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교회의 문헌
1985-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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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단 현장생활 체험 종합 보고서

주교단 현장생활 체험 종합 보고서

1986년 1월 15일부터 23일까지 태국 Hua Hin에서 BISA VII 회의가 개최된다. 각국 주교단 힌장생활 체험 보고를 중심으로 진행될 이번 회의에 한국 대표로는 윤공희 대주교, 나길모 주교, 통역으로 인성회 최재선 사무국장이 참석한다.
다음은 한국 주교단의 현장생활 체험 종합 보고서이다.

우리 주교들은 지난 8월 27일부터 29일까지 고통받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과 삶의 대화를 나누고 그들과 일치를 모색하기 위하여 그들 삶의 현장에서 생활 체험을 하였다.

이는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가 계획한 제7차 사회주교 연수회(BISA VII)의 일환이며, 또한 한국 주교회의가 “증거의 해”로 선정한 금년에 주교들이 시도한 하나의 증거의 표지이다. 이는 동시에 지난 7월 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안드레아 김대건 사제 순교자 대축일에 주교단이 발표한 사회 사목교서의 가르침을 가난한 이들 속에서 실제 체험으로써 주교들이 스스로 확인한 것이다. 우리는 진정 기도하는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 속에 현존하시며, 인간 역사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하여 순례자의 자세로 이 체험을 하였다.

생활 체험을 통하여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한 이들이 걸머지고 있는 멍에와 고통, 그들이 당면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농민들은 근래에 우리나라가 추진해 온 경제 사회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어 상대적인 빈곤감에 좌절하고 있었으며 많은 농민들이 점차 소작농으로 전락되어 가고 있었다. 또한 낮은 농축산물 가격과 불리한 유통구조로 인하여 농민 생활이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농가 부채는 점차 늘어가고, 노동력의 도시 유입으로 인하여 노인들과 부녀자의 노동 가중을 초래하고 있었으며, 자녀들의 교육이 가장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고 의료비 부담은 감당키 어려운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농민들의 권리와 이익을 지켜주고 보호하여야 할 단체나 기구는 오히려 농민들의 짐을 무겁게 하는 역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농업정책을 다루는 관료들은 농민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농민 위에 군림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아름답게 형성되어 온 농촌공동체는 파괴되고 있었으며 농민은 활기를 잃고 두려움과 열등감, 피해의식과 좌절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일부 농민들은 자신들의 인간 발전을 위하여 의식을 심화시키고, 조직과 협동을 통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려고 하지만, 이들은 철저히 감시당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권리 주장은 물리적인 힘으로 저지당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경제발전을 위하여 막중한 공헌을 하여 왔으나 이들 역시 소외되고 있었다. 이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 열악한 작업환경, 많은 산업재해 속에서 자신을 보존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또한 인간으로서 감당키 어려운 주거 환경과 식생활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회복할 수 없는 신체적 질병과 정신적 방황 속에서 그들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노동자들의 권리와 이익을 지켜주고 보호하여야 할 단체나 기관들은 무력하게 되어가고 있었으며, 노동정책을 다루는 관료 역시 노동자들의 입장에 서기보다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활동을 위험시하고만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신성하여야 할 인간의 노동은 인간의 삶을 얽어매는 굴레와 멍에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노동자들은 삶의 의욕을 잃고, 좌절 속에서 매일의 삶을 이어 가고 있었다.

일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인간 발전을 위하여 의식을 심화시키고, 조직과 협동을 통하여 자신들의 권리 주장을 드러내려고 하나, 이들 역시 철저히 감시당하고 탄압을 받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공산주의자로까지 지목되고 있었다.

