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성체대회
1987-05-01 00:00
2021-05-13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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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세계성체대회 관계 강연

□ 세계성체대회 관계 강연 □

세계성체대회의 의미

강우일 주교

성체대회란 무엇인가? 바론 인식을 위해, 성체라는 말이 고대 교회로부터 통용되어 왔지만, 어떤 의미로 쓰여왔는지 그 동안의 경위를 알아보자.

성체대회란 두 가지 상반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가시적 측면’으로서 수많은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느 한 장소에 모여서 외적으로 드러나는 대규모의 행사를 치르는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인 하느님의 깊고 심오한 구원 신비를 다루고 있는 ‘불가시적 측면’이 있다. 즉 세속적 측면과 성스러운 측면, 속과 성이 동시에 공존하는 두 가지 요소를 갖고 있는 것이 성체대회이다.

성체대회의 시작은 1881년부터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열리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에 이르기까지 성격상 많은 변화가 있었다. 변화를 알기 위해서 성체라는 말부터 더듬어 봐야겠다.

초대 교회 때부터 사용해 온 꼬르뿌스 미스띠꿈(Corpus mysticum: 신비체)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세 가지 의미로 쓰여졌다.

첫째, 눈에 보이게 이 지상에 현존해 계셨던 그리스도의 몸, 즉 역사의 예수. 둘째, 미사 성제 때 밀떡 안에 성사적인 형태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sacramental body). 셋째, 교회를 가리킴.

교회 전승은 오랜 세월 동안 ‘성사적인 형태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교회’로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의 개념을 긴밀한 연관 속에 생각했다. 그 근거는 1고린 10,17의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우리 많은 사람이 다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라는 데에 두고 있다. 결국 미사 때 한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교회를 이룬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구조를 이룰 수 있도록 엮어 주는 횡적인 끈은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의 빵이라는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꼬르뿌스 미스띠꿈이라고 할 때 세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여 사용했다. 즉 신자들은 미사 때에 하나의 빵 속에 ‘성사적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눈에 보이게 그리스도의 현존과 구체적으로 만나고 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 하나의 몸이 되어서 ‘교회’와 참된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중세 초엽에 들어서면서 신비체라는 단어의 사용법이 달라졌다. 성체라는 의미는 차츰 엷어져 가고, 교회에만 적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개신교 사람들 안에서 성체께 대한 여러 가지 이단이 나오고 성체 현존에 대한 부정이 대두됨으로써 가톨릭측에서는 주로 그리스도의 역사적, 지상적인 실존을 역으로 강조하게 되었고, 이로써 신비체 안에 포용되던 ‘교회’와 ‘성체’의 개념은 따로따로 분리되어 사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중세에 들어서서 신비체라는 말마디의 함축적인 뜻을 교회에만 적용하므로, 성체성사가 포함하고 있는 교회 공동체라는 성격까지 포함한 보다 넓은 의미가 좁아졌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 좁혀진 성체성사의 의미를 보다 포괄적으로 다시 회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 성체대회가 갖고 있는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이다.

 

하느님 백성이 함께 거행하는 미사 성제

성체대회가 개최되는 배경에서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전례 분야에 있어서의 변화이다. 19세기 말부터, 정확한 원인은 무엇인지 모르지만 교회내 모든 분야에서 평신도의 참여가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물리적으로 거리상 제대가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여러 가지 활동이 평신도에게 주어졌다. 즉 평신도의 적극적인 전례 참여 여건이 조성되었다. 때문에 전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겨났다.

미사 성제에 대해서도 성체를 단순히 흠숭할 뿐 아니라, 성체를 거행(celebrate)해야 한다. 중세로부터 성체성사를 흠숭의 대상, 놓고 바라보는 대상, 절하는 대상으로 생각했는데 이제는 성체성사를 하느님 백성이 함께 잔치로서 거행하는, 즉 전체적인 행사로 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성체성사를 흠숭 의 대상은 물론이며, 개인이 혼자 받아 모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하나되기 위해서 받아 모시는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미사도 개별적으로 성당에 가서 미사 참여하러 간다거나 개인적인 신심에 잠겨 있는 시간이 아니라 여러 지역의 여러 공동체가 하나로 일치를 이루고, 함께 봉헌하는 교회 공동체의 행위라는 새로운 인식이 생겨났다. 이런 전례 안의 움직임과 번화는 성체대회를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되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도 “오직 하나의 에우카리스티아(Eucharistia)를 지내도록 하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 우리 모두를 그분의 성혈로 묶어 주는 성작도 하나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제들과 부제들과 함께 일치를 이루게 하는 주교도 하나인 것입니다”라고 얘기한다.

