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교회의 문헌
1997-03-06 00:00
1,201
[사목 교서] 대희년을 바라보며

대희년을 바라보며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구세주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지 2000년을 기념하는 대희년을 앞두고, 한국의 모든 주교들이 한 목소리로 여러분께 말씀드리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1. 시간과 역사의 신비
우리는 “한 ‘세기’가 아니라 한 ‘천년기’를 넘어서게 될”(「제삼천년기」, 33항) 뜻깊은 시점을 눈앞에 두고,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우선 역사와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손길을 새롭게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1-1. 두 번의 천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로마 제국의 막강한 힘과 각계의 지도자들 그리고 그들의 부추김을 받은 민중들까지 하나로 뭉쳐 이룬 거대한 세력 앞에, 엄청난 죄목을 쓰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 간 한 나자렛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는 시간은 은폐되었던 진리를 햇빛 아래 그대로 드러냈으며,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진정한 승자와 패자가 누군지를 어김없이 가려냈습니다. 그리고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희생이야말로 참된 삶 곧 영원한 생명임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천하를 호령하던 제국과 함께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들은 그동안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만 데 비해, 그리스도의 교회는 “겨자씨처럼 자라나 그 가지들로 전 인류를 덮을 만큼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제삼천년기」, 56항).
1-2. 세상에 지난 2000년 동안 나타났던 다른 많은 사건들도 당장에는 분간하기 어렵고 흐릿하게 보이다가, 비슷한 모양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그 진면목이 드러나고 선과 악, 진실과 허위가 밝혀지곤 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유물론 체제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규모와 빈틈없이 짜여진 사상적 틀을 내세우고 등장했던 이 무신론 체제는 새로운 세기를 눈앞에 두고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인류의 반을 그 영향권 아래에 두고, 그 기세는 점점 더 확장될 것으로만 생각되었던 체제가 내부로부터 붕괴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가 시간의 흐름 속에 분명히 밝혀진 것입니다.
1-3. 우리나라는 지난 한 세대 동안 참으로 광범위하고 깊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해묵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국민 전체가 기울인 노력은 상당한 정도의 성공을 거두어, 이제는 경제력만 가지고 생각할 때, 세계 무역 시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나라로 성장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경제 제일주의는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어두움을 함께 몰고 왔고, 우리 사회는 지금 온갖 방면에서 그 병을 앓고 있습니다. “잘 살아 보세!” 하며 외치던 노래 마디에 현혹되어 참으로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고 있었습니다.
1-4. 그러는 동안, 눈앞의 이익만을 좇는 사람들의 탐욕으로 자연이 무참히 파괴되고, 땅과 하천, 심지어 지하수까지 심하게 오염되고 있으며, 하늘과 대기조차 더러워져서, 먹을 것 마실 것에 이어 숨쉴 공기마저 위협받고 있는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현실이 이처럼 심하게 파괴되고 더럽혀지고 있는 것은, 그것이 더욱 무서운 파괴와 오염을 가리키고 경고해 주는 현상이라는 데에서 그 심각성이 더해지고 있습니다.

2. 오늘 우리 사회의 현실
2-1. 오늘날 참으로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의 정신이 빠른 속도로 오염되고 무너져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철권으로 나라를 이끌며 산업화 과정의 주역을 담당하던 대통령 자신이 심복의 손에 비명에 삶을 마쳤고, 그의 뒤를 이은 이들도 엄청난 죄목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이 군사 정권 특유의 구조와 생리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한 국민들은 문민 정부의 등장과 함께 그 어두운 역사도 영원히 끝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의정 파행과 대형 정경 유착 사건은 우리 사회에 부정과  부패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을 철저히 밝히고 책임자들을 정확하게 가려 정의를 세워야 함은 물론입니다.
2-2. 그러나 오늘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느 누가 자신만은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정상적인 사회에서라면 깜짝 놀랄 일이 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관행이 되어 버려서, 우리는 너무나 자주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마저 잃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과 부패의 공범자가 되고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고 돈이 없으면 되는 일이 없다는 생각이 현실적인 힘을 가지고 사람들의 의식 속에 남아 있는 한, 부정과 부패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경제 정의가 무너진 사회 속에서 돈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절망감에다가 잘못된 구조에 대한 원한까지 겹쳐서 자기 통제력을 잃고 사회 전체를 극도의 불안 속으로 몰아 가는 세력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최근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또 일부 특권층은 세상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릴 만큼 극도의 사치와 낭비에 젖어 있습니다. 이처럼 개인과 사회가 앓고 있는 중병을 고칠 수 있는 길이 과연 있는 것입니까? 있다면 그것을 우리가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3. 구원은 어디에?
