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교회의 문헌
1985-12-01 00:00
2021-03-2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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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도 주교단 사목교서 “성체와 가정”

1986년도 주교단 사목교서

성체와 가정

 

성체와 가정의 해를 맞이하면서

1. ‘증거의 해’로 사목목표를 정했던 지난해, 우리는 순교 선조들의 정신과 삶에 대한 교황 성 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현실적으로 현존하고 계심을 이웃에게 증거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자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사도로서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내적 쇄신과 회개로 그리스도와 일치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은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삶의 보금자리이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기본요소가 되는 가정이 성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성화는 성체를 통하여 더욱 깊어지고 완성됩니다.

2. 따라서 가정성화의 원천도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모든 가정은 성체의 신비를 자주 묵상하고 그 안에서 생활함으로써 가정의 올바른 가치를 재인식하고 나아가시는 이웃 가정문도 성화되도록 사도적 가정으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 현실은 경제성장과 복지 증진을 이룬다는 명목 하에 거대한 생산체제의 사회 구조로 변하면서 전통적 가치관은 전도되었고, 따라서 정신적인 것보다는 물질적인 것에 치중하는 사조 때문에 인간성 상실과 더불어 사랑과 생명의 경시 풍조가 만연돼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현실은 고유한 전통적 가정에 대한 가치관을 변질시켰고 이로 인하여 현대의 수많은 가정이 파탄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3. 이에 주교단은 1986년도 한국교회의 공동 사목목표를 “성체와 가정”으로 정하였습니다. 이 교서는 모든 이에게 가정의 중요성을 깨우치고, 사랑과 생명의 원천이신 성체께 대한 흠숭과 찬미를 통해 많은 문제로 번민하는 가정을 도와주며, 참된 가정생활을 성체 안에서 회복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정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를 깨닫게 하고, 다른 가정을 위한 사랑의 사도직도 수행함으로써 모든 가정을 그리스도께 봉헌하여 성체 안에서 깊은 사랑의 일치를 이룸으로 이 사회가 더욱 밝고 평화 넘치는 세상이 되도록 함에 그 목표를 두었습니다.

 

I. 혼인과 가정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

4.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가 당신 생명에 참여하고 당신 사랑에 일치하도록 부르십니다(1요한 4,8). 태초에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신(창세 1,26-27)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랑과 친교의 능력과 의무, 즉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인간의 기본 소명이고 타고난 소명입니다(가정공동체 11). 하느님께서는 가정을 이루는 혼인을 통해 이 사랑과 일치의 소명을 수행하도록 하셨습니다. 혼인으로 한 남자와 한 여자는 온전하고 독점적이며 영구적인 일치를 이루며, 이를 위해 서로는 모든 것을 주게 됩니다. 혼인으로 이루어지는 이 일치는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는 혼인의 품위를 구원의 성사로 높이셨을 뿐 아니라 혼인과 가정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은혜를 내려주시며 그리스도 정신으로 충만하게(사목헌장 48) 하셨습니다. 그래서 혼인성사로 하느님께서는 그 가정 안에서 항상 친근하고 개별적인 방법으로 현존하시기에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가정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이 “가정교회”에서는 부모가 말과 모범으로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첫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교회헌장 11).

5. 부부간의 사랑은 육체적인 사랑뿐 아니라 지 · 정 · 의 및 영적인 것을 다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사랑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랑을 당신 은총과 특별한 은혜로 완성시켜 주시고 높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부부간의 사랑은 혼인의 고유한 행위로만 독특하게 표현되고, 실천을 통해 더욱 완전해지며 성장됩니다(사목헌장 49).

남편과 아내가 서로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자녀에게 생명과 사랑을 주면서 이웃들과도 사랑을 나눌 때, 이들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볼 수 있는 사랑의 표징, 즉 성사가 됩니다(에페 5,22-35).

