 이용해야 한다. 우리는 개인들의 인권과 시민권을 존중해야 한다. 또한 서로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로서 우리 모두는 종교적 자유와 인간적 형제애, 교육, 문화, 사회적 안녕과 질서의 영역에서 공통된 이상을 증진시키고 보호하는 데에 공동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1.5 이러한 전망 하에서 종교의 긍정적인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종교는 결코 한 사회 안에서 사람들을 고립시키는 아편 역할을 맡거나 강압적 권력 기관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종교는 인간 서로를 대립시켜 상호 공존을 위태롭게 하는 기관으로 나타나서도 안된다. 오히려 종교는 대화를 가능케 하는 기초 공동체를 형성시켜 줌으로써 상대방의 신앙에 부여된 절대적 요구들운 존중하면서도 대화를 통하여 서로를 풍요롭게 해주고 인간의 보다 발전적인 미래를 위하여 함께 투신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종교의 이러한 공동체적이고 보완적인 특성은 인격체를 상호간의 체험과 자기 투여에서 우러나오는 특성이지 그들이 신봉하는 종교의 교리와 구조에서 나오는 특성이 아니다.

1.6 이 대화는 해방과 온전성을 향해서 발돋움하는 아시아인들의 몸부림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의 공동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한, 미래를 향한 역동적 전망을 제시한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많은 어려움과 장애를 예상하지만 모크샤, 니르바나, 플레로마, 천당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는 인간성의 실현과 완성을 지향하는 공동 탐구와 공동 순례와 공동 성장에 더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1.7 “그리스도교를 위시하여 많은 종교들이 세상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까닭에 종교 상호간의 대화는 종교적인 영역에만 국한될 수 없고 인생의 모든 분야, 곧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분야에 적용되어야 한다. 종교는 인간 공동체의 보다 충만한 삶에 공헌하는 자기 투신 안에서만 이 상호간의 보완성을 발견하고 모든 분야에 있어서 대화의 긴박성과 적합성운 발견하게 된다”(주교회의 산하 종교 대화 위원회<BIRA, III,7>).

 

제2명제: 모든 종교는 하느님의 구원 경륜 안에서 중요하고 긍정적인 요소들이다. 따라서 타종교와의 대화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표징인 교회의 선교 사명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 중의 하나이다. 오늘날 아시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그들이 세계 여러 곳에서 “적은 무리”에 불과하지만 모든 것을 하나로 일치시키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종교 상호간의 협력을 용이하게 하는 봉사적이고 촉매적인 역할을 수행할 소명을 받고 있다. 이 소명은 모든 지역 교회들로 하여금 보다 충만한 종파간의 일치로 함께 성장해 나가도록 촉구한다.

 

2. 해설

2.1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령께서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빠스카 신비에 참여할 가능성을 제시하신다.”(사목 헌장 22; 참조: 교회 헌장 16; 인간의 구원자<RH> 14)는 전통적 교리를 재천명할 뿐 아니라, 타종교들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 종교들은 인간의 사회적 본능에 따라 하느님을 찾아나서는 방법들의 표현이기 때문이다(선교 교령 3; 종교 자유 선언 3). 여기서 하느님을 자신들의 기원과 목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소명이 강조되고 있다(비그리스도교 선언 2). 아시아 주교들은 “타종교들을 하느님의 구원 경륜에 있어서, 중요하고 긍정적인 요소들로 받아들이고 하느님이 그들을 통하여 우리 아시아인들을 당신께로 끌어들이셨다고 생각한 다 ”(FABC I, 14-15; 참조; 인간의 구원자 6과 12).

2.2 타종교들과의 접촉은 아시아의 교회로 하여금 하느님의 구원 경륜에 있어서 그 종교들이 수행하고 있는 역할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도록 해주었다. 이 평가는 타종교인들의 생활 안에서 발견된 성령의 열매에 기초를 둔다. 곧 거룩함에 대한 감각, 완덕에로의 투신, 자아 실현에 대한 열정, 기도와 위탁, 자아 포기의 노력, 정의 추구, 인간의 기본 선에 대한 갈망, 봉사에의 참여, 신에게의 전적인 귀의(歸依), 상징과 경신례와 생활 그 자체 안에서 초월성에로의 접근 등이 모두가 인간적 약점과 죄에도 불구하고 타종교인들의 신앙생활 안에서 발견된다.

2.3 더 나아가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는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유일한 구원 계획이 모든 사람들에게 퍼져나간다는 신앙의 확신에 뿌리를 둔다. 그 구원 계획이란 하느님 나라로서 하느님은 이 나라를 통하여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과 화해시키시려고 하신다. 교회는 이 신비의 성사이다. 곧 자체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상징적 현실이다(교회 헌장 1; 5; 참조: BIRA IV/2). 사람들을 완성에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들 안에서 하느님의 위업을 발견하는 일 온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 속한다. 대화는 하느님의 현존과 위업을 존중하고 타종교인들의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참조: 교회 헌장 10-12;“성교회”<ES> 41-42: 인간의 구원자 11-1).