3-1.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로 이처럼 병든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병자, 죄녀, 강도, 매국노 등 개인과 공동체 생활에서 사람들의 삶이 고장나 있을 때 이를 고쳐 주심으로써, 의사로서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어두운 세상을 밝혀 주고 썩어 가는 사회를 다시 건강하게 할 사명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이 사명을 수행할 수가 없게 되면 그들은 세상에서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 그런 소금은 아무데도 쓸데없어 밖에 내버려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 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마태 5,`13-16)
3-2. 그런데 우리가 이런 빛의 역할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빛이신 그리스도를 참으로 만나고 그분의 빛을 속 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으며, 복음의 증거자가 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이루어진 예수님과 한 사마리아 여인 사이의 만남(요한 4,`1-42)에서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3-3. 남자를 다섯씩이나 거쳤고 지금 동거 중인 남자가 또 있지만 그 가운데 참으로 남편이라고 할 만큼 진실한 인간관계를 맺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그 여인의 깊은 목마름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은 저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렸는데 선생님네들은 예배드릴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하는 말에서, 우리는 그 여인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가장 깊은 목마름, 곧 절대자에 대한 갈증도 채우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상, 우물물에 대한 갈증은 이처럼 더욱 깊은 목마름들을 보여 주는 상징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그 깊은 목마름이 채워졌을 때 그 여인이 버리고 간 물동이는 이를 웅변으로 말해 줍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깨닫고 생명 깊숙이 받아들였을 때, 그 여인은 부끄러워 피해만 다니던 동네 사람들에게 달려가 메시아를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3-4.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우물물, 인간관계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세 겹의 목마름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도 드러나듯이, 사람은 우물물에 대한 갈증에 못지않게 인간 상호 간의 진정한 사랑으로만 해소할 수 있는 목마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물물을 마시지 못하면 육체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듯이, 다른 사람에게서 오는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할 때에도 사람의 정신적 생명은 죽고 맙니다. 어머니가 가정을 버리고 떠나면, 버려진 아기가 세월따라 육체는 멀쩡하게 자라지만 인간성은 극도로 황폐해질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들을 통해서 근래에 자주 확인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영혼 속에 깊이 서려 있는 하느님에 대한 갈증도,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그의 영적 생명이 유지되지 못하고, 삶 전체가 쉽게 균형을 잃고 맙니다.
3-5. 우리 사회가 인간의 내면적 가치는 팽개쳐둔 채, 여기서 우물물로 상징되는 물질적 풍요만을 위해서 그야말로 정신없이 뛰는 동안, 사람들의 정신은 무서운 속도로 균형을 잃고 파괴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깊은 갈증을 속에 덮어 둔 채, 우물물을 가지고 그것을 달래 보려 한 사마리아 여인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허겁지겁 탐닉해 보지만, 어디서도 만족을 얻지는 못합니다. 메시아를 만나, 영원히 다시 목마르지 않게 하는 물을 얻어 마시기 전까지, 그들은 “생수를 버리고 갈라져 새기만 하여 물이 고이지 않는 웅덩이를 파고 있는”(예레 2,13 참조) 사람의 가망 없는 몸짓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전하고 복음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서 참 기쁨과 행복한 삶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4.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
4-1. 그리스도 신앙인들만이라도 그런 방식으로 주변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이 세상이 이처럼 어둡고 부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실상, 광대한 바다를 썩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약간의 소금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많은 음식을 썩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국민이 모두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어야만 사회 전체를 부패로부터 방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적은 수라도 짠맛을 간직한 신앙인이 있으면 온 사회가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열 명의 의인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도시 전체가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온 국민이 신앙인이라 해도, 그들이 짠맛을 잃었다면, 사회를 위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4-2. 그런 점에서, 2000년을 앞두고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신앙인들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소금의 짠맛을 다시 찾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새로운 대림 시기”(「제삼천년기」, 23항)를 사는 자세로 그리스도를 우리 각자와 공동체의 삶에 깊이 받아 모셔야 합니다. 그런데 ‘메시아 맞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대림과 관련해서 우리가 먼저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2000년 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대부분이 바로 이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한다고 하면서도, 그분이 막상 오셨을 때에는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심지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4-3.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 맞이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관해서 한마디로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마태 3,`2).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으로 전도를 시작하십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런 정신을 이어받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밝히십니다. “모든 희년의 기쁨은 무엇보다도 죄의 용서에 기초한 기쁨, 회개의 기쁨입니다”(「제삼천년기」, 32항). 그리고 이어서 덧붙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제2천년기가 그 끝에 이르면서, 교회는 자기 자녀들의 죄과를 더욱 철저하게 의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가치에 영감을 받은 삶을 세상에 증언하기는커녕, 참으로 반증거와 추문의 행태를 보이는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에 빠져 들어 그리스도와 그분 복음의 정신에서 벗어났던 역사의 모든 시대를 그 자녀들에게 상기시켜 주어야 합니다”(「제삼천년기」, 33항).
