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교회의 문헌
1984-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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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사목교서 “이 땅에 빛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사목교서

“이 땅에 빛을”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드디어 대망의 20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읍니다.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로 우리 선조들이 스스로 믿음을 찾아 얻음으로 시작된 그 거룩한 구원의 역사의 200돌이 되는 1984년의 문턱에 서게 되었읍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을 그리며 바라보았듯이 우리는 오늘을 그리고 바라보며 살 아왔읍니다. 그동안 우리는 1980년 “가정성화의 해”로부터 시작하여 81년 “이웃전교의 해”, 82년 “본당 공동체의 해”, 그리고 83년 “교구공동체의 해”를 거쳐 왔읍니다. 그런 가운데 81년에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 교회 사상 처음으로 여의도 광장에서 전국 신앙대회를 가져 이 땅의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기억에 아직도 새롭읍니다. 이것 역시 200주년의 전주곡이었읍니다.

이제 그 대망의 2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는 참으로 선조들의 순교정신을 이어받고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되어 “이 땅에 빛을” 밝히고자 합니다.

때마침 전례상으로는 이미 새해를 여는 대림절입니다.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어 우리를 당신의 생명과 빛, 구원의 은총으로 가득히 채워 주실 것을 기다리는 이 철의 의미를 생각할 때 이것은 곧 우리 모두가 200주년에 갈망하는 바로 그 은혜입니다.

특히 지금은 구원의 성년입니다. 한국 주교단은 200주년을 더욱 큰 구원의 은총의 해가 될 수 있겠금 이 성년을 전례상 1984년이 완결되는 그리스도왕 축일까지 연장해 주실 것을 교황 성하께 청하여 그 윤허를 받았읍니다. 때문에 이 200주년은 참으로 우리를 위해 “은총을 받고 또 받는”(요한 1,16) 거룩한 해입니다. 이 거룩한 해, 한국교회의 200주년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지난 세월 동안 우리에게 내려주신 그 모든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면서 성령께서 이 땅을 새롭게 하여 주시도록 더욱 열절히 기도드려야 하겠읍니다. 아울러 우리는 진정 회개하고 쇄신해야 하겠읍니다.

2. 또한 200주년은 우리를 위해서 큰 축제의 해입니다. 더우기 이 해에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이시고 세계의 목자이신 교황 성하께서 친히 우리를 방문하여 주실 것이고, 동시에 우리 모두가 갈망하고 갈망하여온 103위 한국 순교 복자들이 성인품에 오르시게 되었으니, 우리의 기쁨은 비할 바 없이 큽니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춤추어라!”(시편 96) 이렇게 환호하며 기쁨의 손뼉을 우리는 치고 싶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쁨의 축제를 단지 우리들만의 축제로 끝내어서는 안 되겠읍니다. 이 축제는 우리의 이웃과 기쁨을 나누는 축제, 온 겨레와 기쁨을 나누는 축제가 되어야 하겠읍니다. 뿐더러 이 기쁨은 온세계에 전달되고 확산될 수 있어야 하겠읍니다.

“내가 아 말을 하는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회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1~12). 수난 전날 저녁에 주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을 한국교회는 이 시간 깊이 명심해야 하겠읍니다. 동시에 이 말씀을 따라서 우리는 진정 서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이웃에게 두루 나누어야 하겠읍니다. 우리는 정녕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도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교회의 사목헌장 1항)라는 말씀을 스스로 고백할 수 있을 만큼 가난한 이들과 고통을 나눌 줄 아는 교회되어야 하겠읍니다. 200주년의 한국교회가 사회 속에서 이 같은 사랑을 산다면 우리는 200주년을 진정 이웃과 함께, 또한 겨레와 함께 하는 기쁨의 축제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런 사랑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날로 더욱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신비를 깊이 살 줄 알아야 하고, 우리 자신의 모든 것,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믿음과 용기가 있는가, 이 점을 우리는 200주년에 물어보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런데 실은 이것은 한국교회의 거룩한 유산이요 전통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순교 선열들의 순교 정신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분들은 결코 자신들의 구령만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으셨읍니다. 이웃과 겨레의 복음화를 위하여,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시기 위하여 목숨을 비롯하여 당신들의 모든 것을 바치셨읍니다.

