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83 김홍범 요한

83. 김홍범 요한 (1822~1867)

 

김홍범(金弘範) 요한은 서울 문안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모친에게 천주 교리를 배워 실천하였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착하고 후덕한 성품을 지닌 데다가 착실했으므로 차츰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다. 17세 때 김 씨와 혼인하여 두 아들을 두었으나 상처하고, 25세(1847년) 무렵에 김아기[金阿只] 마리아와 재혼하였다. 마리아의 모친은 요한과 함께 우포도청에서 순교하였고, 마리아도 1870년에 좌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요한은 언제부터인가 서울 장동(長洞, 현 서울 중구 남대문로3가⋅회현동)에서 살았는데, 이때 집 앞에는 잡철전(雜鐵廛)을 열었고, 자신은 대궐의 문기수(門旗手)로 일하였다. 이때에도 동료들이 그의 성실함에 모두 탄복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839년의 기해박해 때 형 김종운(金宗云)이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뒤 얼마 안 되어 사망하였다.

요한이 다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은 1849년에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회장을 만나면서였다. 이후 그는 열심히 교리와 기도문을 공부하였고, 홍봉주(洪鳳周, 토마스)가 모셔온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에게 성사를 받았다. 또 자신의 집에 공소를 차려 많은 신자들이 베르뇌 주교에게 성사를 받도록 했으며, 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김홍범 요한은 베르뇌 주교의 시신을 안장하는 데 참여하였고, 교우들을 구하려는 생각에서 방물장수 신자를 시켜 ‘양민을 잘못 체포하고 있다’는 말을 사방에 퍼뜨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1867년에는 교우들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 중국으로 배를 보낼 때, 700냥의 돈을 후원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요한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 결과 그는 1867년 2월에 자신의 집에서 체포되어 우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친구로 지내던 포교와 문기수들이 여러 차례 그를 찾아와 “배교하고 나가서 자식과 집안을 보존하라.”고 달랬지만, 그는 “말씀은 고맙지만, 나는 이미 죽기로 작정한 사람이니 다시는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시오.”라고 대답하면서 자신의 결심을 드러내곤 하였다. 또 포도청에서의 문초와 형벌 중에는 다음과 같이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오랫동안 천주교를 믿어왔으니 배교할 수 없습니다. 비록 매를 맞아 죽는다고 하더라도 천주학을 버릴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이후 문초와 형벌이 계속되자 요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혀를 깨물었다. 중국으로 배를 보낸 일을 숨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 결과 그는 1867년 4월 12일(음력 3월 8일) 이후에 모진 형벌을 받고 옥으로 끌려간 뒤에 순교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 45세였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