초대 교회에서는 주일날 미사 성제가 주교좌 성당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러나 차츰 교회가 지방으로 확장돼 가면서 주교들이 사제를 지방으로 파견하게 되었고, 새로운 지역에서 주교 대신에 사제가 미사를 지내게 되었다. 한편 주교는 자신이 집전한 미사의 성체 일부분은 지역 본당 사제들에게 떼어 보내어, 성체 축성 후 주교한테 받은 빵 조각과 사제가 뗀 조각을 섞어서 성작에 넣도록 했다. 즉 이것은 주교를 중심으로 한 모든 사제, 공동체의 일치를 보존하려 는 의지의 관습으로 중세 초기까지 계속되었었다.

 

세상을 향한 증거와 보편 교회의 일치의 표방

초대 교회의 이러한 전통이 최근까지 이어오는 곳이 로마이다. 로마에서는 사순절이나 특별한 주일에 교황 혹은 교황 총대리가 본당을 돌면서 미사 집전을 하고(Statio Urbis), 그 미사에 교구 내의 대표자들이 참석해서 교회 전체의 일치를 재확인했다. ‘스따씨오 우르비스’(Statio Urbis: 로마의 각 성전 순회) 즉 일치를 나타내는 행사를 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1881년 이후에 여러 나라에서 성체대회가 개최되었다. 처음에는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세상을 향한 일종의 증거(Demonstration)적 요소가 강했다. 세상은 세속화되었지만 우리는 감실 속에 조용히 계시는 그분께 대한 충성을 표현한다는 표시로서 성체대회를 하게 되었고, 그 절정(Climax)이 성체를 모신 성체 행렬이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성체께 대한 내적인 깊은 이해를 회복하고 교회 공동체 내의 일치의 구체적인 표현인 성체성사의 측면을 드러내야겠다는 점이 부각되었다. 따라서 로마에서만 있었던 스따씨오 우르비스(Static Urbis)처럼 이것을 로마라는 도시에 국한시키지 말고 전세계 여러 도시로 확산시켜, 차례차례 모이면서 세계 각지에 교황 특사가 파견되어 각국의 성직자, 평신도 대표들과 함께 교황 특사가 주재를 하면서 보편 교회의 일치,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 된다는 것을 나타내자는 것이 성체대회의 의도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구체적인 역사를 살펴보면, 1874년 프랑스 아비뇽에서 따미지에(E. Tamisier)가, 세속화되어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세상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성체께 대한 공식적 조배를 끊임없이 해야 된다는 성체 수도회 창설자의 영향을 받아 성체를 흠숭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의 영향으로 성체 흠숭이 차츰 퍼져 나갔다.

1881년 릴(Lille)에서 제1회 성체대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당시 19세기 후반 프랑스 교회는 사회로부터 몰리고 압박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성체대회는 세상을 향한 신앙 표명의 강력한 기회이고, 자기 자신을 격려하면서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신앙인으로서의 신원을 재확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1881년-1914년까지는 유럽 각처에서 매년 개최되었으며 1, 2차 세계대전 이후는 중지되었다. 최근 1960년 뮌헨에서 성체대회가 다시 개최되었다.

 

온 인류를 포용하는 일치를 지향

1881년 초엽의 성체대회 때는 주로 성체 흠숭으로, 성체를 현시대 위에 모셔 놓고 밀떡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대한 성체 조배에 주력하고, 영성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백성의 일치에는 비 중이 적었으며, 주종을 이룬 것은 성체대회의 행렬이었다. 성체대회에 대하여 교황 비오 10세께서는 “성체대회의 목적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미사에 대한 사랑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형태의 성체 조배나 흠숭은 성체성사의 일치(영성체)에까지 연결되어야 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1960년부터 스따시오 오르비스(Statio Orbis) 즉 전세계의 여러 도시로 돌면서 전세계의 모든 교회가 하나로 모인다는 개념이 도입되었다. 그때부터는 성체대회를 단순히 대중이 모여서 종교 행사를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네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보여 주는 가시적 존재로서 인식되었으며, 하느님 백성을 제외하고는 성체의 위대함을 아무리 찬양해 봐야 그것은 무의미하다는 견해가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성체는 우리로부터 흠숭받기 위해서 제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그리스도의 몸과 일치하도록 묶어 주고 엮어 주기 위한 구심점이 되시기 위해 계시다는 사고 방식이 생겨난 것이다.

1960년 이후 성체대회는 갈수록 공동체 일치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세상을 향해서 열려지는 성격을 가지기 시작했고, 세례받은 사람들의 신앙상의 일치가 아니라 폭넓게 모든 인류를 포용할 수 있는 일치까지 내다보면서 성체대회를 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체대회의 주제도 세상 사람들이 살고 있는 현실과 연결되어서 설정되곤 하였다.

