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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0 23:00
2021-09-1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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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수정 추기경의 제52차 세계성체대회 워크숍 강연

한국 교회: 어제와 오늘, 그리고 길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서울대교구장
평양교구장 서리

 

1. 역사

1900년대 초에 한국은 다른 민족들에 대한 자기보호의 폐쇄성 때문에 “은둔왕국”으로 불렸습니다. 오늘 저는 그와 반대로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우리 친교를 굳세게 해 줄 것을 확신하면서, 한국역사의 몇몇 순간, 특별히 한국 가톨릭교회의 역사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한국교회의 시작은 좀 특별하면서도 아주 현실적입니다. 18세기 말이 되자, 1392년부터 지배해 온 조선왕조는 양반계층의 부패와 농사를 짓던 민초들의 극심한 빈곤으로 깊은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당대의 지성인들은 조선왕조가 국가 통치를 위해 선택한 종교인 유교의 교리를 혁신함으로써(신유교사상) 어려운 상황들을 해결하고자 애썼습니다. 

이런 혁신과 탐구의 분위기 속에서 한 무리의 유학자들이 중국을 거쳐온 가톨릭교회 교리서적들을 손에 넣게 되는데, 예수회 마태오 리치 신부가 쓴 글을 16세기에 중국어로 옮긴 것이었습니다. 그 글들을 읽으면서 참으로 특별한 성령의 선물로, 그분들은 사람과 우주의 ‘궁극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때부터 그분들의 삶이 바뀌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끈기 있게 ‘진리’를 찾는 동안 사랑이 자라나고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지식이 커져갔습니다. 그분들 대다수가 순교자로 죽으며 한 분이신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유난히 빛나는 별을 보며 신적 징표를 깨닫고 그 뒤를 따라 먼 길을 떠났던 이교 동방의 세 박사들처럼, 어려움과 위험, 낙심할 일들을 겪지만 멈추거나 되돌아가지 않고 마침내 베들레헴의 동굴에 도달합니다. 박사들은 그곳에서 어머니와 성 요셉과 함께 있는 아기를 자기 눈으로 봅니다. 보고 믿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는 변모되어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이교인으로 떠났다가 그리스도인으로 되돌아 갑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서 준비시키신 구원의 증인들이었지요.

우리 신앙 선조들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업적으로 얻게 된 변모는 진정한 혁명이었습니다. 그분들은 1801년부터 1867년까지 4차례의 모진 박해를 견디어 낼 힘이 있었습니다. 기록된 순교자들 만도 만 명이 넘고 이름없는 순교자들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요셉 앵베르, 시메온 베르뇌, 안톤 다블뤼 세 분 주교님도 계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14년 한국 순교자 시복 미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그들을 멀어지게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곧 재산과 땅, 특권과 명예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분들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자신의 진정한 보화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1 그리스도인으로써 그분들은 온갖 박해와 억압을 포용해야 했고, 오해받았으며, 사회구성원들에게서 무엇보다 가족과 친구들에게서 배척당했습니다. 산중에 몸을 숨겨 고달프고 불편한 삶을 살았습니다. 거기서 교우촌을 이루고 한국 전쟁 이후까지 오랫동안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았습니다. 그분들의 애덕은 모든 이에게 알려져서 외인들조차도 “교우촌에 가면 거기는 아무도 굶어 죽지 않는다!” 하고 말하며 도움을 찾아왔습니다.

그 교우촌들에서, 성령의 활동으로, 사랑과 일치라는 초대교회의 징표들이 되풀이되었기에, 우리는 사회계층 간의 엄격한 유교적 차별이 그분들 사이에서 어떻게 극복되었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양반들과 글을 모르는 이들이 정말로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예외적인 사실이었는지를 이해하려면, 옛 한국어에 신분에 따라 다른 5개의 존칭화법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 신분의 장벽들을 완전히 뛰어넘었습니다. 또 하나 놀라운 일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동등한 관계였는데, 유교전통의 남성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생각조차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참으로 미래의 남녀들이었습니다! 새로운 창조였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초대교회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처럼 그분들 안에
서 이루어졌습니다.