4-4. 회개는 글자 그대로, 삶의 태도를 고치고, 관성에 젖어 별 생각 없이 걸어가던 걸음걸이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의 잘못을 비판하고 제도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세상이 변화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은 나 자신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변할 때에 세상이 바뀝니다.
4-5. 그런 점에서, 우리는 최근 한 세대에 걸쳐서 교회가 양적 성장을 구가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빠져 들었던 어떤 반증거의 행태,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이 없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현실 문제와 관련해서 그동안 우리 각자가 취한 입장과 태도를 두고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연히 나서고 개입해야 할 불의를 보면서도 온갖 이유를 내세워 이를 묵인한 적은 없었는가? 복음에 기초하지 않은 평화를 내세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는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려 들지는 않았는가? “악을 조성하고 유지시키거나 그것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 어떤 종류의 사회악을 피하거나 근절시키며 적어도 줄여 나갈 수 있는 자리에 앉은 이들의 나태, 비겁, 침묵에 의한 방조, 비밀 공모, 무관심 등으로 해서, 이를 그대로 방치할 때; 또 세상을 개선하는 일은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고 나서, 그걸 구실로 자기의 작은 세계에 안주하는 사람; 제법 고상하기까지 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들을 늘어놓으면서 의당한 노력이나 희생을 거부하는 인간들도 모두 개인적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화해와 참회」, 16항). 사회악과 개인의 책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이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나는 지금까지 어떤 입장을 취해 왔는가?
4-6. 반대로, 사회악을 고발하면서, 체제와 구조에 나타난 악에 시선을 집중하는 동안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철저히 살피는 데 소홀함은 없었던가?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면서 정작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일은 없었던가? 결국 남의 잘못을 찾아내고 비판하는 일이 하나의 습성으로 굳어져서 자신은 전혀 잘못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독선적 인격으로 고착되지는 않았는가? 정의를 내세워 사랑을 잃지는 않았는가? 사회적 불의를 고발하면서 자신은 특권적 대우를 요구하지는 않았는가? 한 마디로, 우리가 과연 남에게만 돌을 던지고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어진 길을 충실히 걸어가신 주님을 바라보며 자신을 돌아볼 때,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자주 시류에 영합하고 물질주의의 흐름에 밀려 진리로부터 벗어난 길을 걸어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 검증을 위한 시금석
5-1.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시기 직전에 사막에서 치르신 “시험”(마태 4,`1-11)은 어느 시대에나 그분을 따르는 개인과 공동체가 자신을 반성하기 위한 시금석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공관 복음서들은 한결같이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로” 사막에 나가 그 시험을 치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성령께서 광야로 예수님을 “내모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사막에서 거치신 시험은 그분께서 메시아로 확인되시는 마당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따라서 꼭 필요한 과정이었음을 성서는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그분이 메시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준비가 되었는지, 그런 자격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검증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5-2.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태 4,`3). 경제 발전과 물질적 조건의 향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른바 ‘사회적 복음’이 유혹이요 착각일 뿐임을 간파하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시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육체를 지닌 인간에게 물질도 중요하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모르실 리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마태 6,`32). 그러나 “높이 불리운”(「제삼천년기」, 4항) 인간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하시며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5-3. 다음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 성서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지 않았소?”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면 그 증거를 보여라. 당신이 저 아래로 떨어지고서도 다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서 하느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심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우리는 그 하느님을 믿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하느님은 허상에 불과하다. 악마가 아니라도, 우리는 쉽게 이런 목소리를 자신 안에서 듣게 됩니다. 즉각적이고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찾는 심리는 믿음보다는 도리어 불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선생님,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하고 요구하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이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마태 12,`38-39).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더 이상 당신과 함께 계시지 않는 듯한 시간을 겪으심으로써 인간의 심리 속에 숨어 있는 저 깊은 불신의 나락에까지 당신 구원의 힘이 스며들 수 있게 하셨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 27,``46) 우리 뜻대로 하느님께서 움직여 주시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에도, 내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자세, 이것이 곧 참된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두 번째 유혹은 이런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악마의 계략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분명했습니다.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도 성서에 있다.”