2.4 요한 바오로 2세는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과 교회의 사명 사이의 일치를 이렇게 강조하였다. ”이 일치의 근본 질서가 창조와 구원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기에 신적인 것으로 규정될 때, 종교적 다양성은―심지어 종파적 분산까지도―결국 ‘인간적 요인’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창조를 관장하는 일치의 위대한 계획이 실현되어 가는 과정 안에서 극복되어야 한다. 이 종교적 다양성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하느님이 사람인에게 주신 창조적이고 영적인 부유함을 반영하는 것이다(참조: 선교 교령 II). 본인은 여기서 종파적 분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종교적 다양성에 대해서만 거론하고 싶다. 이 종교적 다양성 안에서 인간 정신의 한계와 발전과 퇴보가 드러나는데, 역사를 두고 보면 인간의 정신은 악의 세력에 의해서 손상된다(교회 헌장 16). 교회는 자신의 모든 역량(복음화, 기도, 대화)을 다하여 인간이 받은 상처와 분열의 아픔을 치유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 이 상처와 아픔은 사람들을 자신들의 기원과 목적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인간 상호간에 적대감을 갖도록 만든다. 교회가 받은 사명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온갖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지닌 인류 전체가 ‘하느님의 새 백성을 형성하도록’(교회 헌장 13) 하는 것이다. 이 새 백성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과의 복된 일치와 인간 가족 사이의 일치가 굳건하게 이룩된다”(1986년 12월 22일 로마 꾸리아에서의 담화).

2.5 오늘날 아시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적은 무리”이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을 자기 방어의 태도로 몰고 갈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 안에서의 체험과 성사와 공동체 안에서의 체험, 개방과 신뢰의 분위기 안에서 타종교인들과 맺는 원활한 교제, 하느님의 계획의 보편적 차원들에 대한 인식,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그 계획의 실현에 투여하는 것 등을 통해서만 대화의 의무를 깨달을 수 있운 것이다. 이 의무는 결코 철회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인들이 대화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정도의 관심을 갖고 있지 않으며, 대화란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들과의 공존을 위해 필요한 단순한 자구책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서 나오는 요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명 의식으로부터 얻어진 관심과 능력은 교회로 하여금 각 종교와 개별적으로 대화하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과의 만남과 협력을 용이하게 해줌으로써 종교간의 일치를 도모하게 해준다. 이러한 일치에 대한 봉사는 아시아 교회들 사이에 명백하게 존재하는 분열을 문제점으로 대두시켜 교회 일치 운동을 향하여 진력하도록 촉구한다. 그러나 일치를 향한 순례 여정은 각 교회들이 예수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공동으로 증언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잘 수행하도록 도와준다.

 

제3명제: 종교들과의 대화는 위격적 대화 안에서 신비의 공동체를 이루는 삼위일체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이 요구하는 바이다.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바라시는 성부의 유일하고 결정적인 활동은 우리 모두를 일치로 이끈다. 성부는 인류의 기원이요 목적이시다. 그리스도는 교회로 하여금 이 일치의 봉사자로 초대하신다. 하느님은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당신과 화해시키신다. 성령의 보편적 현존과 활동은 모든 이를 하느님 나라의 실현에로 초대한다. 이 신비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대화는 신적 생명의 충만함에로 향하는 한 과정이다. 대화는 진리를 완전하게 실현시키려는 모든 사람들의 갈망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것은 삼위일체 안에서 일치를 모색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이다.

 

3. 해설

3.1 우리에게 있어서 종교간의 대화는 모든 사람들을 일치에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기초를 두는 동시에, 이 믿음에 연루된 의미를 역사와 그 안에서의 우리의 역할에 대한 자각을 통하여 구현시키려는 우리의 노력들에도 그 기초를 둔다. 대화는 우리 사회에서처럼 여러 종교들이 공존하는 상황 하에서 현실적으로 필연적인 책략 이 상의 것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 종교가 기능적으로 볼 때 결국 같다는 현상학적 개념에서 나온 귀결도 아니다.