돌이켜 보건대 200년의 한국교회의 역사는 이런 순교자들과 이에 못지않은 증거자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끊임없이 겨레의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가신 믿음과 사랑의 행적입니다. 초대교회에서 겪은 100여년간의 그 혹독한 박해는 물론이요, 그 이후 일제의 탄압하에서, 또는 해방후 공산치하의 이북에서, 또는 6·25 동란 중에 무수한 이들이 그리스도께서 가신 이 길을 가셨읍니다. 유신체제하에서 교회가 겪은 진통 역시 그 수난의 길의 연장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인권과 사회 정의를 위하여 하는 노력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루가 4,18) 교회 본연의 사명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한국교회가 초창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난을 겪어 왔고 그런 가운데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를 내었읍니다.

한국 교회가 오늘날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결함과 부족에도 분구하고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는 것은 “순교자의 피는 산자의 씨이다”라는 말씀 그대로 우리에 앞서 무수한 순교자들이 믿음을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이요, 또한 이에 못지않게 많은 증거자들이 복음의 덕과 사랑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3. 한국교회는 분명히 지금 발전하고 있읍니다. 온 세계 교회가 기이한 현상이라고 여길 만큼 우리는 지금 실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읍니다. 그 때문에 200주년의 한국교회를 세계 여러 곳에서 많은 분들이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읍니다. 또한 우리에게 찬사를 보내는 이들도 많읍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찬사에 만족만 하고 있을 수 없고, 우리 교회의 발전을 자랑만 하고 있을 수 없읍니다. 오히려 우리는 진정 200주년을 다시금 우리 자신을 살펴보는 반성의 때로 삼아야 하겠읍니다. 한국 교회가 수적으로 발전하고 또한 생동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과연 “이 땅에 빛을” 밝히는 교회인가? 이 땅의 소금과 누룩의 구실을 하는 교회인가? 라고 이 시점에 진지하게 자문해 보아야 하겠읍니다. 우리 중의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하여 그렇다고 장담할 수 있는 이는 없읍니다. 오히려 그렇게 빛이 되고 소금과 누룩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아직 너무나 부족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순교선열들의 그 얼이 오늘의 한국교회 안에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실로 의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200주년을 위해 200주년을 기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 곧 교회의 제3세기를 위해서 이때를 기리는 것입니다. 또한 그 세기를 향하여 밝히는 등불이 되기 위해 우리는 “이 땅에 빛을” 목표로 내건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이 성령에 힘입어 다시 남으로써 겨레의 오늘과 내일을 밝히는 믿음과 희망, 사랑의 등불 되고자 우리는 200주년을 기리며, 이땅에 구원의 은총이 샘솟고 북녘 어두움도 밝혀서 우리 겨레의 영원인 평화통일의 빛이 되고자 이 200주년을 기리며, 더 나아가 세계를 밝히는 구원의 횃불되고자 우리는 이 200주년을 기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태워 보자는 것이 이 시점에 있어서의 우리의 소망이요 또한 다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 선열들의 그 순교 정신, 그 믿음, 그 사랑, 그 복음정신에 투철한 삶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 시점에 이를 본받아야 하겠읍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가 200주년에 참으로 새로운 믿음과 정신으로 다시 나야 하겠읍니다. 그래야만 한국교회는 제3세기에 "이 땅에 빛을”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사제

4. 순교선열의 정신을 본받음에 있어서, 가장 앞서 본받아야 할 사람들은 우리들 사목자들입니다.

교회는 결코 사제들만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의 모든 생명과 활동은 사제들에게 크게 달려있읍니다. 사제들이 깊은 신앙과 기도 속에 살게 되면, 교우들이 자연히 이를 본받게 되고 온 교회가 참으로 성화됩니다.

우리 교회의 박해시대의 사제들은 바로 이런 분들이었읍니다. 이분들은 진정 양들을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신 착한 목자 그리스도를 닮아서, 생명과 삶 전체를 복음선교와 교우들 사목에 바쳤고 드디어 박해의 칼 아래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의 길을 갔읍니다.

대표적인 분은 말할것도 없이 우리의 조부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십니다. 김 신부님의 생애는 26세의 짧은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와 이 겨레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남김없이 바친 사랑의 삶이었읍니다.

우리는 김 신부님의 짧지만 파란만장의 극적인 생애를 여기서 다 서술할 수는 없읍니다. 그러나 그 짧은 생애는 사도 바오로께서 복음에 대한 열정과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온갖 환난을 겪은 그 모습(고후 11,23-33)을 방불케 합니다.