 

신학적 차원에서의 새로운 의미 창조

“성체와 가난으로 고통받는 모든 이에 대한 봉사”를 주제로 한 1964년 인도 봄베이 대회를 전후해서 “성체성사란 사랑의 성사다. 가난한 자에게 우리가 실제로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의미가 없다”고 말하면서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 전개를 권장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 1968년 콜롬비아 보고타에서는 “희망과 정의”를 주제로 하여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전인류의 일치를 이루어 주는 엮음쇄는 희망, 정의라고 생각했다.

1976년 필라델피아에서는 “성체와 인류에게 고통을 주는 모든 형태의 굶주림과의 관계”, 1981년 루르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새 세계를 위해 떼어 나누어진 빵”이라는 주제로 세계성체대회가 열렸었다.

1881년 첫 성체대회 때는 세속화되는 사회를 향해서 교회가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호교론적 차원이었으나, 차츰 세상을 향해서 문을 열고 모든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하나를 이룰 수 있도록, 일치의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함께 제거할 수 있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 주제를 설정하고 행사 추진을 해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성체대회는 회를 거듭하면서 차츰 새로운 성격, 새로운 신학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러므로 1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도 단순히 성체를 모시고 거행하는 행사로 끝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신학적 차윈에서 성체대회의 의미를 새롭게 창조해야 할 것이다. *

 

성찬의 이해

두봉 주교

 

I. 성체와 미사에 대하여

성체대회란, 미사의 참뜻을 생각하고 미사의 은총을 음미하는 축제이다. 세계성체대회란, 각 나라 대표가 와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미사의 참뜻을 묵상하는 하나의 축제이다. 미사는 가톨릭의 고유한 전례이므로 우리 가톨릭에서만 이런 대회를 가질 수 있다. 한국어로 ‘성체’라는 낱말을 국어 대사전에서 찾아보면 성체란, 빵과 포도주의 외적인 형상 속에 실제로 본질적으로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말하며, 성체대회는 성체께 대한 신심을 앙양하기 위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의 성대한 모임이라고 되어 있다. 즉 성체대회란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성체 안에 현존하여 계시다는 믿음과 신심을 복돋우기 위해서 모이는 것을 말한다.

또한 가톨릭 대사전에서 말하는 성체의 뜻은 1) 성궁(임금님의 몸), 2) 가톨릭 용어, 예수의 신비한 참몸, 3) 성체성사, 7성사의 하나, 성체배수의 성사(받들어 모신다는 성사)라고 되어 있다. 성체 행렬은 십자가를 앞세우고 성체를 봉안(신주를 모심)한 성체 성시대를 모시고 찬미가를 부르면서 행렬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체는 축성한 후 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제병, 감실 안에 계신 주님, 겉으로는 빵이지만 형상일 뿐이고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것을 성체라고 말하며, 영성체는 그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이다. 우리는 성체를 주로 이러한 뜻으로 생각해 왔다. 한국 교회는 1986년을 ‘성체와 가정의 해’로, 금년은 ‘성체와 교회의 해’로 설정했다. 금년 한국 주교단 사목교서의 부제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라는 말이다. 내용을 보면 성체에 대한 설명은 있지만 미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다.

사목교서 제1부: 교회는 성체성사와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간다. 즉 성서, 공동체의 필요성,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성체신심에 대해서는 약간 언급할 뿐, 성체를 좁은 의미에서만 말하고 있다.

사목교서 제2부: 교회는 성체성사로 일치와 사랑의 나눔을 설명하며, 성체 안에 계신 예수께서 죄인들을 부르시고, 일치를 이루시며 모든 것을 내놓으신다는, 성체 안에 계신 주님으로만 국한시키고 있다.

사목교서 제3부: 교회는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명에 참여한다는, 역시 그리스도께서 성체 안에 현존하신다는 설명이다.

이런 뜻으로 성체를 설명하니까 교회와 연결을 시키기가 어렵다. 이렇듯 좁은 의미로 성체를 설명할 것이 아니라 미사 전체를 ‘성체’라고 생각해야 될 것이다. 교회 역사에서 보면 미사, 성체성사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줄곧 문제가 되어 왔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최후 만찬 시의 상징인 동시에 실제적인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보여주시며 두고두고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할 수 있도록 예수께서 행하신 그 일을 교회에서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성서(사도행전)를 보면 한때 ‘빵 나눔’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신자들이 모여서 빵을 나눴기 때문이다. 즉 미사를 올렸던 것이다.