3.2 구세사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하느님의 계획과 활동을 좁게 해석하였다. 우선 하느님의 계획과 활동이 여러 민족들로부터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예수에게 이어지고, 마침내 교회와 선교 활동을 통하여 다시 세상에 펼쳐나가는 식으로 해석하였다. 타종교를 하느님의 구원 경륜 안에서 중요하고 긍정적인 요소로 평가하는 견해는 구세사의 새로운 청사진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이 청사진은 하느님 나라를 중심으로 한 미래적이요 삼위일체적인 계획이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은 유일하고 고유하다.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은 이 세상에서 한번도 당신들의 활동을 정지시켜 본 적이 없다. 아버지 하느님은 세상의 창조 이진부터 당신의 구원 계획을 마련해 놓으셨다(에페 1.3-6). 그리고 그분은 때가 참에 따라 만물을 한 분 그 리스도 안에 수렴시키고자 하셨던 원초적인 당신의 신비스런 계획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에페 1,9-10). 만물이 그분을 통해서 창조된 말씀인 그리스도는 육화되시어 당신의 수난과 부활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적 신비를 구현시키셨다(골로 1,14-16). 그리스도 안에 만물이 충만하게 되는 것은 성부의 뜻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성현을 통하여 평화를 이루시면서 성부께서는 만물을 당신 자신과 화해시키신다(골로 1,19-20). 이 화해와 평화는 이 세상 전체를 위한 것으로서 한 분 성령의 현존과 활동을 통해서(에페 2,17-18)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퍼져나간다. 비록 모든 종교가 하느님의 이 신비스러운 계획 안에서 일조를 담당한다 할지라도, 교회는 세상 안에서 예수의 신비를 계속 재현하고 하느님 나라의 성사라는 자신의 신분을 결코 잊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 마칠 때에 완성된 것이다. 그동안에 하느님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올바로 사용하여 당신의 뜻에 순종하도록 끊임없이 그들을 초대하고 계시며, 사람들은 믿음과 착한 행실로 이 초대에 응답하고 있다. 우리는 믿음의 위탁을, 믿음이 그것을 통하여 명상되고 표현되고 거행되고 생활화되는 신경(信經), 상징, 예식, 행위들로부터 분리시키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육화의 경륜 안에서는 비종교적인 믿음이 차지할 자리는 주어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는 말씀이 육화되셨음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몸 안의 영”이라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3.3 그러므로 대화의 기초는 신적이고 삼위일체적이다. 다시 말해서 대화의 기초가 되는 것은 성부의 창조적이고 구원적인 의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 구원 활동과 성령의 신비스런 재창조와 완성이다. 동시에 대화는 역사적이다. 그것은 모든 것의 점진적인 통합으로서 역사의 한 시점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위업이요 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협력이다. 대화는 인간적이다. 그것은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룩한 순례의 공동체 안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끝으로 대화는 교회적이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요 삶이다.

3.4 진리와 사랑은 우리를 대화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들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부분적 실현은 언제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나신 분이고(요한 18, 37) 진리 자체이신 분이다(요한 14,6). 하느님의 신비스런 구원 계획은 그분 안에서 계시되고 완성을 향하여 나아간다. 하느님의 육화된 말씀이신 예수 안에서 사도들과 초대 교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하느님의 외아들의 영광을 보았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진리의 영이시요 우리를 진리 전체에로 인도하실(요한 16,13) 성령에 의해서 탄생되고 양육되고 강화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우리를 타종교와의 대화로 이끌며 공동 탐구를 통하여 진리의 완성에로 나아가도록 재촉한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대화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말하기 전에 상대방의 목소리에뿐 아니라 그의 심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대화의 성령은 우정이요 더 나아가 봉사이다”(성교회 87). 대화는 “사랑의 내적 충동”(성교회 64)에서부터 나온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대화를 진리에 대한 열정적 추구라고 말한다. “대화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나누는 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진리란 빛이고 새로움이며 힘이기 때문이다”(1986년 2월 5일 마드라스에서 타종교 지도자들에게 한 연설, No. 4).

 

제4명제: 종교간의 대화는 타종교인들과 함께 정보를 교환하고 삶과 체험과 비전과 반성을 나누면서 그들 가운데 활동하시는 성령의 위업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 대화는 선입견을 멀리하고 서로의 이해를 도우며, 보다 심오한 영적 체험에로 우리를 인도하는 인간적이고 영신적인 가치들을 증진시키고 보호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분별 능력을 키워나가고 함께 증언하며 함께 투신하도록 유도한다. 그것은 마음과 정신의 일치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공동 여정을 밟는 것이다. 하느님을 모든 민족을 이 나라에 초대하신다.

 

4. 해설

4.1 종교간의 대화는 일차적으로 사회적 제도로서의 두 종교간의 관계가 아니고, 두 신조나 신학의 비교도 아니며, 정치적 행동을 위한 전략적 야합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신들의 고유한 신앙에 뿌리를 두고 그 신앙에 투신하고 있으면서도 모든 인류의 공동 기원과 목적을 지향하면서 다른 종교인들과 성령에게 열려 있는 믿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확신과 체험을 나눈다는 것은 이상을 토론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4.2

이러한 대화는 전문가들의 독점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평범한 신앙인들, 신학자들, 수도자들이나 승려들 모두에개 해당된다. 이 대화는 어떤 차원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종교에 의해서 활성화되고 영감을 받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현실로 표현되는 공공 생활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고, 공동 기도와 같은 종교적 행 위로 이어지는 영적 체험을 나누는 가운데서도, 예술과 상징과 전례 안에서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기 위한 공동 비전을 모색하면서도, 그리고 개인이나 단체가 체험한 사건들과 도전들을 신앙의 빛으로 조명해 보는 신학적 반성을 나누는 가운데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4.3 대화의 목적은 점진적인 순서에 의해서 칭해질 수 있다. 우선 선입견을 버리고 서로에 대한 지식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상호 이해할 것, 문화적이고 역사적이고 지역적인 이유로 인하여 타종교인들에 의해서 보다 훌륭하게 발전된 가치들과 체험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서로 부유해질 것, 올바른 인식과 기도와 각종 실천적 계획을 통하여 평화,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 인간의 존엄성, 평등, 자유, 정의, 공동체 형성, 종교 자유와 같은 인간적이고 영적인 가치들을 증언하고 증진시키는 데 공동으로 노력할 것, 마지막으로 보다 깊이 그리고 끊임없이 절대자에게 다가가기 위하여 종교적 체험을 서로 나눌 것.

