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63 김선양 요셉
  1. 김선양 요셉 (1808∼1866)

 

김선양 요셉의 본관은 경주요, 고향은 공주 새재(현 충남 공주시 봉정동 조령리)였다. ‘선양’은 그의 자(字)였고, 1866년 홍주에서 순교한 최 마리아는 그의 부인으로, 둘 사이에는 아들 요한이 있었다.

요셉은 30세가 되던 1838년에 가족들과 함께 천주 교리를 배워 입교했으며, 이듬해 온 집안이 전라도 고산 시어골(현 전북 익산시 여산면 대성리의 세목)로 이주했다가 기해박해로 고초를 겪어야만 하였다. 이때 요셉도 포교들에게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요셉의 집안은 충청도 진잠(현 대전시 유성구 진잠동)을 거쳐 전주 약바위(현 전북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로 이주했으며,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의 가족은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이에 공주로 가서 살다가 서산 강당리(현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김선양 요셉의 가족이 강당리에 정착한 지 6년 정도가 지났을 때 1866년의 병인박해가 발생하였다. 박해 초기에 그의 가족은 산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왔는데, 같은 해 11월 9일(음력 10월 3일)에는 강당리 회장이 체포되었고, 12월 13일(음력 11월 7일)에는 홍주 포교들이 다시 들이닥쳐 마을 신자 17명을 함께 체포하였다. 이때 요셉도 아들 요한과 함께 체포되면서 많은 매를 맞아야만 하였다.

포교들은 마을 신자들을 묶어 홍주로 가던 중 원벌(현 서산시 운산면 원평리) 주막에 이르러 신자들의 재산을 적몰한 돈으로 술을 마신 뒤, 요셉에게 “교회 서적을 가져다 바치라.”고 하면서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다. 그의 아들 요한이 “아버지 대신 젊은 내가 형벌을 받겠다.”고 하면서 서적을 갖다 바치자, 포교들은 요한을 석방하고 요셉과 마을 신자들을 오랏줄로 묶어 홍주 진영으로 압송하였다.

홍주 진영에 도착하자 영장은 포교들의 보고를 들은 뒤 일단 모두를 하옥토록 하였다. 그런 다음 3일 만에 문초와 형벌을 가한 뒤 다시 옥에 가두었다가 며칠 후 17명을 모두 끌어내 교수형에 처하였다. 이때 그들은 모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님 저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순교했으니, 때는 1866년 12월 27일(음력 11월 21일)로, 요셉의 나이는 58세였다. 이후 관아에서는 17명 순교자 모두를 한 구덩이에 묻었다고 한다.

요셉이 순교한 뒤 그의 아내 최 마리아도 아들 요한 대신 체포되어 1867년 1월 22일(음력 1866년 12월 17일)에 홍주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