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49 김큰아기 마리아
  1. 김큰아기 마리아 (1834∼1866)

 

김큰아기[金大阿只] 마리아는 평양 이문동(里門洞)에 살았으며, 16세 때 안주(安州)에서 의원을 하던 김진(金振, 베드로)과 재혼하였다. 남편 베드로 또한 1866년에 마리아와 함께 순교하였다.

마리아가 처음 천주 교리를 배운 것은 평양에 사는 유성률(劉成律)에게서였다. 이후 그녀는 1863년 1월에 남편을 따라 서울로 이주하여 약현(藥峴, 현 서울 중구 중림동)에 거주하다가 몇 달 후 청석동(靑石洞, 현 서울 종로구 견지동⋅관훈동)으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또 1864년 9월(음력)에는 최형(崔炯, 베드로)의 집에서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를 만나 ‘마리아’를 세례명으로 정하고 세례성사를 받았다. 한편 마리아의 남편 김진 베드로는 1864년 겨울에 이덕보(李德甫, 마태오)를 알게 되었고, 그의 권유로 입교한 뒤 1865년 3월(음력)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이후 마리아는 남편과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남편 김진 베드로와 함께 안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환자를 치료하러 평양에 갔다가 체포되어 11월 11일(음력 10월 5일)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매질 아래 죽어서 한결같이 천주의 가르침에 따라 즐겁게 좋은 곳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상경하여 우포도청에 자수하였다.

이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된 김큰아기 마리아는 “천주의 가르침에 따라 즐겁게 좋은 곳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했으니, 오직 빨리 죽기만을 바랄 뿐입니다.”라고 하면서 변함없이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 결과 마리아는 1866년 11월 16일(음력 10월 10일)에 동료 이기주(李基柱, 바오로) 등과 함께 양화진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 32세였다. 훗날의 증언에서는 마리아의 순교 용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였다.

 

“포도대장이 ‘배교하면 석방될 것이다.’라고 했지만, 마리아는 더욱 굳고 씩씩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러자 이를 본 모든 사람들이 ‘천주교를 믿다가 죽는 사람들 가운데 이렇게 용감하게 죽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