이같은 사항은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상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6. 혼인제도와 부부 사랑은 그 절정이라고 보여지는 자녀 출산과 교육을 지향하고 있습니다(사목헌장 50). 원래 사랑은 본질적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기에 부부간의 사랑도 부부에게서 끝나지 않고 가장 귀중한 선물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선물은 새로운 인간에게 생명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부는 하느님의 창조적 능력에 참여하는 협력자가 됩니다. 따라서 부부는 인간 생명을 전달하고 교육하는 고유한 사명을 부여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녀는 혼인의 가장 귀중한 선물이기에 부부는 자녀 출산에 대해 늘 감사해야 하며 비자연적인 방법으로 자녀 출산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부부 사랑의 살아 있는 표상이고 부부 일치의 영원한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II. 현대의 가정문제

7. 대다수의 부부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가정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사도직을 수행하고, 믿음과 기도의 정신으로 자녀에게 신앙교육을 시키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모들에게 힘찬 격려와 찬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 주위의 많은 가정이 유산이나 단종, 아니면 비자연적 산아 제한이라는 큰 죄악과 그릇된 풍조로 전통적 가치관이 무너져 심한 갈등과 번민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더구나 현 정부는 정책적으로 젊은 부부에게 한 자녀나 두 자녀만을 갖도록 강한 압력을 가하면서 적은 수의 자녀를 갖는 이에게는 세금이나 의료 및 주택에 대한 혜택 등을 주면서까지 비자연적 산아제한과 단종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으며, 따라서 양심적인 이들에게 심한 갈등을 주는 불행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책과 사회풍조는 “자녀는 부의 표징이며 하늘의 축복”이라는 우리의 전통적 가치관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관 상실은 이기주의를 만연케 했고 전통적 가족제도를 무너뜨려 가정문제를 더욱 심화시켰을 뿐 아니라 결국엔 인간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의 자녀수는 어느 누구의 강압도 없이 자유로운 마음으로 부모 양심에 따라 자연법적인 방법으로 결정되어야 하며, 부부간의 충분한 대화와 상호 인격존중, 그리고 책임의 나눔과 자제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가정공동체 32). 이 자연적 방법은 교회에서 지도 계몽하고 있으며 윤리적으로도 타당하고 알기 쉬우며 안전하고 부작용도 전혀 없는 방법이므로, 이를 널리 보급함으로써 그릇된 사회풍조에 휘말리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8. 현대 사회는 가정생활보다는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을 더 우선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에 가정 중심적인 사고방식은 구시대적인 것으로 착각되어 가족 상호간의 만남은 적어지게 되었고 따라서 대화의 부족으로 인한 가정부재 시대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가정에서 심신의 안식을 얻지 못하는 많은 이들이 부정행위나 과음 및 도박, 가출 등을 유발하여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통적 가정에서는 부모에 대해 효도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며, 자녀를 인간답게 교육하는 것이 그 목표였으나 가정제도의 가치관 변질 영향으로 많은 노인들은 안주할 가정을 잃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가정 밖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III. 성체와 가정

9. 그리스도인의 혼인은 다론 성사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성화와 그리스도 신비체의 건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흠숭을 그 목적으로 하기에(전례헌장 59), 가정성화의 기반은 성세성사에 있으며 성체성사에서 그 극치를 이룹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혼인성사는 미사 중에 집전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에서도 성체와 혼인의 깊은 관계를 찾을 수 있고 성체가 혼인의 원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체는 교회와 그리스도 사랑의 계약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부부 자신의 혼인계약이 흘러나오고, 그 안에서 혼인생활을 새롭게 하는 원천을 만나게 됩니다(가정공동체 57).

그래서 가정생활을 성체의 신비에 비추어볼 때 희생, 예배, 사랑, 친교와 일치, 현존, 용서, 치유의 의미를 깨닫게 되며 성체를 통해 가족은 이런 은총을 얻을 힘과 용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체는 가정생활을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근원이 되어 주시기에 성체 안에서 가정생활의 의미를 찾을 때 그 가정은 성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1) 일치를 이루는 성체

10. 그리스도께서는 성체를 통하여 모든 이가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가족들도 성체를 모심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 서로간의 깊은 일치를 이루게 되며 교회의 더 넓은 일치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체를 모시고 사는 가정의 가족은 혈연의 일치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깊은 일치를 갖고 지낼 수 있습니다.

