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20 김일호
  1. 김일호 (?∼1802)

 

김일호(金日浩)는 경기도 양근 출신으로, 고향에서 학문을 닦으며 의술을 배웠다. 그러다가 1799년 서울로 이주하여 살던 중 천주 교리가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약국을 경영하던 정인혁 타대오에게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빌려 읽었고, 그 교리를 진리라고 여겨 영세 입교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세례명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천주교에 입교한 뒤 김일호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황사영 알렉시오, 최필제 베드로 등과 교류하면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보고 교리를 연구하였다. 또 평신도 단체 명도회(明道會)의 하부 조직인 육회(六會)의 회원이 되어 서울과 지방에 교리를 전하거나 이를 실천하는 데 노력했으며, 주문모 신부가 집전하는 주일과 축일 미사에도 열심히 참례하였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발생하여 동료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는 것을 본 김일호는 두려움 때문에 지방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일곱 달 동안 도피 생활을 하다가 체포된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는 형조에서의 첫 문초 때 마음이 약해져 죽음을 면할 요량으로 변명을 했지만, 이내 신심을 다잡고 “앞서의 진술에서는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연장하려고 변명하며 진술했습니다. 그러나 이 지경에 이르러 어찌 첫 마음을 바꾸겠습니까? 천주교 신앙을 지키며 죽기를 원합니다.”라고 명확하게 진술하였다.

형조에서는 마침내 김일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동시에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 결과 김일호는 고향인 양근으로 이송되어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2년 1월 30일(음력 12월 27일)이었다. 이때 형조에서 그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포도청에서 숨김없이 자백하였으나 형조에서는 잠시 목숨을 살려볼 계책으로 진술을 번복하였다. 그러나 천주 교리에 깊이 물들어서 끝내 마음을 바꿀 수 없으며, 지금 비록 형벌을 당하지만 진실로 달게 받겠다.’고 하였다.”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