4.4 다종교적 상황에서 한 종교를 신봉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물론 우선적인 종교 공동체는 같은 믿음을 나누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명백하게 성찬 공동체가 될 것이다. 그런데 다종교적 상황 하에서 한 인간이 소속된 인간 공동체는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단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인 단계에서 차이점들을 드러내고 있는 공동체도 있다. 이 공동체는 결국 대화를 통하여 문제점들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 따라서 다종교적 상황 하에서 정상적 생활과 생존 형태는 기본적인 인간 공동체로서 그 안에서 종교들이 대립과 분열의 씨앗이 아니라 대화를 통한 협조와, 해방과 온전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공동 노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그 자체로서 하느님 나라의 상징이 될 것이다.

 

제5명제: 종교간의 대화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개인들과 공동체들을 포함시킨다. 성령의 감도하심에 따라 대화는 삶의 외적인 요소에서 내적인 요소로 진전된다. 대화는 또한 각 공동체의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손상시키지 않고 오히려 심화시키면서 성령 안에서의 보다 심오한 친교의 차원에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러한 친교는 공동 기도, 성서와 경전 읽기, 공감대 안에서 축제와 해방의 역사를 거행하기, 문화와 사회의 쇄신 등을 통하여 표현된다. 한 종교는 공통된 역사나 그외 다른 이유에서 다른 종교들보다 어떤 특정한 종교에 대해 더 근접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인간적 불완전함과 죄악으로 인하여 모든 종교는 성령의 감독과 종교 상호간의 비판적 도전을 통하여 쇄신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이 쇄신은 상호 용서와 화해를 포함하게 될 것이다.

 

5. 해설

5.1 종교 간의 대화는 개인들과 작은 그룹 사이에서는 용이하게 이루어진다. 큰 공동체일수록 대화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우선 공동체들은 단지 몇몇 공통된 행동이나 계획을 중심으로 종교간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적이고 영신적인 가치들을 증진시키기나 보호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기도를 바치거나 경신례를 거행하며 공동으로 행동할 수도 있다. 이를 위해 한 공동체는 무지에 바탕을 둔 과거의 편견을 버림으로써,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저버리지 않고도 다른 종교인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학적 및 영신적 전망을 개척해 나감으로써 스스로를 준비시켜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또한 공동선을 자기 그룹의 이익보다 앞서 추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동시에 그들은 전체주의자들과 광신적 근본주의자뚤과 세속주의자들로부터의 압력에 대해서도 의연히 대처해야 한다.

5.2 대화는 불일치를 제거하려는 시도와 더불어 최소의 공통분모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대화는 당사자가 자기 자신의 신앙 체험에 전적으로 충실하지 못하면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실제로 상대방의 체험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체험을 명백히 하고 그 체험을 심화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타종교인에게 자신의 믿음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자신이 믿는 바를 자신에게 명백히 설명해 주는 방법도 된다. 이 점에서 대화는 서로를 메마르게 하기보다 서로를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5.3 대화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관용과 평화 공존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 다음에 대화는 서서히 서로를 받아들이고 경탄하면서 점차로 삶을 교환하게 될 것이다.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공동 계획을 세워 함께 협력하는 것은 그다음 단계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서로 다른 정당들이 공동 정책에 동의하는 것과 같다. 깊은 영적 체험을 나누는 일도 그런 체험을 갈망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수도자들이나 승려들에겐 그리 어렵지 않다(DM 29-35). 대화의 진짜 시련은 서로 같이 살고 함께 일하면서도 한편이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는 것을 다른 편이 인정하려 하지 않을 때 찾아온다. 절대 가치들의 충돌은 언제나 어려운 과정이다. 믿음의 차원에서 적어도 믿음의 실천 면에 있어서 신앙인은 관심의 초점을 자신들에게 두지 말고 공통적인 것 그리고 실제적으로 공동 협력이 가능한 것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절대적인 가치가 한 신앙인이 자신의 양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구체적인 윤리적 결단을 요구할 때 대화는 몹시 어려워진다. 이때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지속적으로 서로의 양심을 존중하는 것이다. 대화의 노력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한편 관용이나 공존은 대화가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때 보다 현실적으로 필요한 태도일 것이다.

