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51 이용래 아우구스티노

51. 이용래 아우구스티노 (1846~1869)

 

이용래(李龍來) 아우구스티노는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났으며, 황석두(黃錫斗, 루카)의 조카인 황 마리아와 결혼하였다. 이후 그는 처삼촌인 루카의 집에 자주 왕래하면서 그의 권유로 1859년경부터 천주 교리를 배웠고,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안토니오) 주교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이때 루카는 아우구스티노에게 “천주교는 매우 좋은 종교이며, 십계는 올바른 도리라고 할 만하다. 죽은 후에 반드시 좋은 데로 간다.”고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아내 마리와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아우구스티노는 1860년 무렵에 아내와 함께 홍산 부덕리(富德里, 현 충남 부여군 옥산면 대덕리)로 이주하여 훈장을 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1866년의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0월 18일(음력 9월 10일)에 처남 황기원(黃基元, 안드레아)과 함께 경포, 곧 서울의 포교에게 체포되어 홍산 관아에 투옥되었고, 4일 뒤에는 안드레아와 함께 다시 서울 좌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포도청에서의 처음 문초와 형벌 때, 이용래 아우구스티노는 마음이 약해져 “우매한 탓에 천주교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나라의 금령이 있었으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으며, “자신을 체포한 것은 이덕경(李德敬, 레오)을 자신으로 오인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는 처음의 진술을 번복하고, 다음과 같이 굳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저는 앞서의 진술에서 살아보려는 계책으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일들을 진술했습니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건대 도리어 신앙을 증거하고 죽는 것이 낫습니다. (천주교를 믿어 온 것은) 진실로 마땅히 죽을 이유가 됩니다…… 이렇게 체포된 마당에 주둥이가 석 자라 한들 어찌 죽을죄를 면하겠습니까?”

 

이렇게 신앙을 증거한 아우구스티노는 사형 판결을 받고, 1866년 11월 20일(음력 10월 14일)에 양화진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44세였다.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