한국교회의 시작은 순교자들 덕분에 따라가야 할 “별”로 남습니다. 순교자들은 이제 엄격한 유교사회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더 이상 소용없고 존재하지 않는 듯 극도로 발전된 이 기술사회에서, 그분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증거하는 힘을 지니도록 우리를 격려하기 때문입니다. 커뮤니케이션 도구들의 힘과 더불어 현대는, 소비주의에 근거를 둔 획일적 사고와 “삶의 스타일”을 교육합니다. 이 세상에서 생명과 행복을 보장하려는 부질없는 추구 안에서 “소유”하고자 하는 이 욕망은 사람에게 하늘을 닫아버립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우리를 격려합니다! 우리에게 하늘을 열어주고 사람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단 한 분이신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에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어서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을 통해 교회는 포교의 자유를 얻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커다란 고통들이 한국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910년 일본은 한국을 점령하고 속국이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모진 식민통치는 1945년 8월 15일까지 계속되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이 2차대전과 일본의 한국 지배에 종지부를 찍지만, 우리 나라에 진정한 평화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얄타에서 강대국들은 38선을 기준으로 한국을 남과 북, 두 나라로 나누기로 결정합니다.

1950년 위태로운 정치적 균형이 깨어지고 소비에트연방과 뒤이어 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이 남한을 침략합니다. 그것은 3년동안 지속되다 38선으로 남북 분단을 재확인한 1953년에야 휴전에 이른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한국인의 10% 이상인 3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 동안 어린 교회는 어른이 되어 자신을 꾸려갈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일본 식민통치와 한국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전쟁의 그 어두운 시간들 속에서 교회는 새 순교자들의 증거라는 “별” 덕분에 길을 잃지 않습니다. 한국전쟁 전후에 공산치하 박해 속에 죽임을 당한 분들이지요. 그분들 가운데서 1949년에 돌아가신 평양교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님, 1950년에 돌아가신 교황대사 패트릭 번 주교님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런 시련도 극복하고 교회는 다시 힘과 신원을 회복하며, 30여 년의 군부통치기간(1960-1990) 동안 한국이 민주화를 향해 가도록 도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쟁의 아픔을 우리는 잊을 수 없습니다. 중대한 결과들이 여전히 우리 가운데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남북으로 갈라진 무수한 가족들은 오늘까지도 식구들에게, 자녀와 부모와 배우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갈등들이 만들어낸 형제살인의 증오는 형제들을 가르고, 부모 자식 사이를 가르면서 가정들을 파괴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의심과 원망이 여전히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자신이 당한 억울함, 남에게 저지른 억울함을 용서하려면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할 뿐입니다!

 

2. 평화와 용서

이것은 한국교회의 큰 도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복음적 평화를 건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평화를 건설하는 일은 평정심과 창조성과 감수성과 기술을 요구하는 예술입니다.”2 그래서 저는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평화를 위해 이렇게 필요한 기술들을 얻을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대답이 머리를 스칩니다. 첫 대답은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15,21)

그렇습니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라고, 남들이 아니라 자신을 판단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무엇을 발견합니까? 우리 역시 죄인이며, 여러 번 실수를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단죄하거나 배척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넓어지고 더 이상 증오에 짓눌리지 않고 말하고 생각하는 평정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루카 6,37-38)

