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교회의 문헌
1984-1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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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증거의 해” 주교단 사목교서

1985년 “증거의 해”

한국 천주교회 주교단 사목교서

 

1. 103위 시성은 우리의 새로운 과제입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제3세기를 시작하며 한국 주교단은 교회의 모든 신자들과 함께 이 땅에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엮어나가기 위해 우리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가다듬고 우리의 갈 길을 비추어 보고자 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한국 천주교회의 200주년을 기념하며 103위 한국 순교 복자들의 시 성, 교황 방한 등 크나큰 행사를 무사히 치루었습니다. 과연 한국의 교회가 전 세계의 교회에 놀라움과 감동을 불러일으킨 해였습니다. 200여년 동안 파묻혀 온 우리 순교 선열의 피가 거름이 되어 그리스도의 복음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모습이 만방에 빛난 해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에게는 더욱 자랑스럽고 보람된 해였습니다. 이 모든 은총을 우리에게 부어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200주년이 끝난 오늘은 안도의 한숨을 쉴 때가 아닙니다. 이제는 내일을 바라보며 우리가 가야 할 새로운 신앙의 길을 개척해야 할 때입니다. 200주년과 103위 시성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어떤 다른 민족보다 바로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의미심장한 증표이며 새로운 과제입니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는 그분들을 단순히 성인으로 공경할 뿐 아니라 그분들의 삶을 알고 연구하고 따르는 데 있습니다. 1984년이 과거 200년간의 한국 교회의 역사를 총정리하고 순교 선열의 업적을 세상에 드러내는 해였다면, 이제부터는 그분들의 모범을 우리 생활 속에 구체적으로 사는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다행히 이 땅을 찾아주신 교황 성하께서는 한국 교회가 이제부터 본받아 나가야 할 순교 선열의 모범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남겨 주셨습니다. 또 우리 자신도 지난 3년 동안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를 통하여 우리의 현실을 반성하고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지표를 새롭게 설정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왔습니다. 이에 우리 모두는 1985년을 한국 교회가 살아갈 제3세기의 출발점으로 삼고 우리들의 목자가 남기신 말씀을 실천하고 증거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국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가 한마음으로 이를 이루어 나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도록 호소하는 바입니다.

 

2. 우리의 자각

우리가 이어받은 산앙의 유산은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해 주셨다는 복음입니다. 천지창조 때부터 사랑해 주셨고 역사 속에서 인간의 온갖 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철저한 사랑의 배우자로 선택된 우리 모든 인간은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분이 사랑하시는 다른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전세계에서 이를 증거해 왔고 또 200년 전부터 우리의 순교 선열들도 이를 증거하기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바쳤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증거의 역사를 계승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 특히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는 사랑을 볼 때 인간은 모든 인종, 문화, 관습, 계층, 지위, 능력, 가문에 관계없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숭고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계승하여 증거하는 제자들로서 오늘날의 문화, 사회, 제도, 국가 안에서 이 인간의 품위와 존엄을 증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또 이를 저해하는 요소에 대해서는 있는 힘을 다해 싸워야 할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 복음의 진리를 약화시키려는 유혹, 막강한 힘과 수단으로 세속을 지배하는 물질주의에 대한 부저항과 패배주의, 악을 악으로 대항하려는 유혹, 이 모든 비복음적 요소에 대항하여 굳세게 싸워야 할 것입니다.

 

3. 모든 교우들에게

이 땅의 순교 선열들은 복음적인 삶을 구현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첫째, 양반과 상민, 부자와 빈자, 모두가 하나로 어울려 함께 기도하고 함께 고통받으며 형제적 사랑의 유대를 쌓아 나갔습니다.

둘째, 스스로 믿음을 갖고 공부하고 어떤 보상도 인정도 바라지 않으며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셋째, 가정을 통해 자녀들에게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고 함께 기도하며 신앙을 성숙하게 가꾸어 나갔습니다.