동방 교회에서 미사를 리투르지아(Liturgia: 전례)라고 했고, 로마에서 많이 쓰는 말로는 에우카리스티아(Eucharistia: 감사의 기도)이다. 성체대회는 영어로 유카리스틱 콘그레스(Eucharistic Congress)이다. 이 말은 복음에서 예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기 직전에 감사기도를 바쳤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물론 그때에만 감사의 기도를 하신 것이 아니라 빵의 기적을 하실 때도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에우카리스티아의 원뜻이 감사의 기도를 말하는 것이므로 예수께서 하시던 그 일을 그냥 에우카리스티아라고 부르기도 했고, 미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미사라는 말도 그렇게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미사 끝부분에 ‘미사가 끝났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라틴어로 ‘보낸다’, ‘파견한다’는 뜻이다. 이 ‘파견한다’는 말로써 예수께서 하시던 일 또 신자들이 예수의 지시대로 하는 일을 미사라고 했다. 이렇게 교회는 2천 년 동안 미사에 대한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하였다. 가장 적절한 표현은 에우카리스티아이지만 에우카리스티아는 미사 전체를 말하는 것이지, 예수께서 빵의 형상인 성체 안에 계신다는 것은 아니다. 시작부터 끝까지가 에우카리스티아인 것이다.

우리가 성체를 좁은 의미로 이해해 온 것은 16세기, 프로테스탄트에서 예수께서 성체 안에 계신다는 것을 부인했기 때문에 트리엔트 공 회는 예수께서 성체 안에 현존하여 계심을 강조하며 성체께 대한 신심으로 성체현시, 성체조배, 성시간을 권장하였다. 즉 감실 안에 빵의 형상으로 계시는 예수를 강조한 것은 프로테스탄트 신자둘이 이를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전역사를 통해서 볼 때 미사(Eucharistia)를 그렇게 좁게 해석할 것이 아니라 넓게 해석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을 보면 미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에우카리스티아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우리말 번역을 보면 에우카리스티아(Eucharistia)에 대한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하여 대부분의 경우 미사, 미사성제로 번역하고 때로는 성체제사, 성찬으로 번역이 되었다. 우리 주교회의 때도 성체대회의 명칭에 관해서 성체란 말을 살려야 되는지, 고쳐야 되는지가 문제로 대두되었다. 결국 성체대회란 명칭을 그대로 쓰기로 했지만 우리말로 가장 적절한 말은 성찬이다. 그러나 성찬이란 말은 많이 쓰는 말이 아니므로 계속해서 성체대회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고치는 것이 더 좋을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이다. 만약 말을 고친다 해도 무엇으로 고쳐야 하는지 분명치 않으며, 성찬제나 성찬축제로 바꾸면 좁은 의미의 성체가 아니라 미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겠다.

성체대회의 뜻은 미사 축제로써, 우리가 모여서 미사의 참뜻을 찾아보고 미사를 함께 봉헌한다는 것, 감사를 드린다는 것이다. 축제라는 것은 하나의 기쁜 행사를 뜻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대체적으로 미사를 습관적으로 별 생각없이 올리게 되므로, 미사 전체를 생각해보며 교우들이 미사에 대해서 묵상을 할 수 있도록 자료를 제공하자는 것이 성체대회의 의도이다.

비록 남북으로 분단되어 한쪽에서는 신앙의 자유조차 누리고 있지 못하지만 한국 교회는 그동안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많이 발전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 거행되는 성체대회를 고맙고 기쁜 축제로 받아들이며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한국에 함께 모여 미사를 통하여 하느님 백성의 축재를 거행하고 그 의미를 묵상하는 것이 세계성체대회의 참뜻이라 하겠다.

 

II. 미사의 흐름에 대하여

성체라는 용어가 미사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라면 미사 전체의 흐름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전부터 여러 가지 기도를 바쳤다. 그 중에 베라카(Berakah) 라는 기도를 많이 바쳤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고유한 기도 방식이다. 우리는 베라카를 감사 기도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것은 각자 개인이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라기보다는 선택된 백성이라는 민족적 차원의 의식에서 드리는 기도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달해 주셨으므로 하느님을 믿고 성서와 대자연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음을 무척 기쁘고 고맙게 생각하였다. 또한 그들은 다른 백성들과는 달리 하느님께서 그들을 특별히 생각해 주셨기 때문에 참하느님을 알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편의 많은 부분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참 좋으신 분이다. 사랑이며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하느님께서 당신 계획에 우리 같은 사람을 생각해 주셨다. 하느님의 계획은 너무도 오묘하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계시의 하느님으로 받들어 모시고 찬미, 찬양한다”는 표현이 있다. 이러한 기도가 이스라엘 백성의 고유한 기도라고 할 수 있으며, 베라카이다. 그들은 이 기도를 수시로 드렸지만 특히 식사 때 많이 했다. 식사 때 하느님께서 주신 음식을 먹고, 하느님을 찬미, 찬양하고,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것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1년 중 감사의 기도를 가장 많이 바치는 날은 빠스카의 제사를 올리는 날(해방절)이었다. 그날 장엄한 식사를 하고 식사 끝에 긴 감사의 기도를 했다(Hallel).

해방절 식사 때 드리는 시편 기도: 시편 113-118 작은 할렐(Hallel), 시편 136 큰 할렐(Hallel), 시편 146-150 제3 할렐(Hallel).

