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48 김진구 안드레아
  1. 김진구 안드레아 (1825∼1866)

 

일명 ‘순칠’ 또는 ‘재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진구(金鎭九) 안드레아는 김여선(바오로)의 아들로, 서울 남대문 안의 성 아래에 살면서 선혜청의 사령으로 일하였다. 그러다가 1846년 9월(음력)에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회장의 권유에 따라 페레올(J. Ferréol, 高 요한) 주교에게 천주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으며, 1849년 3월(음력)에는 견진성사도 받았다. 그리고 1862년 4월(음력)에는 정의배 회장의 집에서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를 만났으며, 이후 해마다 한 차례씩 베르뇌 주교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받았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드레아는 체포될 것을 염려하여 해주로 가는 배를 타고 피신하였다. 그러나 강화 말참도(末站島)에 이르러 풍랑을 만나 하선한 뒤 그곳 탄막(炭幕)에 사는 김(金) 씨의 집에서 얼마 동안 머물렀다. 같은 해 3월(음력)에 서울로 돌아온 안드레아는 공덕리(孔德里, 현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잠깐 거주하다가 그 집을 팔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가운데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이내 우포도청으로 압송된 김진구 안드레아는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도 선교사와 교우들을 밀고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 결과 그는 1866년 11월 11일(음력 10월 5일)에 최수(崔燧, 베드로), 김인길(金仁吉, 요셉), 김진(金振, 베드로) 등과 함께 양화진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41세였다. 포도청에서 문초 때에 그가 마지막으로 한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오랫동안 천주교를 믿어왔는데, 이제 와서 어찌 이를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빨리 죽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