박해시대의 성직자들은 참으로 일편단심 주님을 사랑하였고, 교우들을 위해 목자로서 헌신했읍니다. 그분들은 항상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들의 몸안에 지니고 살았읍니다.(고후 4,10)

오늘날 우리는 이분들을 거울삼아서 우리 자신의 삶을 깊이 반성하고 쇄신해야겠읍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안에서 사제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읍니다. 급격한 신자수 증가와 예비자 폭주에, 각종 사도직 단체지도 등에 대부분의 본당 사제들은 자신의 시간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과로하고 있읍니다. 그밖의 사제들도 이중 삼중의 사목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봉사하고 있읍니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특히 도시의 가난한 이들 속에서, 또는 농촌의 빈곤 속에서 사랑의 봉사를 다하고 있는 사제들, 노동계와 학생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사제들, 또는 군종사제 및 해외교포 사제들과 같이 특수분야에서 어려운 여건 속에 일하고 있는 사제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노고에 감사합니다.

특히 빠뿌아 뉴기니아같이 산 설고 물 선 먼 나라에 가서 외방선교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있는 사제들을 생각할 때 그들의 노고에 대하여는 감사 이상의 각별한 애정을 아니 느낄 수 없읍니다. 그들은 실로 200년간 성장한 한국교회, 받는 교회로부터 주는 교회로 전환하고자 하는 한국교회, 200주년에 세계를 향하여 자신의 마음을 열고자 하는 우리교회의 상징이요 자랑입니다.

5.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을 다시 돌이켜볼 때 우리는 아직도 스스로 부족한 종임을 아니 느낄 수 없읍니다. 우리의 마음이 순교선열들의 그 고귀한 정신으로 가득차 있다, 특히 김대건 신부님이 지니셨던 그 목자의 전적인 사랑을 우리는 감히 지녔다고 말할 수 없읍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부족과 배신, 복음선교라는 우리의 사명에 대한 불성실과 태만,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의 복음정신의 결핍, 이 모든 것을 우리는 깊이 반성해야 하겠읍니다.

오늘의 교회가 이 땅에 빛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들 사목자들이 진정 빛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수난과 부활의 신비를 깊이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께서 “우리 안에는 죽음이 설치고 당신들 손에는 생명이 약동합니다.”(고후 4,12)라고 말할 수 있었듯이 우리 역시 사제로서 다른 모든 이를 살리기 위해 우리 자신은 죽는길을 택하여야 하겠읍니다. 이렇게 우리 사제들이 믿음의 인간, 사랑의 인간이 될 때에 교회는 참으로 이땅에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사제에게 특별히 요청되는 것은 복음적 청빈입니다. 이것은 곧 모든 이를 위하여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순교선열들을 본받아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입니다. 또한 이 길만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구원을 위해 본시 하느님이시면서도 당신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낮추신 그리스도, 십자가의 제물되신 그리스도를 닮게 합니다.

이는 주님과 교회, 곧 신자들을 향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런 사랑의 사람들이 되게끔 우리 마음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시는 성령(로마 5,5)께 간절히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겠읍니다.

사제는 특히 가난한 이, 약한 이, 병자, 억눌린 이 등, 그리스도께서 당신과 일체화시키신(마태오 25,35절 이하 참조) 그런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자신을 일체화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처럼 그들의 병고와 고통을 대신 질 줄 알아야 합니다.

사제의 사제다움은 바로 이 대신함에 있읍니다. 남의 죄까지도 대신 지고 가는 데 사제의 본질이 있읍니다. 그리하여 남을 위해 대신 죽는 데 사제의 삶이 있고, 그 완성이 있읍니다. 이것이 대사제이신 그리스도께서 가신 사제의 길입니다.

 

신학생

6. 우리는 이 같은 사제의 정신을 오늘의 신학생들에게도 강조하고 싶읍니다. 여러분이 받은 사제 성소는 이 땅에서 제2, 제3의 김대건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복음의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은 이미 신학생 때부터 이를 분명히 깨닫고 연학에 있어서뿐 아니라 기도와 수덕, 삶 전체에 있어서 주님의 손에 자신들을 송두리째 바치고 있었읍니다. 그분들은 신부가 되기 위해 선발되고 마카오로 떠날 때, 이미 목숨을 바치는 순교정신에 젖어 있었읍니다. 그렇듯 이분들이 굳센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 또한 하느님과 그리스도, 교회와 겨레를 위해 사랑으로 자신을 바친 분들이었기에 거룩한 순교자와 증거자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우리를 밝히는 등불이 되십니다. 참으로 이 땅의 빛이 되십니다.