평화의 길을 여는 둘째 걸음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 안에 하느님의 현존, 기도의 스승이신 성령의 현존을 키워주고, 창조성을 불러일으키며 선물로 줍니다. 기도는 새로운 것들을 창조합니다! 새 길들을 엽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면전에 이르며 우리를 친교 안에 하나되게 하기에 강합니다. 그래서 26년 전부터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매주 화요일 저녁마다 우리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또 제가 목자로 있는 북녘 땅 “침묵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자 모임을 계속해 왔습니다. 또 원하는 신자들 누구에게나 전쟁 전 북녘 땅에 존재하던 57개의 본당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 기도하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분들을 잊지 않고 기억을 생생히 간직하기 위한 일종의 영적 자매결연이지요. 그리고 저는 2020년 8월 15일 평양교구와 북녘 땅을 평화의 모후이신 파티마의 성모님께 봉헌함으로써, 동정 마리아께서 그 땅을 굽어 살피시고 보호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또 우리 나라의 화해와 통일이라는 주제에 대해 여러 지역교회에 알리고 인식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 저의 염려였기에 “한반도 평화 나눔” 국제 포럼을 해마다 조직하였습니다. 오늘까지 그건 정말로 풍요로운 교환이었으며 그 포럼에 참여해 주신 에르되 추기경님께 감사 드립니다. 여러 나라의 역사와 신앙에 대해 공유하는 것은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그 “기술”을 습득하는 데 커다란 재산이 되었습니다.

 

3. 오늘 그리고 도전들

오늘 한국의 5천2백만 인구 가운데 약 10%인 5백만 명이 가톨릭신자이며, 한국 교회의 과제는 복합적입니다. 전쟁은 한국인들의 가슴에 커다란 허무를 남겼습니다. 사방에서 수많은 죽음과 잔인함을 목격한 뒤에 어떤 확신도, 지켜야 할 어떤 가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생존본능에 떠밀려 한국인들은 나라를 재건하는데에 온 힘을 다해 뛰어들었습니다. 너무나 열심히 치열하게 일을 했고, 불과 몇 년 사이 한국은 진흙초가집들에서 마천루로, 극도의 빈곤에서 세계 11위 경제대국으로 변했습니다.3 삶의 목표인 성공과 부, 안락함에 도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건 참된 “별”이 아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세상의 가장 큰 위험은 온갖 극심한 소비주의 와 더불어 개인주의적 불행입니다. 이는 안이하고 탐욕스러운 마음과 피상적인 쾌락에 대한 집착과 고립된 정신에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내적 생활이 자기 자신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혀있을 때,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어 가난한 이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그분 사랑의 고요한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선행을 하고자 하는 열정도 식어버립니다.” 교황님은 덧붙이십니다. “이는 신앙인들에게도 매우 현실적인 위험입니다. 많은 이가 이러한 위험에 빠져 삶을 잃어버리고 불만과 분노에 가득 찬 사람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4

극도로 개인주의적이고 지나치게 경쟁적이 된, 우리 한국사회에서 이루어진 말씀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고 실패하거나 더 이상 견딜 수 없으면 자살하고 맙니다! 자살률이 하도 높아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기 위해 그 숫자를 공개하지 않으려 애씁니다. 교회에 가까운 이들에게나 멀리 있는 이들에게나, 복음을 들을 시간도, 그럴 마음도 없습니다. 귀를 열어줄 징표들이 필요하고, 우리가 신적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는 위대한 소식을 신뢰하게 만들어줄 증인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교회는 믿음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