(2) 사랑과 나눔의 신비인 성체

11. 성체는 자비의 성사이며 일치의 표징이고 사랑의 맺음입니다(전례헌장 47).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십자가상에서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봉헌하시고 영생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당신 몸과 피를 나누어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사랑과 나눔의 신비를 깊이 깨우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늘 가정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배우자를 위해 헌신하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주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사랑의 마음과 나눔의 신비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성체의 사랑과 나눔의 신비를 깊이 깨달으면서 가정 안에서 생활한다면 우리도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매일매일 하느님께 우리 가정과 자신을 봉헌하는 사제직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나눌수록 풍요로워지고 고통은 나눌수록 적어지듯이 가정 안에서도,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 및 치유의 은혜도 함께 내려주시는 성체를 통해 모든 것을 나누고 사랑함으로써, 서로는 용서하며 화해하여 아픈 상처를 치유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성체 안에서 모든 것을 나누며 살아갈 때 가정 밖의 이웃과도 모든 것을 나누며 살 수 있게 됩니다.

(3) 생명과 기쁨의 성사인 성체

12. 성체는 교회의 모든 활동을 활기 있게 하며 그리스도인 생활 전체의 원천이요 결정입니다(교회헌장 11). 따라서 성체가 없다면 교회는 힘을 잃고 죽게 됩니다. 교회의 역사가 진리로 입증하듯이 성체는 교회를 만들고 건설합니다(성 토마스 아퀴나스). 그러기에 성체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심으로써 인류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시어 우리의 삶에 희망과 기쁨을 주셨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부부는 헌신적으로 사랑과 희생을 나눔으로써 생의 활력과 기쁨을 풍성히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만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가정에서도 가족은 서로를 위해 죽을 수 있고 썩을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힘과 은혜는 성체 안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가족 각자가 서로를 위해 죽을 수 있을 때, 그 가정은 넘치는 기쁨과 생명의 풍성함을 맛보며 사는 가정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4) 성체 안에서 활동하는 사도적 가정

13. 그리스도인 가정은 모두 다 이 세상 안에서 복음을 증거할 소명을 갖고 있으며 이 소명을 수행하기에 필요한 지혜와 힘은 성체께로부터 나옵니다.

그같은 사도직을 수행할 힘과 영양을 받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일치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온 가족이 늘 미사 성제를 통하여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감실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 깊은 흠숭과 찬미를 드리며 그분께 감사하는 생활을 할 때, 온 가족은 깊은 일치를 이루고 사랑을 나누는 가정교회가 됩니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가정교회가 되어 여러 가지 문제로 번민하는 이웃 가정에 말과 행동으로 기쁜 소식을 전하고 그리스도께서 그 가정 안에도 현존하실 수 있도록 사도적 가정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5) 가정적인 본당 공동체를 이루는 성체

14. 본당 공동체는 모든 가정이 구체적으로 전례생활을 익히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한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서로의 영신적 친교를 이루는 곳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는 본당 공동체 안에서 공동 기도와 성사, 특히 미사 성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과 사랑을 깊이 체험하며, 그 사랑 안에서 모두가 한가족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체를 중심으로 한 가정적인 본당 공동체는 기쁨과 활력이 넘치는 믿음과 사랑과 봉사의 공동체로서 각 가정에 희망과 용기를 주게 됩니다. 따라서 가정적인 본당 공동체가 희망과 기쁨을 주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성체께 대한 깊은 신심이 계속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목교서를 맺으며

15. 인류의 행복한 미래는 가정에 달려 있기 때문에 모든 이는 가정의 가치와 요구조건을 충족시켜 올바른 가정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교회는 가정에 대한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가정은 그 본래의 위치를 되찾고 현대사회에 만연된 가정에 대한 그릇된 풍조를 불식시켜 나가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 가정은 가정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계획을 기쁨과 확신을 갖고 이웃에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은 성체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와의 일치된 삶을 통해 열성적으로 가정 사도직을 수행하고, 아울러 성체 안에 모든 가정을 일치시켜, 가정적인 본당 공동체를 이루어 그 안에서 서로가 한가족임을 깨닫도록 힘써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 주위의 모든 가정들도 성체 안에서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가정생활을 하도록 도와줌으로써 이 사회가 더욱 밝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쇄신되기를 바랍니다.

“가정의 왕이신 주 그리스도께서는 가나에서처럼 모든 가정에 현존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든 가정을 그리스도와 마리아와 요셉에게 맡깁니다.
복음이 모든 가정을 밝히는 빛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가정공동체 86).

1985년 12월 1일, 대림 첫 주일에
한국 주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