위 시편을 기도로 바치면서 하느님께서 해방을 통해서 특별히 당신의 섭리를 보여 주심에 진 심으로 감사를 드렸다. 그것이 예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쳤던 감사의 기도이다.

예수께서는 매년 해방절 식사를 하셨고, 장엄한 기도를 바치셨으며, 성체성사를 세우신 날도 바로 그 식사 때를 택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던 그날, 그 시간에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이다.

감사 기도 중에 가장 뚜렷한 감사의 기도는 예수께서 상징적으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바치신 것이다. 배경은 감사의 기도인데 예수께서 완전한 감사의 기도를 바치신 것은 성체를 이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첫 번째 미사이며 이스라엘 백성이 바쳤던 기도를 예수께서 완성시키신 것이다. 그 때문에 초대 교회는 이 만찬을 수시로, 특히 주일에 기념하기로 하여 우리가 말하는 미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미사는 하느님을 찬미, 찬양하고 하느님의 계획을 음미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다. 미사 때 전반부를 말씀의 전례, 후반부를 성찬의 전례라고 구별하는데 사실은 하나로 생각해야 한다. 미사 시작부터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미사 순서는 하느님의 뜻을 받들지 못했음을 용서 청하고, 성서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고맙고 기쁘게 생각하며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을 우리 것으로 만들고 그 흐뭇한 분위기 속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으므로 하느님께 가진 모든 것을 다 드린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주셨고, 많은 은총을 주시기 때문에 고마와서 가진 바 모든 것, 우리 몸까지도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올린다 해도 그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좌품, 주품, 세라핌, 케루빔 천사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 세상 만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합쳐 바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이 하느님을 찬미 찬양해도 부족하므로 예수께서 우리들 가운데 오신다. 이것이 미사의 축성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가운데 오시면서 당신의 몸과 피를, 죽음과 부활을 하느님 아버지께 바쳐드리신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도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께 바친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와 더불어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며 ‘아멘’ 하는 것으로 미사의 절정에 이르는 것이다. 미사란 모든 것, 예수 그리스도까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올려 바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것을 받아들이시고 우리들에게 돌려주시는 것이 성체이며, 영성체이다. 이렇듯 미사는 이스라엘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통해서, 교회 역사를 통해서 지속되며 가톨릭의 특유한 예절이다.

성찬기도 끝부분의 ‘아멘’ 이후 미사 순서를 보면 주의 기도가 나오고 그 다음에 평화를 비는 기도와 영성체로 이어진다. 이 세 가지가 미사의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체대회를 맞이하여 미사를 음미하고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참으로 미사의 흐름 속에 깊이 잠겨보자. 전세계의 사람들이 한국 땅에서 미사를 올리게 되면 우리에게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III. 평화에 대하여

한국에서 개최될 성체대회의 주제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이다. 미사 흐름 속에 평화라는 주제에 대해서 묵상해야 되지 않겠는가? 미사가 지상의 것을 하느님 아버지께 올려드리고 다시 받는 것이라면 평화도 마찬가지이다.

매년 새해 첫날에 선포하시는 교황님의 평화 메시지를 보면, 세상은 평화롭지 못하지만 평화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치고, 또 하느님으로부터 그 평화를 받는다는 순서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것은 평화는 위에서부터 우리에게 내려온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힘으로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지 못하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미사 때 평화를 원하고 평화로운 가정,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우리의 노력을 바치고, 그것도 모자라기 때문에 오직 평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모신다는 흐름 속에 평화라는 주제를 생각하게 된다면 이 주제는 우리에게 꼭 맞는 주제인 것 같다.

세 가지 부제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미사를 올릴 때 가톨릭 신자들만이 미사를 올리는데, 온 인류의 이름으로 제사를 올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주님으로 우리들에게 돌아오신다는 것도 만민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사의 흐름을 만민이 미사를 올리며, 만민에게 도움이 되는 미사로 생각하자.

너희는 이를 행하라: 우리 힘으로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예수의 지시, 그분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런 식으로 노력해도 평화로운 가정, 평화로운 나라, 펑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으므로 우리의 평화이신 예수께서 오셔야만 한다.

우리와 함께 머무소서: 예수께서 미사와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은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사 때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 생활을 동해서 모든 것을 올려바치고 우리 생활 전체를 평화이신 예수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체대회는 미사의 대축제이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를 미사와 결부시켜서 연구하고 묵상해야 할 것이다. *

 

세계성체대회에서의 성체 이해

  1. 프라츠너 (F. Pratzner)

 

제42차 세계성체대회(1981년 7월 16~23일 루르드)에 즈음하여 성찬의 이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뜻있는 일로 여겨진다. 지난 30년에 걸쳐 거듭되어 온 성체대회는 성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매우 뚜렷이 드러내 준 바 있다.