세상은 한국 가톨릭교회에 또 하나의 큰 도전, ‘세계화’를 제기합니다. “삶의 스타일”에 대한 극단적 변화입니다. 우리에게 그건 진짜 지진입니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도덕과 윤리의 원칙들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우리 문화와 전통은 효도, 순종, 경로 등 자연법의 윤리원칙을 따르는 철학인 유교에 기초를 두고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이 자기보다 높은 그 어떤 자연법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 모든 것이 뒤집히고 있습니다. ‘자유’는 사람이 어떤 윗사람의 영향도 받지 않고, 자기 인생의 유일한 주인이 되는 권한이라고 여겨집니다. 곧 “사람이 하느님”, “자기 자신의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선과 악을 구별하는 근본을 상실했습니다. 자신이 원한다면 어떤 일이라도 가능해집니다. 자신의 소원을 충족하는 것이 진리요 사회의 목표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마태 7,12)하신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이런 시각 속에서, “자녀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열려 있는, 남자와 여자의 혼인에 확고한 기초를 둔 가정”에 대한 공격이 갈수록 더 분명해집니다. 현재 전세계는 2030년까지 “유엔 개발지원 목표”에 도달하고자 노력합니다. 이 프로그램의 중심에 ‘성과 출산에 관한 보편 위생’이 있습니다. 곧 산아제한 혹은 가족계획, 낙태합법화, 성과 자녀출산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 등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1994년 카이로에서 열린 “인구와 발전에 관한 회의” 의장에게 쓰신 편지에서, ‘어떤 사회적, 법적 강제로부터도 자유롭게 자녀의 숫자를 결정할 부부의 자유’를 호소하셨습니다. ‘생명의 신성함을 침해하는 방법을 강요당하지 않고서’ 말입니다.5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런 간섭이 이미 일어났습니다. 한국전쟁이 마무리되자, 경제원조는 국가재건뿐만 아니라 아주 성공적으로 적용되었던 “가족계획” 실현을 위해서도 사용되었습니다. 1961년의 표어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많이 낳아 고생 말고 적게 낳아 잘 키우자!”였습니다. 1988년 한국 부부들의 80%가 불임시술을 했거나 피임을 했습니다.6 다자녀 탄생을 경제적 손해와 동일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낮은 출생률을 가져온 피임교육은 한국민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런 사고방식은 이제 다자녀 가정을 지원하는 정부의 장려책을 무용지물로 만듭니다. 출생률은 점점 낮아지며 이제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2020년에 한국의 출생률은 세대교체를 위한 최소출생율인 2.1을 지나 0.84에 이르렀습니다.7

인간의 개념과 중요성, 신성함이 변하고, 마찬가지로 생명과 가정의 의미도 변하고 있습니다. 이건 우리를 지배하는 인류학적 혁명이며, 그 가치들은 그리스도교 가치와 반대됩니다. 이런 인류학적 변화의 징표들은, 이혼과 낙태, 안락사의 증가, 최근 한국 학교에서도 가르치는 ‘젠더’이론 등입니다. 그건 성장기의 젊은이들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이 자연스런 육신적 현실이 아니라 마치 문화적 산물이라도 되듯 개인의 독립적 선택에 맡겨지기 때문입니다. 30년 전 만 해도 말도 안 되었을 이야기가 이제는 우리 삶을 주무릅니다.

마지막으로 인터넷 사용에 대해 짚어보고 싶습니다. 2020년 한국의 인터넷 보급률은 91.8%였습니다.8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디지털 환경은 현대 세계의 특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꾸준히 이 환경에 젖어 들고 있습니다. 이는 더 이상 소통의 ‘이용’ 수단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시공간 개념, 자기 자신과 타인과 세상에 대한 이해, 소통하고 배우며 정보를 얻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주는 고도의 디지털 문화 안에서 살아가는 문제입니다. 현실에 접근할 때에 듣고 읽는 것보다 이미지가 우선시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학습법과 비판의식의 계발에 악영향을 끼쳐 왔습니다.”9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생명”이신 하느님을 바라보며 사는 법을 배우지 않고, 거대한 경제적 이익에 좌우되며 인간을 건설하는 것과 파괴하는 것 사이에 어떤 분별력도 갖지 못한 소통의 매체들을 바라보며 사는 법을 배웁니다. 물론 제대로 사용된 소통의 도구들은 풍요로운 재화이지만, 올바른 사용에 이르려면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습니다.

 

4. 길: 새 복음화

이런 파노라마에서 우리는 오늘날, 죽음의 승리자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선포할 필요가 과거보다 더욱 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반연대문화, 죽음의 문화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어떤 도구를 통해, 오늘 우리가 복음을 선포할 수 있을까요?

