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6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1.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

 

‘충청도 내포(內浦)의 사도’라고 일컬어져 온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는 내포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의 부유한 천인 출신으로, 본관은 경주였고,‘단원’(端源)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신분과는 달리 경제적으로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다.

본래 재주가 많은 데다가 학문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15세 이후 유명한 학자들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학문을 닦았다. 그러다가 17세 때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갔고, 특히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천주 교리를 배운 뒤 영세 입교하였다. 그런 다음 고향 여사울로 내려가 천주 신앙을 인근 지역에 전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1784년 말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된 직후였다.

루도비코 곤자가의 적극적인 전교 활동 덕택에 여사울을 중심으로 하는 내포 지역에는 얼마 안 되어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어 그는 1786년부터 약 1년 동안 시행된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아래서 신부로 임명되어 전교 활동에서 더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루도비코 곤자가가 첫 시련을 겪은 것은 1791년의 신해박해 때였다. 이 박해로 체포된 그는 공주 감영에 투옥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형식적으로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며, 곧 신앙을 회복하였다. 그런 다음 부여 홍산(鴻山)으로 이주하여 다시 전교 활동을 시작하였고, 1795년 봄 서울에서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를 만나고 돌아와서는 다시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같은 해 5월(음력)에 일어난 을묘박해를 피해 지방으로 내려온 주 야고보 신부를 자신의 집에 영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는 이 을묘박해로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그는 굳게 신앙을 지켰음에도 처형되지 않은 채 감영 옥에 갇혀 지내게 되었으며, 비밀리에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연락하여 교회 밀사를 북경에 파견하는 일을 돕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799년에는 한때 마음이 약해져 감영 옥에서 풀려나 천안으로 이송된 뒤 연금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변함없이 꿋꿋하게 교리를 실천하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루도비코 곤자가는 다시 공주로 이송되어 감영 옥에 투옥되었다. 그런 다음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서울로 이송되어 의금부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같은 해 4월 10일(음력 2월 28일)에는 해읍정법(該邑正法: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여 그곳 사람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의 명에 따라 공주로 이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그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문은 다음과 같았다.

“(이존창은) 천한 신분 출신으로 사교(邪敎, 곧 천주교)에 빠져 고향 사람들을 정도(正道, 곧 유교)에서 벗어나게 했고,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에 천주 교리를 전하였다.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모든 선처가 불가능한 처지에서도 하해와 같은 은혜로 수년 전에 그를 풀어주었다. 당시 그는 스스로 새로워지기로 약속하였으나……전에 (천주교에) 물들었던 생각을 뉘우치지 않았고 마음을 고쳐먹지 않았다. 이런 잘못을 생각한다면 그를 만 번 죽여도 가볍다.”

이후 루도비코 곤자가는 끝까지 어떠한 나약함도 보이지 않고 칼날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그가 순교한 뒤에 시신을 거두어 선산에 안장했는데, “그의 몸을 거둘 때 머리가 목에 붙어 있었음을 확인했고, 목둘레에 흰 줄만이 칼자국을 나타냈을 뿐이었다.” 고 한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