오늘의 신학생들은 내일의 교회, 제3세기의 교회의 주인공들입니다. 제3세기의 교회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읍니다. 여러분은 이 역사적 사명의식을 철저히 가져주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제들이 되어주기를 부탁하며 이를 위해 우리는 모두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간구합니다.

 

수도자

7. 이제 남녀 수도자들에게도 같은 정신을 호소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누룩이면 여러분은 교회 속에서 다시금 누룩의 구실을 맡은 분들입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복음정신과 사랑으로 젖게 하고 날로 더욱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모시키는 데 있어서 수도자들의 기도와 삶은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수도자들은 이 사명을 깊이 깨닫고 있다고 믿읍니다. 그리하여 봉사와 영성의 심화를 위해서 주어진 여건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읍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복음의 그리스도의 모습, 그분의 청빈, 그분의 정결, 그분의 순명의 덕과 모든 이를 향하여 열린 그 마음의 사랑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전적인 비움으로써 당신을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사셨으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그 말씀을 완성하는 것이 당신의 음식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요한 4, 35). 이렇게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비운 그리스도는 이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명하셨습니다(필립비 2,8). 우리는 여기에 복음삼덕의 진수와 극치의 완성을 볼 수 있읍니다.

우리는 남녀 수도자들이 지금까지도 교회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봉사하고 있는 데 감사하면서, 더욱 깊은 영성으로써 우리 선열들의 순교정신을 본받아 이 땅의 교회를 위하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헌신해 줄 것을 믿고 당부합니다.

특히 수도자들은 성직자나 평신자들의 손이 닿지 않는 그늘진 곳,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는데 더욱 힘써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그늘진 곳에서의 일은 금방 성과도 없고 빛이 나지도 않읍니다. 오랜 인내와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뿐더러 죽기까지 괴로울 수 있읍니다. 그러나 “밀씨는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한 12,24참조)

우리 순교 선열들은 수도자가 아니었읍니다. 그분들은 아마도 대부분이 수도자가 있는지조차 몰랐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분들은 오늘의 수도자들과 비길 수 없는 경지의 복음적 청빈과 복음적 정덕과 순명과 사랑 속에 살았읍니다. 그분들은 참으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전적인 순명 정신으로써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치고 목숨까지 바쳤읍니다. 수도자가 아니면서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정덕을 지키며 사신 순교자 유 요한과 이 루갈다 동정 부부, 복녀 김 골롬바와 아네스 자매께서 오늘의 수도자 여러분들을 복음 정신 속에 지켜주시고 여러분의 마음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충만할 수 있도록 전구하여 주시도록 기도드립니다.

 

평신자

8. 이제 평신자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평신자에 대한 말을 성직자와 수도자 다음에 하는것을 평신자를 아직도 성직자나 수도자 뒤에 놓는 신분의식에서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실지 모르겠읍니다. 우리의 뜻은 결코 그렇지 않읍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는 교회내에서 그 책임상 쇄신을 해도 가장 먼저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는 교회내에서 봉사자로서의 정신을 투철히 가져야 하고, 그들의 믿음과 사랑에 따라서 교회의 쇄신과 교회의 생명과 활동이 크게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신자 여러분이야말로 한국교회의 주체요 모체입니다. 이는 단지 수적으로 많아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가정에서 성소가 나오고 여러분을 위해서 성직자와 수도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한국교회의 믿음의 토양이요 교회의 뿌리입니다. 교회의 모든 삶과 활동 및 발전의 원동력입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잘 아시는 바대로 선교사 없이 평신도의 힘으로 시작된 교회이고 박해 시대에는 거의 평신도의 힘으로 지켜지고 발전되어온 교회입니다. 이 아름답고 믿음직하고 거룩한 전통은 오늘도 우리 교회 안에 살아 있읍니다.

교회를 내적으로 이끌어가는 힘은 물론 성령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들 사목자들은 그 성령을 오늘날 평신도를 통해서 더욱 힘차게 역사하신다고 보지 않을 수 없읍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성령에 힘입어 오늘의 교회를 이끌어가는 견인차입니다.

