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17 옥천희 요한
  1. 옥천희 요한 (1767∼1801)

 

옥천희(玉千禧) 요한은 평안도 선천에서 옥윤기(玉崙氣)와 안조이(安召史)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가난하였던 그는 1794년부터 북경을 왕래하는 사신 일행의 마부로 들어가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1798년 초 귀국하던 길에 황심(黃沁) 토마스를 만나게 되었으며, 이후 선천에서 약국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옥천희 요한은 1799년 겨울에 다시 토마스를 만났다. 그리고 그와 함께 북경으로 가서 남당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알렉산델) 주교를 방문하였다. 이때 요한은 천주 교리에 대해 듣고 교회 서적을 보면서 교리를 배우려는 마음이 생겨났고, 동행한 토마스도 여러 가지로 그의 입교를 권유하였다. 이에 그는 구베아 주교에게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1800년 초 북경에서 귀국한 옥천희 요한은 황심 토마스와 함께 남대문 안에 있는 현계흠(玄啓欽) 플로로의 약국에서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를 만났고, 이어 강완숙(姜完淑) 골룸바 회장의 집에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도 만났다. 그런 다음 같은 해 겨울에는 토마스의 편지를 갖고 다시 북경으로 가서 구베아 주교를 만났다. 이때 그는 미사에 참석하고, 구베아 주교에게 『교요서론』(敎要序論)도 받아 공부하였다.

1801년 초 사신 행차를 따라 귀국길에 오른 요한은 3월 의주에 도착하여 신유박해 발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체포될 것을 염려한 그는 구베아 주교의 답장을 집으로 보낸 뒤, 사은사(謝恩使) 행차를 따라 다시 북경으로 갔고, 박해 상황을 구베아 주교에게 전한 뒤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6월 의주에서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옥천희 요한은 포도청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이미 천주교가 좋다는 것을 알았으니, 매를 맞아 죽는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고칠 생각이 없다.”고 하면서 굳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형조로 이송되어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며, 포도청으로 환송되었다가 11월 15일(음력 10월 10일) 의금부로 이송되어 국문을 받아야만 하였다.

박해자들은 요한의 행적 가운데에서도 여러 차례 중국을 왕래하면서 편지를 주고받은 일, 천주당에서 주교를 만나 세례를 받은 일, 토마스·알렉시오 등과 결탁하고 야고보 신부를 만난 일, 1801년에 다시 북경에 가서 나라 일을 서양인에게 전한 일 등을 중요한 죄목으로 지목하였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서양 선박을 불러와 천주교를 널리 전파하려는 계획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고하지 않았다.”는 판결 아래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 결과 요한은 1801년 12월 10일(음력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4세였다.

이후 조선의 신자들은 1811년 북경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옥천희 요한은 끝까지 마음을 굽히지 않고 올바른 신앙을 지키다 순교하였습니다.”라고 증언하였다.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