5-4. 악마는 다시 아주 높은 산으로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 주며 말합니다. “당신이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여기서, 참된 신 대신 거짓 신을 섬기도록 이끄는 힘, 곧 모든 죄의 본질인 우상 숭배의 유혹이 그 정체를 가장 잘 드러냅니다. 이 세상의 영화와 사치는 특히 물질, 권력, 명예라는 모습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곤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위해서라면 악의 세력을 끌어들이는 일을 포함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악마의 이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시지 않았느냐?”
5-5. 예수님께서 당하신 이 모든 유혹과 시험은 요컨대 당신을 현세적 메시아로 만들려는 세력을 둘러싼 것이었습니다. 죽음과 삶을 건 이 투쟁은 그분의 삶 전체에 걸쳐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며, 메시아로서 사람들 앞에 공적으로 나타나시기 직전에 거치신 시험은 그것을 간추려서 보여 주는 것일 뿐입니다. 그 뒤에도 예수님께는 제자들로부터(마태 16,21), 가족으로부터(요한 7,3-5), 종교 지도자들로부터(마태 27,41-43), 대중으로부터(요한 6,15), 그리고 자기 내부의 어떤 반대 세력(마르 14,33-36)으로부터도 같은 유혹이 계속되었습니다.
5-6.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의 아비”(요한 8,44)인 마귀는 사람을 쉽게 착각에 빠뜨리고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사람의 생각을 비뚜로 가게 하고, 그 정서를 뒤흔들어 놓으며, 마음을 허상 쪽으로 향하게 합니다. 헛된 상상을 일으키고 그럴듯한 이론을 짜게 하여 그것으로 사람을 묶어 두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기”(마태 26,41) 때문에, 유혹 앞에서 언제나 너무 약합니다. 그래서 쉽게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과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예배하고 섬기는”(로마 1,25) 것입니다.
5-7. 사람은 누구나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마태 6,24). 하느님이든 마몬이든 둘 중 어느 하나만을 섬기게 되어 있어서, 한 쪽을 섬기면 다른 쪽은 섬기는 듯해도 그것은 겉모양에 불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흔히 “세상 걱정과 재물과 현세의 쾌락”(루가 8,14)에 짓눌려서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키워 내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악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 낼 수 없음을 발견하고 그렇게 해서 각자 어떤 사슬에 묶여 있다고 느낍니다”(사목 헌장, 13항).
5-8.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시지 않고, 일생 동안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요한 8,29)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그분의 그런 삶을 잘 보여 줍니다. 사람들이 참 하느님을 떠나 다른 어떤 것을 하느님처럼 섬기고 특히 자기 자신을 우상처럼 받들 때, 십자가는 가장 분명하게 인간의 그런 경향을 거슬러 이긴 승리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버리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랑의 절정을 보고, 동시에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최고의 순종을 확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는 모습을 지켜 본 로마 병사는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마르 15,39) 그렇게 해서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요한 12,32) 하신 주님의 말씀이 실현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런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셨습니다.

6. 성령의 힘
6-1.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도 당신처럼 악마의 유혹에 속아 넘어가지 않고 진리 안에 머물게 하시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원하는 것은 그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마에게서 지켜 주시는 일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요한 17,15-17). 그리고 필생의 과업으로 제자들을 양성하신 후, 당신의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떠나가시기 직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인간적 한계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맡은 바 사명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는 ‘힘’을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전에 일러 준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려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오래지 않아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4-8).