우리 주교들과 사제들은 우리 교회의 모든 평신도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기도와 희생 봉사에 깊이 감사합니다. 또한 여러분으로부터 우리는 많은 격려를 받고 있고, 힘을 얻고 있읍니다. 우리 교회의 오늘의 발전은 여러분의 이 같은 희생과 봉사로써 이룩된 것입니다. 참으로 여러분은 한국교회의 자랑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와 함께 여러분도 더욱 깊이 순교선열들의 그 믿음을 본받자고 호소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단지 교회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세상을 위해서 빛이 되고 누룩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영혼과 같은 것이며, 세상을 구원의 빛으로 밝히고, 죄로 말미암는 세상의 부패를 막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변모시킴으로써 구원해가야 하는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읍니다. 교회는 실로 이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이 사명, 세상의 빛이 되고 땅의 소금이 되고 누룩이 되는 사명은 평신도 여러분을 통해서만 실천 가능합니다(교회헌장 33항 참조).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 평신자들이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에 따라서 선열들과 같이 순교정신에 투철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고, 복음의 사도들이 되어주기를 기원합니다.

9. 우리 선인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가장 소중한 것이었읍니다. 그것은 재산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었읍니다. 이분들은단지 어떤 교리를 믿었던 것이 아닙니다. 바로 살아계신 하느님, 만물의 창조주이시요, 주재자이시며, 모든 진리와 정의, 사랑의 원천이시며, 바로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을 굳게 믿었읍니다. 이분들에게있어서 천주 곧 하느님은 모든 것을 뜻하였읍니다. 반면에 천주 곧 하느님없이는 모든 것이 무였읍니다. 그 때문에 이분들은 재산을 뺴앗기고 목숨을 빼앗겨도 천주는 버릴 수 없다고 말하면서 기쁘게 순교하었읍니다. 또한 우리 순교선열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서 겨레의 구원을 위해서도 하느님의 말씀, 복음은 진리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임을 확신했읍니다.

이분들이 소망한 것은 복음이 널리 전파되어, 이 겨레 모두가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되고, 서로서로는 믿음과 사랑속에 하나되는 것이었읍니다. 그 때문에 이분들은 박해속에서도 복음을 전파함을 가장 앞선 임무로 알았고, 심지어 체포되어 배교를 강요당하는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관장과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 교리를 변론하고 그들 역시 믿음을 받아들이도록 호소했읍니다.

우리 순교자들은 박해자들에 대한 미움이나 원한을 조금도 품지 않았읍니다. 오히려 천주를 모르고, 천주의 말씀,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한는 그들을 참으로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였읍니다. 한국순교사를 보면 순교자들의 바로 이 같은 마음자세와 그 믿음의 옳음을 깨닫고, 관장이나 포졸 중에서 그 관직을 그만두거나 또는 개종하여 스스로 순교자가 된 예도 있읍니다.

우리 순교선열들의 정신은 이같이 고매합니다. 이분들은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겨레를 사랑하였읍니다. 우리 겨레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자신의 재산이나 목숨까지도 바쳐야 한다면 바칠 마음자세를 언제나 지녔던 분들이 우리 순교선열들이었읍니다.

그렇게까지 자신을 믿음과 사랑으로 비우는 분들이었기에, 그분들은 박해하에서 서로 사랑하기를 친형제같이 하였읍니다. 그리하여 박해가 길어짐에 따라 쫓기며 살아야 했던 선열들은 산골 깊숙이 서로 의지하며 살기 위해 신자 마을을 많이 형성하게 되었는데, 그런 곳에 사는 신자들의 서로 사랑하는 모습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신자공동체를 방불케 하는 것이었습니다(사도행전 2,44∼47)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선열들의 이런 믿음과 사랑의 삶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국교회의 모든 신자가 이런 깊이의 믿음에 살고 또한 서로 사랑한다면, 그리고 민족 복음화의 열정에 불탄다면 우리는 진정 이 겨레에 불탄다면 우리는 진정 이겨레를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곧 이 땅의 빛이 될 것입니다.

200주년에 우리는 모두 이것을 다짐합시다. 그리하여 정녕코 오늘과 내일에 이 겨레를 밝히는 빛 이되고 이 겨레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누룩이 됩시다. 우리는 이를 모든 신자들에게 호소합시다. 모든 가정에 호소합니다.아버지 어머니들에게는 이 정신으로 여러분의 자녀들을 믿음 속에 기르도록 호소하고 또한 가정을 성화시켜 모든 가정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집이 될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하도록 호소합니다.

