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교회의 문헌
1985-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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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평화위원회

노동관계법 개정을 국회에 청원

다음은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회장 유현석 외 23명의 위원들이 1985년 5월 15일 국회에 제출한 노동관계법 개정 청원서의 전문이다.

 

청원서

 

청원인들은 모두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의 위원들로서 1984년도에 전개한 바 있는 노동관계법 개정을 위한 서명 운동에 참여하여 주신 우리 교회 안팎의 많은 분들의 뜻을 모아 다음과 같이 청원합니다.

 

청원의 취지

1. 노동자의 단결권을 확고하게 보장하기 위하여 현행 노동조합법은,
(가) 모든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게 하고, (나) 복잡한 노동조합 설립 신고 서류를 간소화하며, (다) 설립 신고만으로 노동조합의 설립을 인정하고, (라) 노동조합에 대한 행정 관청의 지나친 간섭을 배제하며, (마) 부당 노동 행위를 엄벌할 뿐 아니라, (바) 제3자 개입 금지 조항을 폐지하는 내용으로 관계 조항을,

2. 노동자의 단체 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현행 노동쟁의조정법은,
(가) 노동조합이 쟁의 행위의 결정을 할 수 있게 하고, (나) 노동 쟁의는 신고 알선 조정 등의 과정에 행정 관청의 개입을 축소하며, (다) 노동 쟁의를 위한 절차를 간소화하고 유보 기간을 단축하며, (라) 제3자 개입 금지 조항을 폐지하는 내용으로 관계 조항을,

3.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노동 조건의 보장을 위하여 현행 근로기준법은,
(가) 모든 노동자가 차별 없이 근로기준법에 의한 보호를 받도록 하고, (나) 노동 시간을 줄이며, (다) 최저 임금제를 실시하고, (라) 부당 해고의 방지 대책을 마련하고, (마) 임금의 우선 변제권을 강화하며, (바) 직업병과 산업 재해로부터의 보호 대책을 마련하는 내용으로 관계 조항을,

각 개정하여 주시기를 청원합니다.

 

청원의 이유

우리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는 복음을 토대로 하느님 백성의 시대적 사명감을 자각시키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발전을 추진함에 있어서 인간의 존엄과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는 데 기여할 목적으로 구성된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 기구로서 1984년도 정기 총회의 결의로 노동관계법 개정을 위한 서명 운동을 벌인 바 있습니다.

이 운동에서 우리 교회의 안팎에서 십 수 만의 많은 선의의 사람들이 참여하였던 바, 이 운동을 전개한 우리 교회의 뜻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1. 노동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동참하는 행위입니다.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동참하게 됩니다. 또한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유익한 물자를 얻고 일상적인 삶에서 행복을 증진하게 됩니다. 이렇듯 노동은 존엄하고 신성한 것이어서 어느 누구도 노동을 기피하거나 게을리할 수 없으며, 더욱이 노동자를 천시하거나 탄압을 할 수 없다는 것이 하느님의 공의이며, 이 땅의 정의입니다.

오늘날 현대 국가에서는 기본적인 인권으로서 노동 기본권을 설정하여 놓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헌법에서는 이 노동 기본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노동 기본권의 보장 여하가 근대와 현대를 구분하는 기점일 뿐만 아니라 현대적 인권 체계의 중심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2. 우리나라의 노동 현실은 하느님의 공의에 어긋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임금 노동자 총 수는 공칭 800만으로 그 부양가족을 합치면 총인구의 과반수에 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노동 계층은 절대다수를 차지하여 국민 경제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경제기획원의 통계를 보면 하루 10시간 이상 노동을 해도 생계비에도 미달되는 저임금 노동자가 70%에 이르고 있고, 생산직 근로자의 과반수 이상이 월 10만 원 이하의 임금을 받고 있으며 매년 10만여 명이 일자리를 잃어 실업자가 되고, 산업 재해도 83년의 경우 15만 명으로 지난 5년간을 치면 64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이는 큰 전쟁을 치르는 것과 같은 정도입니다. 또 국제 노동 기구(ILO)의 조사 통계에 의하면 70년대 10년 동안 우리나라 노동자의 일주일 평균 노동 시간이 53.7시간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 일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노동자의 긴 노동 시간과 저임금 그리고 열악한 노동 환경 등은 노동자를 가난과 소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으며 생존권마저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동 조건은 더 이상 노동을 신성하고 고귀한 것으로 머물러 있게 하지 않고, 오히려 노동을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또한 어찌할 수 없이 해야 하는 고역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신성한 노동을 천시하는 풍조를 만연시켜 노동에 대한 하느님의 공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노동 현장에서 하느님의 공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현행 노동관계법이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활동을 어렵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우리나라의 불행한 노동 현실은 현행 노동관계법에 기초해 있습니다.