오늘에 있어서의 성체대회의 목적

세계성체대회는 성체의 신비를 통하여 교회를 새롭게 하고 그로써 세상의 구원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한 목적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그러나, 이 성체대회는 더 뚜렷한 성격을 나타내고 더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데 이러한 추세는 성찬에 대한 이해의 쇄신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이제 그 진전을 살펴보고자 한다.

 

역사적 개관: 초창기에서 1960년 뮌헨 성체대회까지

성체대회의 역사적 기원은 한 순례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따미지에(E. Tamisier)의 발의로 성체 흠숭을 그 목적으로 하여 1874년 아비뇽에서 행한 순례였다. 그 순례에 이어 많은 순례가 있어 왔고 제1차 성체대회가 개최되기에 이른 것은 1881년 프랑스 서북부 릴(Lille)에서였다. 따미지에는 하느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만 가는 세상을 위해 성체 조배가 가장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여 성체 수도회의 창설자인 에마르(P. G. Eymard)의 영향을 받아 이러한 움직임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특히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교회가 갈수록 공생활의 영역에서 물러나 이를테면 제의방으로 쫓겨들어가는 형편이었다. 종교는 한갓 사생활의 측면으로 겨우 용납되는 지경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성체대회를 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신앙을 온 세상에 증거할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뿐더러 많은 믿는 이들이 모임을 통해 그들 자신의 신자됨을 굳건히 하고 재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여겼다.

1914년까지 세계성체대회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거의 해마다 열렸다. 예외가 하나 있다면 카나다의 몬트리올에서 열린 대회였다. 첫 대회 이후 33년 이내에 25회가 열렸고, 지금까지 1백 년 동안 모두 42회가 개최되었다. 그 후로는 대회의 개최 빈도가 낮아졌고 1,2차 세계대전 후에는 보통보다 그 개최 중단 기간이 더 길었다. 그리하여 제26차 세계성체대회는 1922년에야 비로소 로마에서 개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1952년에 제25차 대회가 바르셀로나에서 한 번 열렸을 따름이었다. 스페인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전례학자인 파슈(P. Pasch)가 한 개회사는 상기할 만하다. 그는 “미래의 한 성체대회”의 꿈을 이렇게 피력하였다.

수백만이 군집하는 대집회를 지향하기보다는 오히려 믿는 모든 이들에게 미사의 신비를 가르치기 위한 하나의 행사, 그리고 그들이 능동적으로 미사에 참여하게끔 하는 행사를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 말씀이 기본 구성 요소가 되는 그러한 미사였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 없이는 성찬 거행이 벙어리 거행이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참여자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시는 미사가 되기를 꿈꾸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 도에서 교황께서 성찬의 해를 선포했으면 하였다. 성찬의 해를 맞아 필요한 외국 전례의 쇄신을 넘어서 특히 성직자들이 미사를 더 깊이 배우고 아울러 하느님 백성의 능동적 참여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면 하였다. 왜냐하면 “전례의 진정한 효능을 위해서는 성직자의 역할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1900년 뮌헨 대회까지의 내용과 형식

모든 성체대회의 내용은 언제나 성찬의 행위이다. 식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초월한 현존과 전례의 다양한 형식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여러 가지로 규정되어 왔다. 초기 대회 시기에는 특히 성체 현시 등 성체를 섬기는 여러 행사를 잘 준비하는 데에 주로 마음을 썼다. 영성체와 미사는 이들 신심 행사의 언저리로, 때로는 그저 배경처럼 밀려나는 수가 일쑤였다. 성체 운동과 전례 운동 그리고 공동체적 교회적 의식의 진작을 전체로 이해시키고 점차 묶어 주었다. 초창기부터 뮌헨 대회까지 성체께 대한 흠숭의 가장 장엄한 형태는 성체 거동이었다. 성체를 모시고 대회가 개최되는 도시의 거리를 반나절씩 행진하곤 하였다. 조직상 가장 거창하던 이 성체 거동은 이 세상의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성체의 개선 행진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개선 행진이 작은 규모로나마 시작된 것은 교회 초기부터였다. 그러나 곧 한 겨레에서 다른 겨레로 퍼지면서 서양을 휩쓸고 세계의 가톨릭권을 사로잡았으며 우리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당당한 개선이 계속되는 것이다. 과연 성체 안의 하느님은 화려한 가마에 모셔져 황도의 거리를 행차하시게 된다.”

이상은 비엔나에서 열린 제23차 성체대회에서 부카레스트 대주교가 한 말이다. 성체대회 발전에 가장 획기적인 이정표를 제시한 것은 교황 비오 10세이다. 교황께서는 “대회의 주 목적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신분을 달리하는 모든 이가 성찬을 통해 사랑을 되살리게 하는 데 있다. 성체 흠숭의 모든 형태는 영성체를 이끌어야 하고 또 영성체를 위주로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 때문에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은 이미 대회가 열리기 몇 달 전부터 단위별, 연령별로 나누어 준비해야 할 것이다. 비엔나 성체대회에서는 여교우 좌석 부분만 해도 성체 분배를 하는 데 10만 명의 복사가 이를 도와야 했다.