 

젊은이

10.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여러분이 찾는 진리, 정의, 이상, 미래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다는 것을 확언합니다. 아니,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 복음 자체이시고, 따라서 여러분이 찾는 그 모든 것이심을 천명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소망하는 아름답고 정의롭고 인간적이고 발전한 조국의 미래 역시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서 찾을 수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말하고자 합니다. 젊은이 여러분! 우리 선열들이 목숨바쳐 증거한 그 믿음을 간직하십시오. 그분들이 목숨바쳐 섬기고 사랑한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선열들처럼 그 믿음과 사랑으로써 여러분 자신을 바칩시오. 그러면 여러분 안에는 생명이 약동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이와 함께 여러분의 미래는 참으로 밝을 것입니다. 알파요 오메가이시며 미래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호소를 꿈 많은 젊은이들에게,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이들에게, 삶의 의미를 찾으며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이웃의 고통을 보고 아파하는 젊은이들에게, 소외되고 실의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합니다. 여러분은 물론 찾고 있는 답을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속에서 금방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박해와 시련, 죽음의 어두움과 고통 속에서도 인내와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이겨낸 순교선열들과 같이 여러분도 꾸준히 믿음 속에 살면 여러분은 머지않아 우리의 권고가 옳았다는 것을 깨닫고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결코 돈과 권력, 향락으로 여러분을 유인하는 세속의 유혹에 속지 마십시오. 그런 것에 여러분이 빠지면 여러분은 스스로를 파탄의 길로 이끌어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은 곧 실망과 좌절에 빠지고, 여러분 스스로의 신원조차 잃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이 추구하는 자기성취는 결코 그런 것에 있지 않읍니다.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얻으려 하면 잃고 잃으면 얻는다.”(마태오 16,25)는 성경 말씀대로 인간의 자기성취는 자신을 비우고 남과 이웃, 사회와 민족, 세계와 인류공동체를 위해서 사랑으로 자신을 얻고 바치는 데 있읍니다. 바로 순교선열들처럼 믿음과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데에 인간의 자기성취가 있읍니다.

한국교회의 미래, 한국사회의 미래는 이런 여러분에게 달려 있읍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같이 빛나는 내일, 아름다운 미래를 향하여 이 그리스도의 길을 함께 가고자 합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1. 선교 200주년에 우리가 이같이 순교정신을 본받고자 하는 것은 순교정신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또는 교회를 확장하여 이 땅에서 큰 세력의 종교단체를 이룩하고자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집적 간접 언급한 데서 잘 드러나듯이 우리 스스로 그분들이 사셨고 또 목숨바쳐 증거한 그 믿음의 사랑을 이 시대에 이 사회 속에서 살기 위해서이고 또한 그럼으로써 우리 사회와 우리 겨레를 그 믿음과 사랑으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물질 만능과 가치관의 혼돈으로 말미암아 방향 감각을 잃고 어두움에 잠긴 이 사회에 구원의 빛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순교선열들은 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주, 역사의 주재자, 모든 생명의 원천, 모든 진리와 정의와 정의의 원천, 모든 사랑의 원천으로 믿었읍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뜻, 그분의 진리 그분의 정의, 그분의 사랑을 모두가 깨닫고 살 때에 개인의 구원뿐 아니라 사회와 겨레의 구원이 있다고 믿었읍니다. 또한 현세 질서 역시 여기에 입각할 때에 바로 서고 나라가 발전하고 번영과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을 믿었읍니다.

무엇보다도 선열들이 이 믿음을 통하여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 인간 소명의 고귀함과 인생의 의미였읍니다.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현세 복락만을 추구하고 있던 당시에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구속된 인간은 현세를 넘어 영원을 위해 있다는 것을 깊이 믿었읍니다. 그러기에 모든 인간은 신분이나 계급, 빈부의 차이를 넘어서 모두가 존엄하고 평등하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와 품위를 지녔음을 확신했읍니다. 당시의 우리 사회는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존경받는 때가 아니었읍니다. 인간은 신분과 계급으로 구분되었고, 이에 따라 그 대접도 달랐으며 뿐더러 인간의 존재 가치까지 달랐읍니다. 양반과 상인의 분별은 엄격하였고 서로간에는 상하관계 이상의 관계가 있을 수 없었으며, 노비와 천민은 주인과 양반들로부터 받는 천시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나서부터 죽기까지 숙명으로 알고 감내해야 하였읍니다. 바로 이런 사회풍조 속에서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깨닫고 또한 이를 실생활에서 구현하고자 하였읍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는 인종의 차별 자유인이나 노예의 차별, 남녀의 차별을 넘어 모두가 하나이고(갈라 3,28), 모두가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형제임을 깊이 인식했읍니다. 그러기에 신자들 사이에서는 신분이나 계급을 떠나서 참으로 친형제 같은 사랑이 있었읍니다. 이것은 당시의 유교적 전통 가치관에서 볼 때에는 반란이요, 혁명이었읍니다.