6-2. 과연 약속대로, 오순절에 성령께서 제자들 위에 내려오셨고, 그들은 그 힘을 받아, 오랫동안 자신을 휘어잡고 있던 모든 두려움과 인간적 욕망 그리고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 “담대하게”(사도 28,31)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는 제자들 곁을 떠나시고, 성령을 통해 그들과 함께 계시는 시대는 그렇게 해서 시작되었고,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지난 2000년 교회의 역사는 성령을 통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앞세워서 하신 놀라운 일들의 역사였습니다.
6-3.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진리의 성령”(요한 16,13) 안에 머물기만 하면 주님의 놀라운 일은 지금도 우리를 통해서 계속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숨쉬고 살아야 할 공기이고, 생명을 지탱시켜 주는 물이며, 힘을 북돋아 주는 불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생명은 바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로마 8,9)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생명에 이처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헤프다고 할 만큼 풍성히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세상에 공기와 물을 가장 흔하게 펼쳐 놓으셨듯이, 우리 신앙의 생명에 그처럼 소중한 성령 또한 그만큼 쉽게 또 풍성히 주시는 것입니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루가 11,11-13)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발걸음을 빗나가게 하려는 온갖 세력에 맞서 삶과 죽음을 가르는 투쟁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주님께서 남겨 주신 모범대로 기도를 통해 성령의 힘을 충만히 받으면 우리는 여기서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7. 희망을 가지고
7-1. 우리 한국 교회가 지난 한 세대에 걸쳐서 이룩한 성장은 분명히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갑자기 불어난 외형에 자만하여 거기 안주하고 말면 축복은 언제나 반대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성서와 교회의 역사가 그것을 증언합니다. 교회가 하나의 제도, 하나의 조직으로서도 일정한 모습을 갖추게 되면서, 우리는 그 제도와 조직에 교회 특유의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성령의 역할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성령 없이도 별 탈 없이 돌아가는 듯이 보일 때야말로, 교회에는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때 교회와 개인은 포도나무에서 잘려 나간 가지처럼, 뿌리에서부터 수액을 빨아올리지 못하고, 외형만 멀쩡히 남아 속으로는 말라 버리는 일이 진행될 수 있는 것입니다.
7-2.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참으로 많은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분명한 것은 복음 선포 사명에 대한 교우들의 헌신적이고도 적극적인 자세입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로, 스스로 달려가 복음을 영접해 들여온 선현들의 후예답게 한국의 교우들은 교회의 선교 활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최근에 부쩍 늘어난 본당을 비롯하여 신학교, 수도원 및 각종 교육 시설의 설립과 확충을 위해서 필요한 재정적 부담을 흔쾌히 감당했습니다.
7-3. 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초대 공동체의 정신을 실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본당과 본당, 교구와 교구, 지역과 지역의 경계를 넘어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로서 가진 바를 서로 나누고, 나아가 북한 형제들에게도 따뜻한 동포애를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여 전 인류가 같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임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과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외국인 노동자들을 따뜻이 맞이하고 그들의 권익을 찾아 주며, 우리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세계 여러 지역 사람들을 돕는 데에도 더욱 너그럽고 적극적인 마음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사도 4,32-34). 초대 교회 신자들이 이룩한 이 아름다운 공동체는 언제나 신앙인들의 이상과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7-4. 또한 요행과 투기로 일확천금을 바라는 심리가 만연한 사회 안에서 우리는 성실한 노동을 통해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세태 속에서 법과 원칙을 존중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는 사회를 이루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7-5. 성직자, 수도자들이 성령께서만 주시는 힘과 기쁨으로 무장하여 거세게 밀려오는 물질주의 풍조를 더욱 적극적으로 막아 내고, “하느님의 마음 안에 머물며”(「제삼천년기」, 8항), 이런 교우들과 함께 복음을 증언하면, 우리는 우리 사회에 참으로 큰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가오는 새로운 천년기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희망과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조국의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 한국 교회가, 우리 민족은 물론이고, 나아가 아시아 전체를 향한 복음화 사업에도 큰 몫을 담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천년기에는 세계 대종교들의 발원지가 될 만큼 종교적으로 비옥한 땅이면서도 그리스도 신자 비율에서는 모든 대륙 가운데에서 가장 적은 이 아시아 전역에서, 우리의 신앙 고백이 널리 메아리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히브 13,8).

1997년 3월 6일, 봄 총회를 마치며
한국 천주교 주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