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교회의 문헌
1995-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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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 정의평화위원회 1995년 제14회 인권주일 담화

정의평화위원회 제14회 인권주일 담화

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요한 17,21).

광복 50주년인 올 한 해도 이제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대망의 2000년대의 길목에서 맞이한 해방 50년은 다론 한편으로 남북 분단 50년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이기도 합니다. 광복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남과 북이 갈리어 이념과 체재의 벽을 높이 쌓으며, 결국 6 · 25라는 동족상잔의 엄청난 비극을 겪으면서 오늘날까지 서로 반목해 오고 있습니다. 더욱이 세계적으로는 동서의 냉전 체제가 무너지고 이념의 대립이 점차 해소되어 가고 있음에도, 이 좁은 국토 안의 우리 민족은 남과 북의 긴장 관계를 여전히 해소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광복 50주년의 이 뜻 깊은 해에 우리 교회는 다시 인권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민족의 진정한 화해와 일치를 앞당기는 데 필요한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또한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호소를 전 하고자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에(창세 1,27 참조) 인간 존엄성과 인권 신장은 교회의 사명에서 항상 중심 자리를 차지합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이러한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1982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2주일을 인권주일로 선포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 존중에 대한 우리 교회의 숭고한 소망을 천명해 오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인권 문제가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에 걸맞게 올바로 개선되도록 함께 노력해 줄 것을 정부 당국과 사회 각계각층에 끊임없이 호소해 오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러한 노력을 계속하는 것은 하느님의 정의를 이땅에 하루빨리 실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가 한결같이 지향하는 하느님의 정의는, 모든 인간이 동등한 품위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따라 인간으로서 존엄과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인간이 어떠한 체제의 객체가 아니라 역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나라는 그 동안 민주화의 꾸준한 성장으로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인권 상황이 예전보다 많이 호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땅에는 온갖 불의가 힘을 바탕으로 정의의 가면을 쓴 채 횡행하고 있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국가 권력의 남용으로 인한 각종 인권 침해,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며, 특히 정치적으로는 12 · 12 군사반란, 5 · 18 광주민주화운동 등에 대한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음으로써 사회적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전직 대통령의 엄청난 부정 축재 비리가 드러나면서 전국민의 허탈과 분노는 하늘에 닿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파문이 현 정치계에 불러일으킨 진흙탕 싸움은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분신을 날로 심화시키고 있으며, 다시 냉소주의와 허무주의가 고개를 드는 것이 아닌가 무척 걱정스러울 정도입니다.

정치 공동체는 공동선을 위해서 존재하고, 공동선 안에서 정당화되고 그 의의를 발견하며, 공동선에서 비로소 고유의 권리를 얻게 됩니다. 다시 말해, 공동선만이 정치제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며 기준입니다. 또 한 정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연유되고 위임된 것이기에 억압적인 형태로서가 아니라 자유와 책임의식에 뿌리박은 도덕적 힘으로서 전국민의 힘을 공동선으로 향하게 하는 권력이라야 합니다(사목헌장, 74항 참조).

그러나 우리 나라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대부분의 집권 정치 집단들은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북 분단의 상황을 교묘히 이용하여 국민을 속이고 자신의 이익을 챙겨오는 데 급급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따라 사회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질대로 떨어져 인간성 상실과 도덕성 실종이라는 뼈아픈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힘있는 자들의 각종 권력형 비리가 끊일 날이 없고, 인권이 침해되어 사회가 분열되고 혼란이 더하여 왔습니다. 이러한 악순환은 무엇보다도 정치 권력의 부패와 법집행이 공정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사회가 이러할진대 거기에 올바른 질서가 세워질 수 없고, 가치관의 혼돈으로 서로 반목과 갈등만이 깊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의 해결에 결코 실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부터 먼저 사랑과 화해를 이루고, 나아가 그 사랑과 화해의 정신을 사회 속에 심고, 그 속에서 자라게 해야 합니다. 교회 스스로 화해와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면 일치와 화해의 성사인 교회는 현주소를 잃고 말 것입니다.

국민적 화해와 힘을 모아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을 하나하나 치유해 나갈 때만이 남북의 진정한 화해와 일치를 앞당길 수 있다고 믿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는 서로의 인격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여기에는 국가와 사회, 각 개인의 올바른 도덕성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이를 위하여 누구보다도 먼저 정치 지도자들이 거짓과 위선을 떨쳐버리고 진실을 바탕으로 도덕성을 회복하는 데 앞장섬으로써 정직한 사회 풍토를 조성해 줄 것을 간곡히 호소하는 바입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불의에 협조하였다는 사실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와 희생을 바쳐야 하겠습니다. 특히 북녘땅의 형제들이 하루빨리 인간 존엄과 평화의 날을 누리게 되고, 기본적 인권의 하나인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우리의 기도를 중단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국인과 국가는 다같이 법질서를 지키고 인권과 생명을 존중하며 자연 환경을 보존하는 가운데 공동선 실현에 이바지하도록 촉구합니다. 정부는 공권력의 남용으로 인한 인권 침해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특히 힘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 권력형 비리를 한 점의 의혹도 없이 밝히 국민 들에게 신뢰받을 수 있도록 가일층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정부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 12 · 12 군사반란과 5 · 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철저한 진상 조사를 통해 억울하게 희생된 영혼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 피해자들한테 적절한 보상책을 구체적으로 마련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인권주일은 우리 교회의 전례력으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윤 기다리며 회개와 속죄로 구세주를 맞을 준비를 하는 대림시기의 둘째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회개하여라. 그리고 너희는 회개하였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마태 3,2.8)는 말씀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입시다. 또한 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이루어나가는 것이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이 시대의 교회에 주어진 사명임을 거듭 마음에 새깁시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라”(마태 3,4). 아멘.

1995년 12월 10일, 대림 제2주일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경갑룡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