또한 당시의 우리 사회에서는 지배계급의 권력의 횡포와 탐관오리의 부정부패가 극심한 때였읍니다. 이로 말미암은 일반 국민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읍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만이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읍니다.

이분들은 나라의 공직에 있는 사람은 백성을 위해서 있어야 하며 결코 그 반대가 아님을 확신했읍니다. 또한 아무리 나라의 법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도리에 어긋나고 양심에 위배될 때에는 이를 지킬 의무가 없을 뿐 아니라 이는 악법으로서 반드시 철폐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지니고 있었읍니다. 그 때문에 이분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펴는 천주교를 비록 나라에서는 사교로 단정하고 이를 어기는 신자들을 국사법으로 다루어 극형에 처했지만 이 법에 순응치 않고 오히려 용감히 그 법에 의해 처형될 것을 알면서도 묵숨을 바쳐 믿음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선열들은 박해자를 미워하거나 그들을 원수같이 생각한 일은 한 번도 없었고 오히려 그들이 과오를 깨우치고 회개하기 위해 말로써 권할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했읍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진리를 위해, 정의를 위해, 또한 사랑과 평화를 위해 순교한 분들이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입니다.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임하시기 위해 순교한 분들이 우리 선열들이었읍니다.

12. 이제 200주년의 우리는 이 정신을 이어 받아야 하겠읍니다. 오늘 우리는 보다 더 뚜렷하게 이 모든 진리가 복음의 가르침을 깨닫고 있읍니다. 그러기에 200주년에 선열들을 본받아 순교 정신에 산다는 것은 단지 좁은 의미의 신앙, 이웃과 사회, 나라와 세계와는 관계없는 자기 구령만을 위한 신앙을 순교 정신으로 산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선열들을 본받는다면 선열들과 같이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평등을 믿고 또한 모든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 그 사랑과 평화를 위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선조들의 시대에 비하면 많이 달라졌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윤리나 도덕 및 인간성의 희생 위에 이루어진 물질의 발전입니다. 금력과 권력의 우상화, 이기적 개인주의와 현세적 쾌락이 오늘날 우리 사회와 우리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사랑이 메마르고 가정이 파탄되어 가고 사회 전체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가고 있읍니다. 한마디로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하느님의 진리, 하느님의 정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수는 날로 증가하고 교회는 도처에 서 있는데도 어찌하여 현상은 이러한지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 신자로서 심각히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결국 이른바 그리스도 신자인 우리 자신이 믿음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복음의 가르침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 200주년에 우리가 근본적으로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문제는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믿는 사람인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가? 그의 정신, 그의 마음을 아는가? 이것이 200주년에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할 핵심적 문제입니다.

그 때문에, 이 시기에 우리는 마음의 눈으로 순교선열들을 바라보면서 그분들이 본받고 따른 그리스도께로 향해야 합니다. 복음의 그리스도, 산상수훈을 비롯하여 구원의 말씀을 주시는 그리스도,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죄인들을 위로하시는 그리스도, 그들을 용서하시는 그리스도, 가난한 이, 약한 이, 천대받는 이들의 친구 되시고 형제 되시는 그리스도, 마침내 온 세상 모든 이의 죄를 지고 수난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 드디어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이의 부활과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께로 우리 마음의 눈을 돌리고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께로 나아가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그 그리스도의 삶을 오늘 이 시간, 이 이 사회 속에서 우리 자신이 구체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억눌리고 버림받는 이웃 속에서 그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해야 합니다.

