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성체대회
2021-05-13 15:14
2021-05-13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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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성체대회의 의미: J. 융만(J. A. Jungmann, S. J.) (1)

세계성체대회의 의미

  1. 융만(J. A. Jungmann, S. J.)

 

그리스도는 당신의 교회를 가시적인 공동체로 설립하셨다. 그분은 교회를, 관심을 끌 수밖에 없는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로 묘사하였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숨겨진다는 생각은 아예 버리셨다.

수세기 이전을 회상해 보면, 우리는 이런 생각이 외적 풍경에서까지 현저하게 드러나는 시대를 생각하게 된다. 셀 수 없이 많은 성소가 모든 지방에 흩어져 있었고, 한편 도시는 높이 솟은 교회의 첨탑이 주위의 경관을 지배하고, 성당에는 그 시대의 온갖 부와 최고의 예술품들을 간직하고 전시하였다.

이에 비하면 오늘날의 상황은 쇠퇴되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장의 굴뚝이 교회의 첨탑보다 더욱 높아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은행, 기차역, 극장 및 호화로운 호텔 등은 교회를 오랫동안 그들의 그늘 아래 묻어두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자신의 모습을 사회 상황 전반에 이르기까지 드러내고 보존하고 증언해 오고 있다. 교회와 교회의 여러 기관들은 여전히 우리의 가정 가운데에서 그들의 복잡한 양식을 엿보게 한다. 교회의 종소리는 주일 날 여전히 울리고, 또 주일은 아직도 사회 생활의 리듬을 결정한다.

그리고 비록 오늘날의 교회가, 기술 시대의 허다하고 거대한 기념물 아래 겨우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해도 그런대로 감명 깊게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예몰 들면, 교회가 큰 축일을 지내거나 큰 회의를 치를 때 수십만의 신자들이 모여 어떤 도시의 대강당을 채우거나 더욱이 여러 국민들이 세계성체대회를 거행하기 위해 세계의 그 어느 대도시로 모일 때가 바로 그러하다.

사실 그러한 사건은 어떤 중대한 역설을 수반한다. 성체성사는 교회의 가장 성스러운 재산이요, 가장 내밀하고 깊은 실재로서,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불가견적 세계가 현세와 접촉하는 것이요, 그 면전에서는 오직 경건한 침묵과 열성적 신심만을 지녀야 할 신비이다. 고대의 백성에게서조차 성전(templum)은 흠숭의 장소가 아니라 세속과 동떨어진 하나의 영지, 즉 속된 것에로부터 분리된 성역으로서 가능한 한 속세의 일상사와는 별 관계가 없는 곳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성체성사에 있어서 거룩한 실재들에 대해 보다 심오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가 있으니 즉 가시적상(species)―빵과 포도주―이 그 실재를 의미하고 거기에는 오직 신앙만으로 파악될 수 있는 신비(mysterium fidei)라는 문제가 있다. 오늘날 신앙이란 상처받기 쉬운 것이라 많은 현대인이 더 이상 그것을 지닐 수가 없고, 경험주의 시대에는 믿음이란 그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많은 이의 조소를 받게 되었다.

 

어두운 세상 안의 씨앗

다른 한편 성체성사는, 그것이 지닌 내밀성과 내면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외적 세계로 향해 뻗어 나가고 있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 땅 속에서 위로 치솟아 올라 밝은 빛 속에서 마음껏 성장하는 씨앗과 흡사하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세상에 오실 때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묘사함에 있어 성장과 자기전개(self-unfolding)의 표징을 조리정연하게 이용하신다. 하늘 나라는 이 세상이라는 밭에 뿌려진 씨앗이다. 또 하늘 나라는 내부로부터 강하게 활동하는 누룩이다. 그것은 또 작아서 별 희망이 엿보이지 않는 겨자씨이나 마침내 한 그루 나무로 자라 그 어느 날엔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된다.