그렇다면 미사 성제는 어떻게 되었는가? 여전히 존중된 것은 물론이지만 “신비로 에워싸인 관습적 형태에 묶인 나머지 참으로 생활한 전례 행위의 중심을, 더욱이 대규모의 행사로서 이루기는 어려웠다.” 이런 면에서도 비엔나 성체대회는 하나의 좋은 예가 된다. 성 스떼파노 대성당에서 출발하여 구 도시 외곽의 순환도로를 한 바퀴 돌아 호프부르그 황가의 궁궐 옆에 있는 영웅 광장에까지 이르는 어마어마한 행렬 끝에 “수도의 바깥 대문 광장에서 무언 중에 미사를 올리고 나서 성체 강복이 있다”는 식이었다.

그 이후의 성체대회에서도 비록 미사는 장엄 주교 미사로 올리게 되었지만 결국 한 마디로 “성체대회 진행의 한 요소이기는 하나 중심적인 것은 못 되는 부차적인 것”에 머물렀다. 이런 식으로는, 많은 성체대회의 경우 유일무이하고 위대한 성찬의 신비가 하나의 단일한 현실로 드러날 수가 없었다. 희생, 잔치, 현존 등 그 여러 측면이 살아 있지 못하고 또 행사 거행으로도 서로 잘 이어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서로 다르고, 그저 나란히 있는 요소들로서 서로 다론 비중이 전체성을 깨뜨렸던 것이다. 성찬 거행을 온 백성의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를 통해 성체 신심의 중심으로 되찾은 것은 무엇보다도 전례 운동의 공헌이었다.

 

세계성체대회: 하나의 스따시오 오르비스(Statio Orbis)

제37차 세계성체대회는 융만(J. A. Jungmann)의 발상에 따라 스따시오 오르비스(Statio Orbis: 용어의 뜻은 뒷부분에서 설명된)로서 거행되었다. 세계성체대회 80년의 역사상 처음으로 성찬 예식이 정점으로 부각되었다. (종전처럼 성체 거동이 더 이상 중심을 이루지 않았다.) 그런데 스따시오라는 이 용어의 뜻을 한 마디로 어떻게 옮기면 좋을까? 로마 전례에 있는 스따시오 즉 스따시오 우르비스(Statio: 잠시 머무는 곳. Urbs: 도시 즉 수도 로마. Urbis는 Urbs의 소유격. 즉, 로마 주교가 주교좌 성당이 아닌 본당이나 공소에서, 단일한 사제단의 으뜸으로서 사제 및 교구민과 함께 일치를 드러냄과 아울러 공고히 하는 미사를 거행하는 일. 우리말로는 편의상 순례 미사라고도 함)를 세계성체대회의 모형으로 삼아 스따시오 오르비스(Orbis: 지구. 소유격 또한 Orbis)라는 개념을 창안했던 것이다. 이러한 단순한 아이디어 뒤에는 수세기 동안 무르익고 다져져 온 성찬례에 대한 깊은 변화가 숨겨져 있다. 성체와 성찬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이해를 위해 수십 년 동안 많은 난관을 무릅쓰고 애쓴 것은 무엇보다도 전례 운동이었다. 융만은 이렇게 말하였다. “스따시오라는 개념을 통해 참여하는 회중은 성체성사와 엄연히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그 관계란 필요하고 본질적인 것으로 어떤 한 종교 행위를 위해 백성이 그저 외적으로 모이는 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주님의 몸을 함께 바치고 받아 모심으로써 참여하는 회중은 주님의 신비체로서 알아볼 수 있게 되고 또 실제로 보이는 것이다. 거룩한 중심점에서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빛살은 어딘가 막연한 데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로는 그 바탕과 테두리를 찾아 얻게 된 것이다. 이제는 중심점에서 퍼져 나가는 빛살이 성찬을 함께 거행하는 수천 수만이 이루는 회중 위에 하나의 빛 천정을 이루게 되면서 찬란해진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다”(1고린 12,27)라고 하신 말씀이 진정 이루어진 것이다.