5.4 진정한 대화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일은 새로운 인간 공동체를 공동으로 세워나가게 될 것이다. 이 일은 필연적으로 종교들이 문화 안에 육화되고 문화에 새로운 가치 체계로 도전함으로써 그것을 변형시키는 토착화의 과정을 수반한다. 대화의 국면에서 종교들은 한 민족의 문화와 협력하면서 이 일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을 무시할 때 특정한 어떤 종교가 민족적 문화를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지배하고 그 역할을 도맡아 수행하거나, 아니면 특정한 시민 종교가 시민 사회를 위해서 봉사함으로써 종교가 어용적 단체로 전락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5.5 종교가 과연 공적인 영역의 일부가 되지 않고 이러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가? 국가 곧 정치 기구는 편파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정치 공동체는 비종교적인 또는 반종교적인 태도를 취할 이유가 없다. 정치 공동체가 종교에 대해서 편파적일 때 종교들 사이에서의 친교는 정치적인 활동을 공동으로 펼쳐나가는 것 이외에도 다른 공동 노력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공동 가도, 성서나 경전의 공동 독서, 축제의 공동 거행 등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공동 활동들에 대하여 몇몇 종교들은 혼합주의의 위험성이 따르지 않을까 걱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일 종교의 영역에서 단순한 흑백 논리를 뛰어넘었더라면 공동 활동의 모든 가능성들을 실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타종교들을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포함된 긍정적인 요소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믿음이 수렴되는 영역에서 공동 기도가 가능하게 된다. 이 영역은 종교들간의 대화를 통해서만 조심스럽게 발견될 것이다. 참석자들에게 공통된 의미를 던져줄 수 있기 위해 상징들을 사용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빛, 불과 물 등과 같은 자연적 상징들과, 인사나 음식 나눔과 같은 사회적 상징들이 종교들 사이에서 쉽게 공통된 해석을 낳게 한다. 동시에 각 종교는 타종교와의 공동 거행이 불가능한 역사나 신화나 전통 때문에 그들 나름대로 특정한 상징들을 가지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5.6 우리는 위의 명제에서 비슷한 신앙을 지닌 한 종교적 그룹의 상징을 다른 그룹이 받아들여 이용하는 일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복합적 가치의 상징들이 특정한 종교적 요소에 우선하여 자연적, 인간적, 또는 사회적 의미를 지닐 때, 여타 종교들이 각자 나름대로 자기네 처지에서 그 상징들의 가치를 재음미해 볼 수 있게 된다.

5.7 다른 종교의 예절에 참석하는 일도 비슷한 문제를 불러 일으킨다. 종교적 예절이 한 공동체의 상징적 행위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완전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 예절에 참석할 수 없게 된다. 예절이 진행되는 동안 그 예절을 존중하는 뜻에서 끝까지 참석할 수 있겠다. 또한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어떤 경우 종교인들 사이에 진정한 친교가 일어나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상징들을 단순한 상징으로 가볍게 처리하면서 상징의 외적인 틀을 넘어서서 그것이 상징하는 믿음의 실재에 도달하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상징들은 그들 자체가 상징화하려는 실재와 상대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상징들은 예절을 통한 상징화의 과정에서 상징화를 시도하는 주체와 절대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5.8 한 종교가 다른 종교와 더불어 체험하는 공동 유대는 종교 상호간에 맺어지는 관계의 깊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유다교 및 이슬람교와 특별한 가까움을 느낀다. 힌두교와 불교는 공통된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형제애를 느낀다. 불교는 오랫동안 유교와 신도(神道)와 공존해 왔다.

5.9 절대자 또는 절대 진리의 현존에 대한 공동 의식에 바탕을 두고 평화를 위한 공동 기도가 가능하다. 성서 또는 경전은 한 종교의 기초를 이루는 특별한 문헌으로서 타종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하느님이 성서를 통하여 한 백성에게 전달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 들을 위한 것이다. 모든 신앙인은 자신의 신앙 체험 안에서 그 메시지를 해석하는 한편 그 메시지에 의해서 도전을 받고 있음을 느끼거나 적어도 종교적 감응을 가질 수 있다. 종교적 또는 비종교적 공동 분위기 안에서 봄과 곡식의 수확과 추수 감사절 등 계절적이고 사회적인 축제를 성대히 거행하는 일은 공통된 삶과 운명을 더욱 강하게 확인시켜 준다.

5.10 아시아의 종교적 전통들에 대해서 아시아 주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도 안에서 그 전통들과의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대화는 성령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기묘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을 표현하도록 가르치신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 줄 것이다. 여러 가지 상황에서 이 대화는 유익하고 현명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아시아의 종교적 전통들은 그리스도교적 전통과 다르다. 그러나 그들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마음을 당신께로 불러 올리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FABC II, 35). 요한 바오로 2세는 여러 종교 지도자들이 참석한 아씨시의 평화의 날 행사에 대하여 이렇게 논평하셨다. “모든 사람들의 기도 없이, 그리고 각자 자신의 본 모습 안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기도 없이 평화를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로 우리는 진정한 기도가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현존하시는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이같은 일이 아씨시에서도 이루어졌다. 모든 남녀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에, 즉 자신을 송두리째 신에게 내맡기고 그분 앞에서 스스로 가난한 자임을 인정하는 데에 우리 모두가 일치하고 있다. 기도는 사람들 가운데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시키는 방법이다(선교 교령 3 참조)”(1986.12.22, No. 11).

5.11 종교들 사이의 상호 보충적인 요소는 인간 각자가 그분께 온전히 위탁하는 절대자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요 문화적인 조건과 관련된 것이다. 순례 여정에 들어선 사람들은 이 조건 안에서 절대자와 자신들의 관계를, 그리고 절대자에게서 받은 삶의 의미를 체험하고 표현해 왔다.