성체성사에서 겨자씨로 상징된 실재는 말하자면 가장 작은 우주로 집약된다. 여기에서 인간 가운데 오시는 하느님 아드님의 강생―신성과 인간성이 혼돈이나 나눔 없이 신비롭게 결합된―이 실현된다. 그분이 오심에서 비롯되는 세상의 축성(Consecration of the world)이 여기에서 새로워진다. 그리스도께서는, 방식은 다르지만 다시 한 번 밀과 포도 같은 현세의 물질을 소재로 삼으신다. 밀은 곡물 밭에서 나고, 포도는 포도원에서 난다. 그분은 온 땅을 두루 다니시며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밀떡과 포도주를 통해 우리를 당신 가까이 끌어당기신다.

그리고 여기에는 오직 신인(God-man)의 거룩한 위격만이 아니라 그분의 활동과 수난의 구속적 신비가 현존하고, 따라서 성체성사는 성부께로 돌아감이고, 성부의 뜻에 따른 그분의 속죄적 순종의 신비이며 그것으로 그분은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 주신다.

성체성사의 신비를 지닌 겨자씨는, 바로 이 때문에, 모든 점에 있어서 대낮의 밝은 빛으로 치솟고 있다. 그 안에는 씨앗이 지닌 어떤 신비로운 본성이 숨어 있는데 그것은 주위의 땅에서 자양분을 끌어올릴 수 있고, 싹을 틔워 솟아오를 때 자신의 형태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성체성사는 믿는 이들을 함께 불러 모은다. 거기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말뚝이 가장 분명하게 실현된다. “내가 높이 들리면 나는 모든 것을 나에게로 끌어 올리리라.”

이것은 초대 교회의 기도에 영감을 준 사상이었다. “이 낱알들이 온 산에 흩어져 있다가 지금 함께 모여 하나가 된 것처럼, 당신의 교회도 세상 종말에 함께 모여 당신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소서.”2)

 

성체성사와 교회

성체성사에서 그리스도는 당신의 신비체를 세우셨다. 수년 전 유명한 신학자가 신비체(Corpus Mysticum)라는 제목의 책3)을 냈는데, 그 당시에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 제목은 교회에 관한 저작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또한 성체성사에 관한 저서임도 확실하다.

그 책에서 저자는 “신비체”라는 말마디가 최초로 그리고 수세기 동안 성체성사로 이해되었음을 밝힌다.4) 그 자체로 단순히 “거룩한”, “신비로운”이란 의미를 지니는 형용사(mysticum이란 말마디)를 사용함으로써 카를링거 왕조 시대(The Carolingian age)의 신학자들은 성사 안에 현존하는 주님의 몸을, 한편으로는 주님의 지상 생애 기간의 물리적 존재 양상과 구별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라는 주님의 몸과 구별하려 했다.

이제 지상적인 몸, 성사적인 몸, 그리고 교회라는 이 세 가지 개념에 대하여, 후자의 두 개념을 밀접히 결부시키고, 성사적인 주님의 몸을 교회 안에서의 현현(manifestation)과 관련시켜 보려는 전통이 지난 수세기 간 계속되었었다.5) 이것은 단순히 성 바오로의 사상(1고린 10,17)을 따르는 것이었다.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띠누스가 성체성사에 관해 언급할 때 이러한 사상이 그를 계속 사로잡았었다. 성 바오로가 인용한 말씀을 그가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다음 인용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된다. 만일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 살기를 바란다면 그리스도의 몸이 될 것이다.”6) 그리고 그는 이러한 일치의 기본이 되는 성사를 찬양한다. “오, 은총의 신비여, 일치의 표지여, 사랑의 끈이여!”

아우구스띠누스는 두말할 나위 없이 다른 교부들과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몸의 실제적 현존에 관해 언급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교회의 일치에 효과를 주는 창조력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에서 성체성사는 단순히 주님의 몸과 피일 뿐 아니라 교회 일치의 표지가 된다.