한국교회는 그리스도를 향한 자신의 여정을 계속하였으며 어려움들 속에 있는 이들과 동행하고 위로를 가져다 주고자 애썼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짓누르는 가난의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가난한 이들이 자신들을 걱정해주는, 마음과 삶의 문을 열면서 친구이며 가족임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형제자매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10 그래서 한국 신자들의 강한 종교심과 너그러움은 많은 자선활동의 이니시어티브들을 낳았습니다. 1989년 한국에서 열린 44차 세계성체대회의 결실로 “한 마음 한 몸 운동”이 조직되어 이루어졌고 현재는 ‘서울 카리타스’로서 교구와 57개 이상의 나라에서, “세상에 사랑과 생명 나눔”을 전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코로나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노인재활센터들을 만들었으며, 이주민들을 위한 상담 센터들과 쉼터도 만들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을 위해서는 무상의료지원도 제공하였으며, 명동대성당에서 매일 4백 명 이상의 무상급식을 하고 있습니다. 성체줄기세포 연구와 실험을 지원하기 위한 “생명위원회”가 설립되어 “생명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탄생 2백 주년인 올해, 한국 교회는 교황님의 2020년 성탄 메시지의 호소에 응답하여, 가장 가난한 나라들에 코로나 백신을 보급하는 특별기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새로운 이니시어티브들을 통해 가장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우리 형제들을 계속해서 돕고자 희망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생기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양육하고 양성하느냐 하는 문제는 커다란 걱정으로 남습니다. 세속화의 과정에다 현재에 더해진 코로나19 전염병 사태는 많은 이들이 신앙을 버리도록 유도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전염병으로 인해 요구된 많은 제약들을 극복할 힘이 부족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힘든 시련의 시간이지만, 지금의 광야 속에서 어쩌면 모든 이에게 유익과 큰 열매를 줄 새로운 것들을 찾고 만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제1천년기에 유럽 땅에 십자가가 세워진 것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제2천년기에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땅에, 그리고 ‘제3천년기’에는 이렇게 광활하고 생기 있는 이 (아시아) 대륙에서 신앙의 커다란 추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11 그러므로 이 대륙의 교회가 지닌 사명은 복음화입니다! 이건 예언적으로 울려 퍼지고 현재 상황에 격려가 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전체를 가로지르는 실마리가 하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순교자들입니다! 그분들은 시련과 어려움을 거쳐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 우리를 인도해준 길잡이 “별”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제3천년기의 세상에서, 그리스도로 인해 새로워진 사람들 안에 육화하신 하느님 현존의 “별”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새 복음화’가 필요합니다! 그건 사람 힘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결코 당신 교회를 버리지 않으시고, 은총으로 언제나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현존을 보증해 주십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여러 종류의 카리스마들이 꽃핀 것처럼, 성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도 이렇게 쓰셨습니다. “복음화는 성령의 활동 없이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 복음화의 기술도 좋지만, 그 중에 가장 완벽한 것도 성령의 겸허한 활동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복음을 전하도록 재촉하시는 분도, 양심의 내면에서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만드시는 분도 바로 그분이십니다.”12 그러므로 시대의 징표들을 식별하고, 성령의 숨결이 어디 있는지 보고 뒤따라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시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새 복음화에 대해 말하면 이렇습니다. 열정에 있어 새롭고, 방법에 있어 새롭고, 표현에 있어 새로운 것입니다.”13 하신 말씀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복음화는 교회의 본성에 속하며 오순절에 교회와 함께 태어납니다. 사도들은 두려워서 문을 닫고 있었지만 성령의 바람이 불어 닥쳐서 자신들의 머리 위에 불혀 모양으로 내려오실 때, 용감하게 밖으로 달려나가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분들은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불이 자신의 마음 속에 주님의 부활과 죄의 용서를 새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분들은 증인이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우리를 복음의 핵심으로 인도하시는 베네딕토 16세의 말씀을 결코 지침 없이 거듭 말씀 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14