5.12 “종교”란 말은 전체주의 그룹이나 광신적 근본주의 그룹에 의해서 유린될 수 있는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교를 포함하여 대종교들 안에서 이러한 그룹들을 발견할 수 있다. 비목 우리의 사명이 우리를 모든 인류와 연결시키고 우리가 모든 사람의 품위와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 하더라도 이런 그룹들과의 관계는 이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대화의 장에서 논의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개방의 필요성과 더불어 분별의 필요성도 강조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인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건설할 우리의 사명에 비추어 우리의 분별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

5.13 대화의 성령이 언제나 종교들 사이의 관계에서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종교들 사이의 관계는 가끔 사람들 가운데 갈등의 씨앗이 되어 왔다. 그러므로 무지와 선입견에서, 심지어 악의에서 나온 상해(傷害)에 대해서도 화해와 용서는 대화의 본질적 요소이다.

 

제6명제: 대화와 말씀 선포는 교회의 복음화 사명의 본질적 구성 요소이면서, 변증법적이고 보완적인 차원에 속한다. 진정한 대화는 한 그리스도교 신자의 그리스도교적 신앙에 대한 증언을 포함한다. 이 신앙은 물론 타종교인들의 유사한 증언에 대해서 개방적이다. 복음 선포는 그리스도교의 제자 정신과 선교 사명에 대한 초대이다. 말씀 선포는 회개로 우리를 자유롭게 초대하시는 성령과 이 초대에 자유로이 응답하는 인격체 사이의 신비에 봉사하는 것이기에 대 화적이다.

 

6. 해설

6.1 이 명제의 목적과 아래의 해설은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 속하는 대화와 말씀 선포의 상호 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유성과 종교의 복수성, 대화와 믿음의 절대적인 위탁, 진리에 대한 절대적 가치와 상대적 가치의 인식론, 종교적 다수주의의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적 계시의 규범 등과 같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논의하지는 않겠다.

6.2 대화와 말씀 선포 사이의 관계는 복잡하다. 이 관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처음서부터 어느 한 쪽을 과소평가하는 일을 삼가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대화 그 자체가 말씀 선포의 유일하고 진정한 형태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 생각에 그리스도교가 구원에 이르는 많은 방법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대화가 비록 자기만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말씀 선포에로 나아가는 과정 전체에서 한 단계일 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전자의 주장은 말씀 선포로부터 어떤 특수한 의미도 삭제해 버리는 것이고 후자의 주장은 대화를 기능화하는 것이다.

6.3 교회의 복음화 사명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교회로 하여금 그 나라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교회보다 더 폭이 넓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가시화(可視化)하는 표징으로서 그 나라에 의해서 규정되고 그 나라를 발전시키지만 그 나라와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6.4 아시아 주교들은 문화, 종교, 아시아의 가난한 민중들과의 삼중 대화를 통하여 지역 교 회를 건설해 나가는 일을 복음화로 이해하였다. 토착화, 종교간의 대화, 해방은 복음화의 세 요소들이다. 말씀 선포는 이 세 요소들에 덧붙여진 제4요소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복음화의 세 요소를 총망라하는 종합적 요소인 증언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와 말씀 선포 사이의 관 계산 밝히는 데에 있어서, 복음화의 한 요소인 종교간의 대화의 변증법적인 모습을 내적으로 구현시켜 나가는 일에 우리 자신들을 국한시키고 있다.

6.5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우주 전체를 포함한다. 교회의 선교 사명은 이 계획의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는 우주 안에서의 하느님의 위업을 독점할 수 없다. 교회가 세상 안에서 하느님께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받았음을 인식하면서도 다른 종교들 안에 드러난 세상 안에서의 하느님의 위업에 대하여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사실에 대한 인식은 교회와 타종교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교회의 복음화 사업을 구성하는 두 기능이 된다. 말씀 선포는 교회의 선교 사명에 대한 인식의 표현인 반면, 대화는 교회의 테두리 밖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현존과 행위에 대한 안식의 표현이다. 교회의 행위는 하느님의 위업에 대한 이 두 가지 인식에서 우러나오는 추진력으로 자신의 모습을 유지한다. 말씀 선포는 교회가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위업을 확인하고 증언하는 것이다. 반면에 대화는 타종교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행동에 대해서 교회가 자신을 개방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믿음의 전망에서 볼때 타인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6.6 성령은 모든 사람들을 회개로 부르신다. 회개는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그분 자신과 그분의 나라에 마음을 자유롭게 돌리는 것을 말한다. 완성에로의 성장을 상호 촉구하는 대화는 이 회개에의 부르심이다. 그러나 대화는 개종의 의미로 이해되는 회개가 그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한편 말씀 선포는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제자 정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말씀 선포 역시 개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신비스러운 부르심과 이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인 응답과 관련된 어떤 것이다. 성령 안에서의 자유의 이 이중 운동 때문에 말씀 선포 그 자체가 대화적인 것이 된다(현대의 복음 신교 75; 인간의 구원자 14).

6.7 신앙의 재확인은 언제나 절대자 안에 뿌리를 둔다. 그러나 우리는 타종교인도 비슷한 신앙의 전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대화는 이 절대적 전망을 차단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참 대화는 “원하시는 대로 영감을 주시는” 성령의 절대적인 자유에 순종하면서 타인의 자유와 양심을 존중하는 가운데 생겨난 “공간”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 말은 우리가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계획을 확신하고 그분의 구원이 어떻게 우리에게 중재되는지 확실히 알고 있지만, 똑같은 구원이 우리의 대화 상대자인 타종교인들에게 어떻게 퍼져나가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명확하게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여가서 우리는 성령의 자유와 타종교인들의 자유 사이에 오가는 신비스러운 교감과 직면하게 된다. 우리의 증언은 이 신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대화란 두 종교의 말씀 선포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왜냐하면 우리와 마주친 신비가 타 종교인들에 증언된 바와 똑같은 내용의 것이기 때문이다.