세례를 받은 신입 교우들에 대한 그의 강론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만일 당신들이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분의 지체들이라면 주님의 식탁 위에 놓인 것은 또한 당신들의 신비가 된다. 그리하여 당신들은 당신 자신들의 신비를 받아 모시게 된다.”7) 여기에서 아우구스띠누스는 이미 고대 교회의 자의식 속에 뿌리박혀 있던 사상을 더욱 명백히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영성체”는 오늘날처럼 그리스도의 성사적 몸을 받아 모시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마디는 한 공동체의 지체들로서 신자들의 결속이라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성인들의 통공”(Communio Sanctorum)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오늘날 공통적으로 이해되는 것처럼, 이 말마디는 “성인들이 서로 공을 통한다”(the communion of saints)는 한 가지 의미만을 지닌다. 즉 세례로써 성화된 영혼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라틴 교회(및 희랍 교회)에서 그 말마디는 “거룩한 것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성인들의=거룩한 것들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거룩한 것들에 의해 함께 모인 공동체, 즉 그 가운데서 성체성사가 첫 자리를 차지하는 바 거룩한 교회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다. 아우구스띠누스가 자기 이전 및 이후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사용한 그 표현은 의심할 여지없이 주로 이 마지막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성체성사는 “신비체”이고 교회 또한 신비체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체성사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신비체”라는 말마디가 바뀌어서 교회에만 배타적으로 적용된 것은 스콜라 시대의 시초에만 있었던 일이다. 뚜르네의 시몬(Simon of Tournai: +1201)으로부터 인용한 다음 문장은 그러한 의미 변화가 이미 일어났음을 보여 준다. “제단의 성사에는 두 가지 실재가 존재한다. 즉 그리스도의 실재적 몸과 교회이다.”8)

이런 발전에서 나온 주목할 만한 결론은 성체성사와의 연결이 점차로 빛을 잃은 것만이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형이상학적 또는 비실재적인 그 무엇 및 신비체에 의해 진단된 개념으로 사용되었던 “신비체”라는 단어는 단체적인 몸의 한 종류로 암시되었기 때문에, 윤리적 일치의 개념으로부터 거의 구별될 수 없었다. 실제로 악마의 신비체에 관해 언급될 정도까지 사태가 진전되었으며,9) 반면에 교회에 적용된 신비체라는 명칭은 의미가 공허해졌고, 금세기까지 그 명칭은 실제적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고대 교회는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과 관련시켜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성사적 몸을 생각하였다. 이와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그 후대의 교회는 특히 종교 개혁자들이 대두된 후 이단적인 공격에 즈음하여 성체성사를 거의 그리스도의 역사적 및 지상적인 존재 양상에만 결부시키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리하여 뜨리덴띠노 공의회에서 “실재적으로, 참으로 또 실존적으로”라고 표현된 것처럼 실재 현존에 대한 교리를 납득시키려 애썼다.

근대에 이르러 이런 방향으로 진전함에 따라 우리는 오늘날 고대 교회의 영적 유산 중 소홀했던 다른 부분을 다시 간직하게 되고 다행히도 성체성사에 대한 이해에 못지않게 교회 전체에 대한 이해를 갖는 결과를 얻고 있다.

우리는 교회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의 공동체로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였으며 신자들은 그분의 지도 아래 이 세상을 이기고 하늘의 삶을 얻게 되며 마침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현세에서 그 길을 준비한다고 배웠다. 이제 더 이상 교회에 나와 교회의 배려를 받기만 원하지 않고 그들 자신이 교회임을 깨닫고 교회의 성직자들과 함께 교회를 위한 책임을 나누어 지려는 신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제 “교회는 인간의 영혼 속에 깨어 있는 것”만은 아니다. 교회는 다시 수백만 수천만 인의 마음 속에 새로운 힘을 불어 넣으면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전례의 부흥

한편으로 성체성사는 더욱 완전하게 이해되고 있다. 독일의 전례 부흥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것들 중 하나는 신자들로 하여금 성체성사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하게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 원인이 무엇이고 또 그 결과(효과)가 어떠했는지는 언급하기 어렵다. 지난 세기에 사일러(Sailer)와 그 후임자 모흘러(Mochler)에 의해 매우 힘 있게 이루어진 교회 개념의 쇄신은 전례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토대의 일부가 되었다.

또 한편 전례 운동은 힘을 다해 교회의 기도 가운데 “우리”라는 말마디를 넣었고, 능동적인 참여를 신자들에게 호소하고 제대 주위로 예배자들을 모음으로써 교회에 대한 생생한 의식을 갖게 하는 데 발전적인 기여를 했다. 그리스도 신자는, 전 회중이 하느님 앞에 “거룩한 백성”으로 서 있으면서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거룩한 전례에 참여한 때처럼 하느님 나라 시민으로서의 자신의 존엄성을 자각하는 때는 없다.

