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교회의 문헌
1995-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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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 사회복지위원회 제12회 자선주일 담화

사회복지위원회 제12회 자선주일 담화

자선은 인생의 의미를 찾는 길

의문의 인생

1. 오늘날 세계가 모든 분야에서 놀랍게 발전하였지만 아직도 인생의 의문에 대해 예민하게 느끼며, 자기 자신과 인생의 의미에 대하여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현대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위대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하는 고통과 죽음의 의미 는 과연 무엇인가?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얻은 승리는 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인간은 사회에 무엇을 줄 수 있으며 또 사회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 지상생활이 끝나면 무엇을 따를 것인가?”(사목헌장, 10장).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의 바쁜 삶의 틈바구니 속으로 섬광같이 들어왔다가 사라져 가는 이 신비스런 의문들에 대해 지나치지 말고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존재를 밑둥에서부터 혼들어놓은 이 짧은 생각들은 곧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2. 많은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실존적인 공허 속에 살고 있습니다. 무엇이 인생의 공허를 채울 수 있겠습니까? 허무주의나 냉소주의입니까? ‘무(無)’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존재(存在)’뿐입니다. 무(無)가 우리 인생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이신 분이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나 무(無)를 채울 수 없습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일생 동안 해야 할 사업은 무엇입니까? 인생에서 일차적인 일은 어떤 사업이 아닙니다. 건설업이든 상업이든 가르치는 일이든 정치하고 경제하는 일, 어머니와 아버지가 되는 일이 먼저가 아니라 참으로 인간 존재가 되는 일입니다.

자선: 주님과 만나는 길

3. 성탄절이 다가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그 길 속에 인간 존재가 되는 길이 있고 인생의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이 인간이 되셔서 사랑의 길을 펼치신 일은 이 세상이 “헛되고 헛된 것”이 아님을 하느님 스스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라는 허무주의의 비관적인 인생관에 새로운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길은 곧 사랑의 길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는 모든 분들께 하느님이 보여주신 이 사랑의 길을 권합니다.

오늘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자는 행복하다.”(마태 11,5-6)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난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하여집니다. 그 복음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고 ‘나’ 의 의미를 찾게 되는 일이고 나의 주위 사람들에게서 ‘너’를 만나는 일입니다. 이보다 더 큰 복음이 어디 있습니까? “진실히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자선은 이 지극히 작은 형제들, 곧 ‘굶주린 이들’, ‘목마른 이들’, ‘병든 이들’, ‘헐벗은 이들’,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잘해 주는 것이고, 노인들과 장애인들, 버림받은 아이들과 방황하는 청소년들, 우리 주위에 아직도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잘해 주는 것이고, 이들과의 만남은 곧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짐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만나는 과정 중에 나도 모르게 유한한 ‘나’는 무한한 절대자 하느님 ‘당신’, 곧 참 ‘나’를 만나게 되고, 여기서 인간 실존의 의미가 분명하게 밝혀집니다. 그러므로 자선활동은 곧 인생의 의미를 찾아 얻는 길이고, 의미있는 삶을 살게 해줍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과 같이 “인간은 언제나 공존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인간 실존의 근본 차원입니다”(요한 바오로 2세, 「희망의 문턱을 넘어서」).

사랑이 이끄는 삶

4. 사람이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사람을 살리고 이끌어갑니다. 우리는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다.”라고 말하지 “사랑이 두 사람 사이에 빠졌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이 인간보다 먼저이시듯, 사랑이 사람보다 먼저입니다. 이렇게 사람보다 먼저 있는 사랑에 빠져야 사람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은 흔한 일이지만 참으로 사랑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랑을 이끌어가려 하면 또다시 허무함을 맛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우리 삶을 이끌어갈 때에 이것을 자선이라 하고, 이때에 인생의 새로운 길이 열리고 인생의 의미가 밝혀집니다. 자선의 길, 사랑의 길은 인간 의미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의 길을 택하신 성탄절을 맞아, 우리 주위에 불우한 이웃을 찾음으로써 우리 다시 한번 삶의 의미를 되새겨 봅시다.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랑이신 그분을 따름으로써, 인간 허무와 공허가 채워질 것입니다. 사랑의 삶, 자선이 곧 인생의 의미를 되찾아 줄 것입니다.

1995년 12월 17일, 대림 제3주일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박석희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