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46 이붕익 베드로
  1. 이붕익 베드로 (1843∼1866)

 

‘천조’(天祚)라고도 불리던 이붕익(李鵬翼) 베드로의 본관은 전주로, 황해도 신천(信川)의 양반 집안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붕익’은 그의 관명이다. 본래 그는 마음이 어질고 순했으며, 효성도 지극했다고 한다. 1866년 그와 함께 순교한 이의송(李義松) 프란치스코는 그의 부친이고, 김이쁜(金於哛) 마리아는 그의 계모였다.

언제부터인가 베드로는 부친 프란치스코와 계모 마리아와 함께 황해도 배천[白川]에서 살다가 1857년경에 부모와 여동생 바르바라와 함께 서울 차동(車洞, 일명 수렛골, 현 서울 중구 순화동⋅의주로)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2년 뒤 부친 프란치스코가 서소문 밖에 사는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회장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자, 그도 계모 마리아와 함께 부친의 권유를 받아들여 교리를 배운 뒤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때부터 베드로는 교회 서적과 묵주, 십자고상 등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생활을 하면서 교리를 실천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발발한 뒤 이붕익 베드로는 부모와 함께 황해도 신천(信川)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상경하여 비신자인 백부 집에 거처하였다. 그리고 다시 부모와 함께 시흥 봉천(현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사는 자신의 처남 이영택(李永宅)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포교들이 그의 백부를 닦달하여 그들 가족이 있는 곳을 알아냈고, 결국 베드로는 부모와 함께 봉천에서 체포되어 우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베드로는 포도청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정신이 혼미해지기도 하였다. 이때 부친이 “정신을 수습하여 실수하지 말라.”며 여러 차례 권면하자, 그때마다 베드로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배교를 거부하였다. 또 마지막 진술 때에는 “어찌 지금에 와서 천주를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1866년 10월 23일(음력 9월 15일) 부모와 함께 양화진 형장으로 압송되어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23세였다.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