우리 선배들은 제대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오직 멀리 떨어진 채 복된 성사를 쳐다보면서도 신앙의 생기를 얻었다. 또 그리스도의 몸이 축성되어 높이 들리는 순간을 보려고 성당의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독서대로 다가올 때 신앙의 기쁨은 용솟음쳤다. 또 교회 분열자(종교 개혁자)들이 실재 현존을 완강히 거부하는 가운데서, 이미 중세 후기 이래로 높이 평가되었던 제대 위의 성체 현시 때에도 그들의 영혼은 기쁨에 넘쳤다. 또한 늘어나는 수도 단체가 성체성사에 대한 공경을 종교 생활의 중심으로 삼았을 때에도 그들의 영혼은 즐거웠다.

그러나 우리가 성체성사를 공경하는 것만이 아니라 거행하는 것이라는 확신, 주님의 몸을 단순히 공경하는 것만이 아니라 봉헌하고 받아 모신다는 확신을 최근에 다시 가지게 되었음은 결정적인 진보이고 소득이다.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것은 무엇보다 교회를 구성하는 공동체의 지체들인 우리라는 것이 확실해졌음은 더욱 큰 진보이고 동시에 고대 유산의 재발견이다.

그것은 고립된 개별적인 영성체의 문제가 아니고 교회를 구성하는 우리 모두가 구심점, 즉 우리를 한데 모으고 우리를 한 공동체로 형성하는 구심점에로 끊임없이 되돌아가는 문제이다. 그것은 미사를 단순히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미사 집전에서 회중이 모이는 결합의 문제이다. 그것은 최소한 성체성사의 완전한 의미가 실천으로 옮겨지는 곳이면 어디서나 이루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개인적 신심이나 미사경본에 열중하게 되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공동의 봉헌 문제이다. “당신의 거룩한 백성” “당신의 교회” “당신의 가족”은 기도하고 감사드리고 찬양을 드린다.

이리하여 우리는 미사 중에 봉헌기도가 끝나고 봉헌 준비가 다 되었을 때, 왜 사제가 “우리 주 천주께 감사합시다. 이제 우리는 성찬 의식을 거행합시다(주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 경배의 공동 행위에 참여하도록 신자들을 부르는지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전례의 그 어느 곳에서도 공동체의 행위를 위해 부름이 이처럼 강하게 나타나는 곳은 없다. 이미 감사를 드리기 위한 부름 이전에 신자들에게 인사한 사제가 “마음을 드높이”라는 말을 했으며 매순간마다 사제는 신자들이 적당한 응답으로 그들의 동의를 표하기를 기다린다.

과거 수백년간 우리는 전례적 공경에 있어서 큰 발전을 이룩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어떤 벽촌의 교회에서조차 전례가 다시 공동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미사와 영성체는 또다시 하나가 되고 있다.

성 예로니모가 로마의 대성전 방문 기록에서 언급하듯 신자들의 소리가 어디서나 “하늘의 천둥”처럼 울리고 있지는 않으나, 신자들의 응답이 고대 교회 때처럼 다시 울려퍼지고 있다.

수년 전 미국의 어느 개신교 연구가는 상당한 기간 동안 이러한 발전을 가까이 지켜보고 나서 「로마 가톨릭 교회내의 진례적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10) 그는 독일어와 불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을 이런 운동의 발상지로 보고 있으며, 금세기는 결국 교회사에서 전례의 세기로 알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註〕

1. 본 논설은 본래 Stimmender Zeit(L959년 9월)에 실려 있는 것으로써 1960년 3월판 「The Furrow」에 번역하여 낸 것임(역자 Fr. Kevin McNamara of Maynooth).

2. Didache, ch., 9.

3. H. de Lubac, S. J., Corpus Mysticum. L'Eucharistie et l'Egtise au Mayen-Age (Paris, 1941), 2ed., 1944.

4. ibid., 34H.

5. ibid., 285ff., 294ff.

6. In Joh, tract. 26, 13 MPL, 35:1612.

7. Sermo 227. MPL, 38:1099.

8. de Lubac, op. cit., 287.

9. ibid., 286.

10. E. B. Koenker, The Liturgical Renaissance in the Roman Catholic Church (Chicago, 1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