1980년 12월 31일에 개정된 현행 노동관계법은 5·17 이후 국회의 기능이 정지되고 이를 대행한 국가 보위 입법 회의에서 통과한 것으로 근로기준법의 적용 기준을 좁혀 장시간 노동과 부당 노동을 막을 수 없게 하였고 노동조합법에서도 노동조합 설립 요건을 강화하여 노조 설립을 어렵게 하였을 뿐 아니라 직능별, 지역별, 산업별 노조의 설립을 억제하고 있습니다. 노동쟁의조정법도 쟁의 행위 유보 기간의 설정, 단체 행동권의 본질적 규제 등의 조항을 두어 노동 기본권으로서 쟁의 행위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닌 최대한 억제와 방지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종전까지는 정당했던 노동 쟁의가 그 실제적 행사에 있어서 절차, 기술상의 제약으로 인하여 “불법적 쟁의”가 되었고, 이제 “합법적 쟁의”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산업 평화를 해치고 사회를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노동 기본권의 확립은 민주 제도의 균형 있는 발전의 초석입니다.

우리 교회는 “노동자들을 진실로 대표하여 경제생활의 올바른 질서를 수립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 노동조합을 자유로이 조직할 권리와 아무런 보복의 위험 없이 조합 활동에 참여할 권리는 기본 인권에 속하는 것을 인정되어야 한다.”(회칙 「어머니와 교사」 중에서)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를 방문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성하께서도 회칙 「노동하는 인간」 속에서 “노동자들의 결속과 단체 행동은 어느 특정한 인간이나 계층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불의한 구조에 대한 저항이다. 이 저항은 사회 도덕적 측면에서도 또 복음 안에서 정당한 것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렇듯 노동 기본권은 인간 존엄에 기초를 둔 기본권으로서 어느 다른 기본권보다 더 확실하게 보장되어야 할 당위성을 가지며 경제 발전의 질서 지속을 위해서도 절실하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으로 증명되었습니다. 노동 기본권의 보장은 산업 사회의 지속적이고 정상적인 발전을 위한 기초적 조건이며, 이것이 확보될 때 노사 관계의 진정한 안정을 기대할 수 있고 경제 발전의 고도화를 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가 인간의 존엄과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는 사업의 일환으로서 노동관계법 개정 운동을 전개한 취지는 이로써 분명합니다.

요컨대 현행 노동관계법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노동 기본권을 오히려 부당하게 제한하고 침해하는 내용의 규정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으므로 마땅히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하여 인간다운 생활을 향유할 수 있도록 개정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헌법에 보장된 노동 기본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기 위하여는 현행 노동관계법은 최소한 청원의 취지에서 밝힌 내용으로 관계 조항이 개정되어야 하리라 믿고 이 청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지난 총선 과정에서 드러난 성숙된 국민의 자각과 여망 속에 새롭게 개원되는 제12대 국회에서는 이 문제가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처리되어 모든 국민이 염원하는 바 민주 발전의 초석으로 노동 기본권이 확립될 수 있게 현행 노동관계법이 개정되도록 조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985년 5월 15일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청원인: 유현석, 김병상, 김대봉, 황우정, 이돈명, 김말룡, 김어상, 최재선, 한성인, 함세웅, 황인철, 구중서, 노완석, 성종석, 안승길, 양한모, 이길재, 이영숙, 이찬우, 이홍우, 정호경, 최용록, 하경철, 한용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