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85 박원서 마르코

85. 박원서 마르코 (1817∼1867)

 

박원서 마르코는 대대로 수원 걸매(현 충남 아산시 인주면 걸매리)에 살던 밀양(密陽) 박(朴)씨 집안의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보명(譜名: 족보에 기록된 이름)은 ‘기문’(基文)이다. 1867년 수원에서 마르코와 함께 순교한 이 마리아는 그의 아내이고, 박의서 사바는 형이며, 박익서는 아우이다. 그의 집안은 선대에 이미 아산만의 방조제 축조와 간척 사업을 주도하여 지역 사회에 도움을 준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마르코의 집안에서 처음으로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조부 박종학(朴宗鶴, 1751~1836년)으로, 그 시기는 1784년 말에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되고 이어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에 의해 내포(內浦) 지역에 천주 신앙이 전파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그러므로 마르코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게 되었고, 부친 박상환(朴常煥)도 어린 자식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장성한 뒤 마르코는 전주 이씨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형제들과는 달리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회장을 맡아 열심히 활동하던 형 사바의 마음을 아프게 하곤 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나 교우들이 체포되자, 마르코와 형제들의 가족은 모두 박해를 피해 예산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수원 포교가 다시 들이닥쳐 걸매에 남아 있던 교우들은 물론 여사울에 살던 마르코와 마리아 부부, 마르코의 형제들과 사촌 박인서 등을 체포하였다. 이때 박원서 마르코는 형제들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순교를 다짐하였다.

 

내가 평소에는 진실 되게 천주를 공경하지 못했는데, 오늘 주님께서 나를 부르셨으니, 이번에 끌려가 죽게 된다면 우리 주님과 성모님께로 가서 살겠소.”

 

그러자 그의 형 사바 회장은 용기를 내서 “우리 삼형제 모두 주님을 위해 순교하도록 하자.”고 권면하였다. 그런 다음 수원 관아에 이르러 삼형제가 한결같이 천주교 신자임을 굳게 증거한 뒤 순교하였으니, 때는 1867년 3월이요, 당시 마르코의 나이는 50세였다.

순교 후 마르코와 형제들의 시신은 당질인 박웅진 바오로 등에 의해 거두어져 아산 맹고개(현 충남 아산시 인주면 냉정리)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1988년 9월 20일에는 삼형제의 무덤이 맹고개에서 확인 발굴되었으며, 같은 날 그 유해가 공세리 성당 경내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이어 1996년 9월 19일에는 성당 경내의 무덤 옆에 순교 현양비가 건립되었고, 2007년 11월 20일에는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된 납골식의 순교자 현양탑이 완공 봉헌되었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