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15 황심 토마스
  1. 황심 토마스 (1757∼1801)

 

황심(黃沁) 토마스는 충청도 덕산의 황매실(현 충남 예산군 덕산면 호음리, 일명 황무실 또는 황모실)에서 황서광(黃瑞光)과 김조이(金召史)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신거’(信巨) 또는 ‘인보’(仁甫)였으며, 본래의 이름은 ‘인철’(寅喆)이었으나, 1800년에 ‘심(沁)’으로 개명하였다.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어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토마스는 황매실에 살던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코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그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런 다음 연산(현 충남 논산시 연산면)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1796년에 지도층 신자들에 의해 북경 교회에 파견할 밀사로 추천되었다.

같은 해 겨울, 토마스는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의 명에 따라 북경으로 가는 사신 일행의 마부로 들어가 북경의 남당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알렉산델) 주교를 만나 야고보 신부의 편지를 전하고 세례를 받은 뒤 귀국하였다. 그리고 1797년에 다시 북경에 갔고, 이듬해 초 귀국길에서 옥천희(玉千禧) 요한을 만나 교회로 인도한 뒤 밀사로 추천하였다.

이후 토마스는 1799년에도 북경을 왕래하였고, 북경 교회에 조선 교회의 서한을 전달하거나 북경 교회에서 성유를 받아왔다. 그런 다음 1800년 7월에 연산을 떠나 서울 쌍림동으로 이주했으며,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등 여러 신자들과 교류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심 토마스는 강원도 춘천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는 교회 사정을 탐문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알렉시오가 제천 배론(현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은거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방문하였다. 당시 황사영 알렉시오는 조선의 박해 상황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안들을 적은 서한 곧 <백서>(帛書)를 북경 교회에 보내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이 문제를 토마스와 의논하였다. 그들은 9월 그믐 이전에 서한이 완성되면 이것을 옥천희 요한을 통하여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1801년 6월(음력)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체포되었다. 이어 토마스도 10월 22일(음력 9월 15일)에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으며, 황사영 알렉시오 때문에 박해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 이상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11월 2일(음력 9월 26일) 알렉시오의 은거지를 실토하였다. 그 결과 알렉시오는 11월 5일 배론에서 체포되었다.

황심 토마스는 11월 15일(음력 10월 10일) 포도청에서 의금부로 이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박해자들은 그의 행적 중에서도 서양인에게 세례를 받은 일, 북경에 서한을 전한 일, 알렉시오와 체결한 일, <백서>를 보고 전달을 모의한 일 등을 중요한 죄목으로 지목하였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서양 선박을 불러와 나라를 위태롭게 할 역모에 동참하였다.”는 판결 아래 능지처사형을 선고하였다. 그 결과 토마스는 1801년 11월 28일(음력 10월 23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