13. 그리스도의 사랑을 산다는 것은 단순한 동정이나 관심 표시나 제도적 자선행위나 사회복지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처럼 벗을 위하여 자기 생명까지라도 바치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남을 받아주고 봉사할 때에 참사랑을 사는 것입니다. 가진 이는 없는 이와 가진 것을 나누고, 남을 판단하지 말고, 남을 용서하고, 마음 상한 이와 화해하고, 우는 이를 위로해 주고, 찢어진 마음을 싸매어 주고, 한 맺힌 마음을 풀어줄 때에 우리는 참사랑을 사는 것입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땅의 부정과 부패에 무감각하고 이 땅의 억눌린 사람들을 외면하고 이 땅의 슬픔에 젖은 사람들을 지나치고 바로 이웃의 고통을 나눌 줄 모른다면 이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말할 수 없읍니다.

나아가 이 땅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데올로기로 말미암은 이 나라의 분열과 분단을 체념하고, 빈부의 격차 도농의 격차 지역의 격차로 말미암은 내적분열을 보고도 이를 외면하여 자신 속에 안주하면 이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 용서와 화해, 진리와 정의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참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을(루까 4,18) 이 현실 속에서 실현시켜야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 생명까지도 바쳐서 이 사명을 지켜갈 때에 교회는 진정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읍니다.

오늘날 교회까지도 포함하여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 가장 큰 불행은 결코 물질의 부족에 있지 않읍니다. 사랑의 결핍에 있읍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무엇보다도 기술이나 물질적 발전에 비하여 감소되어 가고 있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읍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불의나 부정, 인명의 경시를 비롯하여 모든 인간 유린의 죄악이 범람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면 하느님이 가장 아끼는 것이 인간이요, 하느님이 가장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느님은 성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인간을 사랑합니다(요한 17,23). 그리하여 하느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시기까지 하셨읍니다(요한 3,16). 그 외아들 그리스도는 온 세상 모든 이를 위해 당신의 생명까지 바치셨읍니다. 이것이 곧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를 믿는 것이 또한 참된 믿음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는데 우리는 스스로를 사랑할 줄도 모르고 이웃을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 200주년의 한국 교회가 깊이 반성해야 할 점은 바로 여기에 있읍니다.

14. 사도 바오로는 사랑이 없으면 훌륭한 설교도, 깊은 신학지식도, 기적도, 봉사와 투신까지도 소용없다고 하셨읍니다(고전 13장). 그러기에 우리는 200주년에 참으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든 것에 앞서 찾고 또한 살아야 합니다.

한국의 모든 신자, 모든 가정과 사도직 활동 단체, 모든 교구와 전국의 하느님 백성이 믿음 속에 하나되어 이렇게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 사랑을 산다면 이는 참으로 얼마나 큰 구원의 등불, 희망의 등불이 되겠읍니까? 이것이 곧 “이 땅에 빛을” 밝히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이상입니다. 그러나 결코 바라만 보고 있을 이상이 아니고 반드시 성취해야 할 이상입니다. 이것은 수난의 길입니다. 그러나 부활과 생명의 길입니다. 이 길은 그리스도께서 앞서 가신 길이요, 우리 순교 선열들이 뒤따른 길입니다. 그러기에 200주년에 우리도 반드시 가야 하는 길입니다.

오늘의 한국 사회는 우리 안에서 이런 삶의 모습을 찾고 있읍니다. 우리가 입으로 전하는 그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고 있읍니다. 우리의 가슴 속에, 우리의 삶 속에, 우리의 눈빛과 얼굴 속에 이 그리스도를 찾고 있읍니다.

그만큼 한국 사회는 스스로 의식하든 못하든 상관없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사랑이요, 빛이신 그리스도에 굶주리고 있읍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불리움을 받고 간택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이 땅에서 “메시아적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교회헌장 9항 참조).

“메시아적 백성”, 그것은 이미 그 표현에서 풍기듯이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와 공동운명체가 될 수밖에 없읍니다.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듯이 이 땅에서의 메시아적 백성인 우리 역시 이 겨레의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이 십자가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뿐더러 이 십자가는 결국 우리 자신의 전적인 헌신을 구할 것이요, 우리는 그 위에 높이 달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이 길을 갈 때에 한국사회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백인대장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시는 광경을 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마르코 15,39) 하며 예수가 누구신지 비로소 알아보셨듯이 우리 사회도 우리가 이 겨레를 위해 자신을 남김없이 바치는 모습 속에서 비로소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가 바로 이 겨레를 위한 구원의 때입니다. 그 때에 또한 우리는 진정 “이 땅에 빛을” 밝힐 수 있읍니다.

 

1983년 11월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
한국 천주교 주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