도시 빈민들은 경제 사회 발전의 그늘 속에 가려져 있었으며 삶의 마지막 자리로 계속 밀려나고 있었다. 그들의 주거환경은 인간으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여건이었으며, 발전된 도시 중심부만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이와 함께 제반 위생시설의 불비로 인한 심각한 의료 문제, 안정된 수입을 보장받을 수 없는 취업 문제, 가정 파탄의 문제, 자녀 교육 문제, 청소년 문제 등의 복합적인 문제가 이들의 삶에 빈곤과 소외와 좌절의 양상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특별히 근래에 이르러 철거와 재개발의 문제는 이들 삶의 자리를 밑뿌리로부터 뒤흔들고 있었으며 이로 인하여 이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들의 삶의 자리가 뿌리째 뽑혀질 때 일어날 수 있는 집단적 행동은 쉽사리 예견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상황을 체험을 통하여 확인하면서 가난한 이들이 이렇도록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게 된 근본 원인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추구하여 온 개발과 발전의 실체는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들기 위한 진정한 의미의 개발과 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개발과 발전이 아니었던가를 심각하게 자문하게 되었다. 즉 모든 인간을, 인간 각자를 총체적으로 발전시키는 인간 개발이 아니라 개발과 발전을 위하여 인간이 한갓 수단으로 이용되어온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결국 이들의 문제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제도와 구조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야 할 당위적, 도덕적 의무를 저버린 데서 파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난한 이들의 고통과 좌절이 이러한 외부 여건에서 기인하는 슬픈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가난한 이들 속에 감추어진 귀중한 보화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즉 많은 ‘가난한 이들이 고통 속에서 좌절하고 체념하며 패배의식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농촌에서, 공장에서, 탄광에서, 빈민지역에서 우리는 열심히 살고, 부지런히 일하며,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좌절의 현장에서 우리는 희망을 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넣어주신 생명력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 생명력은 가정의 깊은 유대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으며, 자녀들에게 거는 희망, 부모 형제들에게 쏟는 애정, 나아가서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가진 바를 나누는 자그마한 기쁨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가난한 이들은 현실의 좌절 속에서도 끊임없이 작은 희망을 붙잡고 있었다. 오늘보다 나아지리라는 작은 희망, 다음 세대에 거는 작은 기대와 희망이 이들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희망이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느냐는 가장 간단한 답변 속에서 우리는 생명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가난한 많은 사람들이 착하게 살기를 원했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었으며, 정직하게 살고자 했으며, 물질과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으며, 사랑과 정, 작은 기쁨과 희망을 원하고 있었다. 한이 쌓이고 상처받은 이들에게서 우리는 슬픔과 분노를 느꼈으나 이들 속에 감추어진 작은 보화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기쁨을 느꼈다. 더더욱 이들의 궁극적 희망이 절대자를 향하여 있음을 보았을 때 우리는 한국인의 깊은 종교적 심성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가난한 이들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가 확산되고 있으며 가난한 이들의 인간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고, 자발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가 나타나고 있는 사실을 목격하였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복음적 동기로 헌신하고 있는 이들을 만난 것은 큰 감동과 기쁨이었다.

농촌지역에서의 가톨릭 농민회, 노동지역에서의 가톨릭 노동청년회와 노동사목 종사자들, 빈민지역에서의 빈민사목 종사자들은 세상의 오해와 편견 속에서, 심지어는 보이지 않는 압력과 드러난 탄압 속에서도 가난한 이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헌신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마음으로부터 격려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특별히 세상의 가치를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가난의 삶을 택하여 초기 교회공동체와 같은 모습으로 함께 기도하고 가진 바를 나누며 사는 공동체를 발견하였을 때 가난한 이들 속에 현존하고 있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과의 짧은 생활 체험 속에서 우리는 그들의 신원을 다시 한 번 생각하여 보는 기회를 가졌다. 그들은 구조적으로 강요된 가난 속에서 고통스러운 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 속에 가진 자와 배운 자, 지배자들의 가치관, 의식구조, 인생관과 생활양식이 스며들어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심지어는 동경심마저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볼 수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복음적 가치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을 발견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고통과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즉 가난한 이들이 외부적으로 강요된 삶의 틀에서 해방되고 가진 자들이 회심할 때 참다운 복음화가 이 세상과 모든 인간에게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난한 이들의 삶을 체험하면서 그들이 바로 이 세상과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있는 이들인지도 모르며 그러기에 그들의 삶 속에 우리 모두를 복음화시키는 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를 겸허히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동일시하셨던 가난한 이들에게 교회는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 얼마만큼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가난한 이들을 단지 동정과 자선의 대상으로만 보아온 것은 아니었던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노력을 통하여 그들 스스로가 인간답게 되어가는 것을 볼 때 교회도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삶을 나누고 그들의 인간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는 이들을 더욱 격려하고 지원하여야 할 것이며 그들이 끝까지 복음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 속에서 생성되어 오는 영성을 확립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이 특수사목으로 머무를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사목 안에서 유기적인 통합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짧은 기간의 현장생활 체험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가난한 이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보고 그들 속에 숨겨져 있는 많은 보화를 발견하고, 그들의 노력을 목격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많은 이들을 만나며 느낀 귀중한 체험들은 우리 교회를 새롭게 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체험들은 교회를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교회로 변화시키는 중요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의 고통과 슬픔, 희망과 기쁨을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진정으로 그들의 인간 발전에 헌신하는 교회의 모습을 세상 속에 드러낼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기도드린다.

1985년 8월 30일
주교단 현장생활 체험 참가 주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