6.8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을 인용해 보자. “진정한 대화는 하나의 증언을 이루며, 진정한 복음화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그의 말을 듣는 태도를 수반한다”(인간의 구원자 12: 1984년 3월 3일 비그리스도교 사무국에서의 담화). 1979년 12월 마닐라 선교에 대한 국제 회의는 “지역 교회의 지속적인 건설이 대화를 자체의 본질적인 모습으로 여기는 헌대 복음화의 주요 과제이다.”(선언문 19)라고 선언했다.

6.9 서로의 이해, 상호 격려와 협력, 그리고 삶과 문화에 공동으로 활력을 불어넣음으로써 서로를 풍요롭게 하는 일들을 넘어서서 대화는 언제나 서로의 말씀 선포로 인한 긴장을 수반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종교간의 대화와 말씀 선포는 대화적인 차원을 지니거나 일종의 진행 과정의 특징을 띠고 있다.

6.10 우리는 이제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와 그분의 고유하고 보편적인 중재 역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가 예수의 역사적인 죽음과 부활 및 그것의 고유성과 보편성 등과 맺는 관계가 교회와 하느님 나라 사이의 대화의 중요한 몫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 도의 신비를 교회의 입장에만 맞추려는 시도는 그 신비를 상대화시키고 그 신비로부터 보편성을 제거시키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우리는 아마도 이 신비의 깊이를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신비는 우주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영원한 것과 현세적인 것, 신적인 깃과 인간적인 것의 만남이다. 우리는 이 신비를 순례 여정에 있는 교회의 온갖 제약에 예속시켜서는 안된다. 교회는 다만 이 신비에 봉사하도록 불리었지 그것을 독점하도록 불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6.1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과 어떤 예외도 없이 비록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할지라도 일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이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각자와 모두에게 당신 자신의 최상의 소명에 따라 빛과 힘을 부여하신다.’”(인간의 구원자 14). 성령은 “신비체의 가시적 테두리를 넘어서서도” 활동하신다(인간의 구원자 6).

6.12 순례자 교회는 자기 스스로를 증언하는 것이 아니고 이 신비를 증언하는 것이다. 회개와 제자 정신에로의 부르심은 일차적으로, 부르시는 하느님과 응답하는 인간 사이의 관계에 관련된다. 교회와 공동체 사이의 관계는 이차적인 문제이다. 교회의 본 모습은 유일한 “구원의 방주”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누룩처럼 자체 안에서 서서히 부풀어 올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때 교회는 이 변화가 가져올 새로운 형태를 완전히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제7명제: 다른 종교적 전통들과의 진정한 대화는 민중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직면한 지역 교회의 임무이다. 그것은 아시아의 그리스도교가 진정한 지역 교회들을 세우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본질적 과정에 속한다.

 

7. 해설

7.1 우리는 이미 앞에서 아시아 주교들이 복음화를 아시아의 문화와 종교와 가난한 사람들과의 삼중 대화를 펼쳐 나가는 지역 교회들을 건설해 나가는 일로 본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혹 자는 토착화, 종교간의 대화, 해방을 각기 독립된 것으로 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오늘날 종교 간의 대화가 종교인들 사이의 사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수도 많다. 그러나 종교간의 실효성 있고 건설적인 대화는 토착화와 해방의 도전을 함께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가능하다. 따라서 이 문제는 역사적인 전망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간의 대화는 종교 그 자체처럼 공적인 차원 또는 대중적인 차원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7.2 우리가 처음에 상기시킨 바와 같이 아시아의 주요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다종교적인 상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종교의 도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서 그리고 다른 종교와 대화하지 않고서 아시아 안에 아시아인들의 삶과 선교 사명에 맞는 영성, 신학, 교회 조직, 해방의 방법을 갖춘 지역 교회를 제대로 건설할 수 없다. 이 일은 오로지 아시아의 지역 교회들 이 자기 자신들과 자신들의 선교 사명을 책임있게 수행해 나갈 때만 가능하다. 그 책임은 과감히 체험하고 창조하고 과오로부터 배워나갈 수 있는 자유의 행사를 전제로 한다.

7.3 이러한 지역 교회들의 성장을 통하여 교회는 진정으로 공번된 또는 보편적인 교회가 될 것이다. 보편적인 교회는 지역 교회들의 통일체이기 때문이다. 지역 교회들은 특정한 지역과 문화와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다른 모든 종교들에 대해서 자신들을 개방하여 믿음 안에서 그들과 일치하고 믿음의 특별한 은혜를 전체를 위하여 사용한다. 바로 이런 전망 하에 서 “가톨릭 교회는 전인류를 성령의 일치 안에서 자체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온전하게 되돌려 드리기 위하여 열정적으로 그리고 항구하게 노력하고 있다”(교회 헌장 13; 에페 1,3-13 참조).

