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교회의 문헌
2003-01-17 15:10
2020-05-20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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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사회 복지 주일(2003년 1월 26일) 담화

2003년 사회 복지 주일 담화(1월 26일)
 

사랑의 세계화를 만들어 갑시다!



1. 금년은 한국 천주교회가 주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해외 원조를 하여 온 지 10년이 되는 해입니다. 주교회의 1992년 추계 정기총회는 오랫동안 외국 교회의 원조를 받아 온 한국 교회가 ‘원조하는 교회’로 전환하는 획기적인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매년 1월 마지막 주일인 사회 복지 주일의 전국 헌금으로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가 공식적인 해외 원조 업무와 활동을 담당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동안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는 사회 복지 주일 전국 헌금과 세계 기아민 돕기를 위한 개인과 단체들의 자발적 헌금으로 전세계 70여 개 나라의 330개 긴급 구호와 개발 사업에 약 100억 원을 지원하였습니다.

2. 오늘날 이 지구상에는 끊임없는 자연 재해와 전쟁으로 수십억 인구가 굶주리거나 만성적 영양 실조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세계화는 경쟁력이 없거나 뒤떨어지는 가난한 나라와 사람들을 더욱더 빈곤의 삶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빈곤의 세계화는 새 천년기를 시작한 온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시대의 징표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물질 문명의 극을 달리고 있는 뒷그늘에 수십억 인구가 기아와 영양 결핍으로 아까운 생명을 접을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골고루 나누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는 충분한 자원과 능력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기심과 독점욕으로 이 자원과 능력을 다른 이들과 나누지 않고 있기에 이와 같은 죄스러운 현실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이기심과 독점욕은 불의한 죄의 구조로서 가난한 이들을 옭아매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은 분명 하늘을 향해 울부짖을 만큼 정의를 벗어났으며”(「민족들의 발전」, 30항), 이미 “굶주림에 짓눌린 사람들이 더 부유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사목 헌장, 9항)

3. “만민을 아버지로서 돌보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한 가족을 이루고 서로 형제애로 대접하기를 바라십니다.”(사목 헌장, 24항) 가족 중 누가 굶주리고 있다면 이를 외면할 이가 어디 있을 것이며, 자기 몫을 나누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한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자녀로서 모두가 한 형제자매이며, 구세주의 거룩한 피로 구원된 고귀한 존재입니다.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이 한 형제로 서로 사랑하며, 어렵고 고통받는 형제 모두를 함께 도와야 한다는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사랑의 계명은 국적과 인종, 피부색과 성별, 종교와 이념을 넘어서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4. 교회는 그 받은 바 소명으로 말미암아, 가깝든 멀든 고통받는 사람들의 비참함을 덜어 주어야 하며, 단순히 교회의 ‘남는 것’만이 아니라 교회의 ‘요긴한’ 것을 가지고서도 나누어야 한다는 소중한 가르침과 오래된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사회적 관심」, 31항 참조). 오늘날 고통받는 사람은 ‘무수하게 많은 굶주린 사람들, 곤궁한 사람들, 집 없는 사람들,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더 나은 미래의 희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이들을 외면하는 것은 거지 라자로가 자기 집 문간에 누워 있음을 모르는 체 하는 부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사회적 관심」, 42항 참조). 이제 한국은 국내의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한국 교회 역시 그러합니다.

5. 세계화되고 있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실천으로 다른 세계화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오늘날의 세계화가 가난한 이들에게는 어둠으로 다가오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세계화는 이 어둠을 거슬러 가난한 이들에게 빛이 되고 희망이 되는 세계화입니다. 이 빛과 희망의 세계화는 거창한 구호나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사업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생활 실천으로 시작됩니다. 이기심과 독점욕에서 해방되어 검소하고 단순한 삶을 추구함으로써 복음이 제시하는 청빈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많이 소유하기보다는 소유한 것을 내놓음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나눔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몰아가고 있는 죄스럽고 불의한 모든 제도와 구조에 동조하기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변화시키는 운동을 시작하고 참여하는 일입니다.

그 동안 세계의 기아민을 위하여 가진 것을 사랑으로 나누어 오신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03년 1월 26일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장 봉 훈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