이러한 순교 선열들의 모범을 오늘의 우리 사회와 교회 안에 이어받는 것이 그분들의 후예인 우리 모두의 사명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목표로 자산의 신앙 생활을 성숙하게 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첫째로 모든 개인주의적 신앙 자세를 탈피하고 이웃 형제와의 유대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위, 생활수준, 사고방식, 계층 등의 모든 격차를 극복하고 만민의 아버지이신 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웃의 걱정을 내 걱정으로, 이웃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서로 돕고 나누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모든 교우는 교회가 성직자나 소수 지도자들의 것이 아닌 바로 나의 교회요 우리의 교회라는 인식 하에 누구의 보상이나 인정을 바라기보다는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제자요 사도로서 그리스도를 옆사람에게 전하고 증거하기 위해 모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복음을 연구하고 묵상하며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감도하심을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가정 교회를 확립하여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가정을 통해 신앙을 실습하고 일상 생활과 신앙 생활의 조화를 배워 나가도록 마련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가정이야말로 청소년들이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자리요 복음이 가장 효과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는 터전이기에 모든 부모는 자녀들의 올바른 영신적 성장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4. 성직자들에게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 겨레에게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 예수님의 현존을 드러내기 위해 특별히 간택된 이들입니다. 여러분이 보여주어야 하는 예수님은 인간을 위해, 특히 가장 버림받은 이들을 위해 자신을 내던져 사랑하시다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무엇보다도 우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 위하여 그분의 생각과 마음을 여러분 안에 깊이 새기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봉사와 활동은 기도 안에서 출발하여야 올바른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을 닮기 위해 여러분은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 중에 가장 고통받은 이, 잊혀진 이, 가난한 이, 무시당한 이들을 특별히 사랑하십시오. 오늘날의 우리 교회 안에는 산업근로자, 농어민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작다는 사실을 교황께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주 예수께서 성한 사람, 건강한 사람들보다 병든 사람들을 위해 더욱 애쓰신 것처럼 여러분의 사목 활동도 보잘 것 없는 이듣윤 소중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총을 전달하는 성사의 관리자로서 우선 자신에게 맡겨진 성사를 동해 여러분 자신이 사제생활의 양식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성체성사에서 특히 자기 삶의 참 뜻을. 모든 힘의 원천을, 헌신적 봉사의 기쁨을 찾으십시오. 또 고백성사에서 자주 주 예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이러한 성사적 은총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완성해 나갈 때 신자들도 여러분으로부터 풍성한 영혼의 양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5. 수도자들에게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장소에서 어떤 형태의 수도생활을 하여도 그 수도생활의 목적은 오로지 가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몸으로 증거하는 데에 있습니다. 아버지께 순종하시고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으시며 종의 신분을 취하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고 종의 모습이 되기까지 자신을 낮추어 가난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행동과 생활로 증거하는 것이야말로 수도자들에게 맡겨진 최고의 사명이요 영예입니다.

여러분들은 동료 수도자에게 또는 함께 일하는 성직자에게 또는 여러분을 대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바로 가난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시어 아무리 낮은 인간에게도 친구가 되시고 형제가 되신 예수님의 모습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기다리는 구원의 주인이십니다. 여러분은 이 예수님의 모습을 오늘 또다시 재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물질과 금력의 소유만을 갈구하고 하느님의 최고의 피조물인 인간마저도 물질과 금력에 의해 평가되고 판단되는 오늘의 시대는 여러분들의 이러한 증거를 어느 시대보다도 더 각별히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6. 어두움을 몰아내고 빛을 밝힙시다.

우리 순교 선열들이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혼신을 다할 때 그들은 이 땅의 여러 종류의 어두움에 휩싸여 있음을 안타까워했고 올바른 천주 공경이야말로 그 어두움을 몰아낼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오늘의 이 땅도 또한 그렇게 밝지만은 못합니다. 정치의 영역에 드리운 불의의 어두움, 경제의 영역에 드리운 불황의 어두움, 교육의 영역에 드리운 불신의 어두움, 이런 어두움들이 우리를 안타깝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해 오늘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다만 우리의 증거는 스승이 제자에게 주듯 일방적인 교화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겨레와 함께 나누고 화해하며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가진 모든 정신적 물질적인 부를 우리 겨레와 함께 나누고 우리 자신이 회개하면서 이 겨레 안에 축적되는 미움과 대립에 용서와 화해를 촉진시킴으로써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황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이 ‘삶의 증거, 회개를 통한 화해, 그리고 사랑의 나눔’이라는 세 큰 별을 띄워 이 땅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빛을 밝혀야 하겠습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 찬미 예수.

1984년 12월 2일 대림 첫 주일
한국 천주교회 주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