성체 거행 전반과 하느님 백성이 맺게 된 이 새로운 관계는 거행 밖에서도 그 일관성을 유지한다. 즉 성체 조배와 성체 거동도 그 관계에 따라 새로이 이해하고 행하는 것이 된다. “하느님 백성을 저버린 채 성체의 위대함만을 찬양함은 쓸데없고 무의미한 일이다. 하느님 백성은 성체가 그 생명을 기르고 그 내적 삶은 바로 성체가 거듭 새롭히는 하느님 영의 삶이기 때문이다. 구원 경륜의 수혜자는 성체가 아니라 하느님 백성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시대의 모든 쇄신 노력은 그리스도교를 신자 자신에게 현실이 되고 내실이 되도록 하면서 교회 생활 전체에 삼투하게끔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성체란 우선적으로 흠숭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모든 이를 그리스도의 몸과의 일치에로 이끄는 구심점이며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샘의 삶을 대주는 원리이다. 라찡거에 의하면 “뮌헨 성체대회는 전례 및 신학 발전의 한 이정표, 온 교회를 위한 한 지침이 되었다. 이 행사는 성체대회의 한 새로운 규범을 이루었고 종래의 모형에서 상당한 거리를 취하면서 미래에는 간과할 수 없는 모형을 제시하였다. 이 대회는 틀림없이 공의회를 위한 준비의 좋은 요소가 되었고 교회의 새롭고 순화된 교황의 말씀대로 공의회의 익은 열매를 뜻하는 자체 이해의 길을 열어 주었다. ”

 

뮌헨 대회 이후

뮌헨 대회 이후의 세계성체대회는 점점 더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 요청과 희망을 포용하게 되었다. 뮌헨 이후 인도 봄베이에서 1964년에 열린 대회에서는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봉사”라는 주제에 성체 신심을 밀접히 연결시켰다. 대회를 전후하여 애덕을 베푸는 샘인 사랑의 성사와 그 애덕의 구체적 실행간의 필연적 관계를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그 결과 식량(주로 곡식과 밀가루), 약품, 의류 등을 마련하는 데 20만 마르크 이상이 사용되었다. 교황은 31,250자루의 밀을 실은 배를 보내어 개최일에 입항하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4년 후 1968년에는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대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지향했던 바는 새로운 종교적 힘을 샘솟게 하여 더욱 폭넓은 사회 정의를 실현케 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 준비 작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3년에 걸친 복음화 운동이었는데 이를 위해 여러 단체와 홍보 수단(특히 라디오)이 크게 동원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룬 개개 명재는 대회의 표어인 “사랑의 유대”의 의미를 풀이하면서 이를 가정, 공동체, 국가 안에서 실현할 유대 관계에 적용시켰다.

바오로 6세는 강연 중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내게는 그리스도입니다... 본인은 존경을 받으러 오지 않고 여러분 안에서 주님을 공경하기 위해 왔습니다.” 성체와 성찬은 이제 하나의 새 차원을 얻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1976년 미국 필라델피아 성체대회에서도 사회적 주제들이 무엇보다 우선시되었다.

보고와 강연들을 통해 성체와 인간 가족이 겪고 있는 굶주림의 여러 형태를 다루었다. 굶주리는 이들과의 구체적 유대의 상징 행위로 “한 줌의 쌀” 운동을 전개하였다. 많은 이들이 일주일에 한 끼니씩을 거름으로써 500만 달러를 모을 수 있었다.

 

1981년 루르드: 미래의 성체대회

루르드 성체대회를 위해 택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새 세계를 위해 떼어 나누어진 빵”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준비위원회 앞으로 보낸 교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향한 효심과 사람들 사이의 우애로 표시되는 하나의 새 세상 즉 하나의 새 인류 그것은 곧 생명의 빵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쪼개고 나누는 빵에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속수무책으로 수동적 태도에 머물면 안된다는 각성을 새롭혀야 한다. 이 세상을 남들에게 내맡겨 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의 힘과 영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인간 공동체를 이룩하도록 불리운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이 침에 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한 바 있다.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에 이렇게 쓰여 있다. “인간은 자신의 활동을 통해 이 지상에서 하늘 나라의 소지를 이룩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이 시각부터 거의 모든 교구에서 그 나라 대표의 책임 하에 성체 거행 및 신심 실천의 개혁과 성찬에 대한 이해의 심화를 촉진하기 위한 양성 프로그램이 전개되었다. 루르드 준비위원회에서는 그러한 노력을 돕기 위해 하나의 신학적 기조문과 그에 부응하는 교리 교재를 제공하여 여러 단위의 작업에 활용하기 쉽도록 하였다. 이들 문헌이 성체와 성찬을 폭넓게 그리고 다각적으로 제시하였기를 바란다. 여기서 요체를 이룬 말들은 회중, 하느님 말씀, 감사, 화합으로서의 희생, 해방, 맹약, 영, 현존, 영성체, 사명 등이다. 성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흠숭은 현존이라는 말로 집약된다. 이와 관련하여 “하고 많은 남녀가 절대를 찾는 마당에 교회는 성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흠숭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세계성체대회의 역사적 개관은 성체와 성찬을 그 충만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적 실존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 일이 한편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하는 동시에 또 한편 우리를 살찌우고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가를 그런대로 뚜렷이 보여주었을 것이다. 교회 자체가 그렇듯이 오늘과 내일의 세계성체대회 역시 더욱더 이 세상 안에서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한 희망의 표지, “만민 위에 세워진 표징”(이사 11,12)이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