이것은 밖으로 나가, 주님께서 활동하시며 새 길들을 열어주시는 곳을 찾으라는 초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가두어 두려는 진부한 도식을 깨뜨리실 수 있고, 하느님이신 당신의 끊임없는 창조력으로 우리에게 놀라움을 주십니다. 우리가 원천으로 돌아가 복음 본연의 참신함을 되찾고자 노력할 때마다 새로운 길들이 드러나고, 창조적 방식들과 또 다른 형태의 표현들, 더욱 설득력 있는 기호들이 생겨날 것입니다.”15 그러나 새로움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이고 원하는 대로 조정할 수도 없습니다. 새로움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겸손과 식별을 요구합니다. 겸손이 없으면 식별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뜻과 우리 계획들에 집착하여 멈추어 버릴 테니까요. 우리는 아직 250년도 채 되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젊은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젊은이들처럼 두려움이나 편견 없이, 우리 프로그램들을 벗어나 성령의 바람이 부는 곳이면 어디든 우리 자신을 엽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밖으로 나갑시다.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러 나갑시다. 온 교회를 위하여 되풀이하여 말합니다…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합니다.”16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런 호소가 제 자신과 우리 신자들의 것이라면 좋겠습니다. 복음화는 우리 선조들 안에서 보았던 그 담대함과 신선함, 복음의 기쁨을 우리 안에 다시 일깨움으로써 우리 교회를 쇄신할 수 있는 힘입니다. 복음화는 우리를 재촉하여 더 큰 참여로 성찬례를 누리는 길을 보여줄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교 공동체로써의 정체성을 재발견하게 해 줄 것이며,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애덕을 일으켜 자기 자신을 벗어나 우리 형제들을 향해 가게 해 줄 것입니다.

이 힘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요! 저는 저희 나라(대한민국)가 많이도 닫혀 있음을 봅니다. 이미 말했듯이, 현재 한국 사회는 때로 감추어져 있지만 깊은 분열을 겪고 있어서 그것이 현재의, 따라서 미래의 것이 될, 문제들을 차분히 대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때보다 더 복음화의 열정으로 자신을 열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성령께서 “원수들이 대화를 향해 서로를 열고, 반대자들이 손을 잡으며, 민족들이 조화롭게 만나도록, 마음 깊은 데서 활동하시게”17 만듭니다. “평화는 승자도 패자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해와 과거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갈등에서 일치로 걸어가는 형제 자매들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18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안내에 의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먹을 것이 모자라는 군중을 마주하셨을 때 결국 넘치도록 양식을 주십니다. 회개하고 하느님 말씀을 맞아들이는 이는 누구나 이런 기적을 체험합니다. 곧 구원의 샘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초라한 사랑의 힘을 많아지게 하실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조국을 두고 하신 말씀 같은 성 바오로의 에페소서 서간의 아름다운 찬가가 생각납니다. 그것이 조국을 위한 예언적 말씀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당신의 몸을 통하여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 안에서 둘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아멘.” (에페 2, 14-18)

에르되 추기경님의 초대를 통해 저를 이곳에 데려오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이 성체대회는 성체성사가 맺는 우리 모두의 일치와 애덕이라는 열매의 가시적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증언과 형제적 환대를 베풀어준, 신앙의 긴 역사로 이토록 풍요로운 헝가리 교회에 마음을 다해 감사 드립니다.

1 프란치스코, 한국순교자 시복미사 강론,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2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89항, 2018.7.13.

3 2020년 세계은행 자료.

4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2항, 2014.2.15.

5 성 요한 바오로 2세, 인구와 발전에 관한 카이로 회의 의장에게 보내는 편지, 1994.

6 전세계 가족계획 혁명, 세계은행, 2007.

7 통계청 자료, 2020.

8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자료, 2020.

9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86항, 2019.7.29.

10 프란치스코, 제2회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문 6항, 2018.11.18.

11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 「아시아 교회」 1, 1999.11.6.

12 성 바오로 6세, 교황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 75항, 1975.12.8.

13 성 요한 바오로 2세, 9차 남미 사목방문 중에 하신 말씀.

14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7항.

15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11항.

16 프란치스코,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 49항.

17 『로마 미사 경본』, 화해의 감사 기도 2양식.

18 프란치스코, 2021년 이라크 사목방문, ‘우르’ 평원에서 하신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