 

사목적 권고 사항들

전 문

아시아의 종교, 문화, 사회-정치적 상황은 나라마다 매우 달라서 각 나라에 맞는 구체적이고 적절한 사목적 권고를 제시하기가 몹시 어렵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진정한 지역 교회들이 되기 위해서 종교간의 대화는 불가피하고 지상 명령적이다. 따라서 각 교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실천하기 위해서 사려 깊은 분석과 반성을 필요로 한다.

이상의 고찰을 토대로 우리는 아래에 몇 가지 사목적 권고를 제안한다.

 

1. 공동 기도를 통한 영신적 쇄신

1.1 다종교적 상황 안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여줌으로써 복음을 증언해야 할 우리의 사명과 관련하여, 성실하고 진지한, 마음과 정신의 쇄신이 요청된다. 우리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함께 기도할 기회들을 항상 찾아야 한다.

1.2 교구나 본당 차원에서 다른 종교의 신자들과 함께 기도와 우정의 주간을 설정할 수도 있다. 이것을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을 통하여 계획할 수 있지 않을까?

 

2. 새 교리서를 위한 지침

2.1 교리서 안에서 다른 사항들과 관련하여 삼위일체적 신학을 보완 수정할 필요가 있다.

a) 하느님의 계시와 보편적 구원 계획에 대하여,
b) 하느님 나라의 봉사자로서의 교회의 본질 과 사명에 대하여,
c)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하여,
d) 우리 교회의 안과 밖에서 만물을 관통하시는 성령의 활동에 대하여,
e) 현대 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말씀 선포, 대화, 회개의 의미에 대하여.

2.2 우리는 편견으로부터, 자기방어로부터, 그리고 우리 자신의 단순한 이익 추구로부터 해방되어 다른 종교들 안에 숨겨진 긍정적인 가치들에 마음을 열고 그 가치들로부터 무엇인가 배우고자 하는 태도를 지니기 위해서 양심의 재교육이 필요하다.

2.3 종교간의 대화와 관련하여 시대에 맞는 신학과 교리 교육이 신학교의 교과 과정과 양성 과정 안에, 그리고 사목적 전문 기구들 안에 삽입되어야 한다. 관계 위원들과 일반인들에게 본 문헌에 대한 연구와 반성을 촉구한다.

2.4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은 진리를 공동으로 추구하는 일에 있어서,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로의 순례 여정에 있어서 동반자들이기 때문에, 종교간의 대화는 서로를 풍요몹게 만드는 지름길로 인식되어야 하고 따라서 이에 대한 새로운 사목적 배려가 요청된다. 기존의 모범적인 실천 계획들이 있다면 올바른 응용을 위하여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3. 공동 중언과 활동을 통한 종교간의 대화

3.1 우리 교회는 다른 종교들과 가능한 한 자주 함께 모여 삶의 체험을 나누고 인간적이고 영신적인 가치들, 이를테면 가난한 사람들과의 유대, 정의, 평화 등을 증진시키고 변호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투신하도록 서로를 격려해야 한다.

3.2 우리는 공동 책임감을 증대시켜 민중의 사회-문화적, 정치적 욕구들에 응답하기 위하여 선의의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

3.3 그리스도인 교회들 사이의 상호 신뢰를 수립하여 인류의 안녕을 위한 공동 증언과 협력을 증진시켜 나가야 한다.

 

4. 종교간의 대화를 위한 조직들

4.1 종교 문제와 종교간의 대화에 관한 심포지움, 토의, 세미나, 의견 교환들이 교구와 본당 차원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4.2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사회­문화적 여건들을 조사하기 위하여 연구소들이 설치, 운영되어야 한다. 종교의 실제적인 역할, 종교적 상징의 의미, 종교적 대화를 위한 조건들, 이 대화에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 또는 이와 유사한 문제들은 국가 단위의 교회적 차원에서 보다 폭넓게 연구되어야 할 과제들이다.

4.3 각국의 기독교 협의회(NCC)와 그외 타 종교의 액션 연합에 가톨릭의 지역 교회들이 회원으로 참가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4.4 특별한 공동 관심사 안에서 타종교 그룹들과 더불어 상호 교류와 협력을 도모하는 새로운 기구들을 교구와 국가 차원에서 설정하여야 한다.

 

5. 미래의 활성화를 위한 몇 가지 질문들

5.1 우리 나라의 다종교적 상황 아래에서 교회의 현주소와 역할은 무엇이었고 무엇이어야 하는가?

5.2 우리는 과연 우리 민족의 종교-문화적 전통에 우리 자신들을 합당하고 의미있게 동화시키고 있는가? 이 전통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타종교인들에게 접근하는가?

5.3 소수의 교회에 속한 우리지만 다른 그룹들 사이에 중재 역할과 화해의 예언자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아니면 종교를 사물화(私物化)시켜 우리에게 요구된 예언자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또는 우리 자신이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고 교회를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도구로 만들지는 않았는가?

5.4 우리는 종교간의 대화라는 교회의 지상 명령 앞에서 선교 사명, 말씀 선포, 복음화, 회개 등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5.5 이제 우리는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우리가 단체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