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12 로베르 리샤르

12. 로베르 리샤르 신부(1900-1950)

 

로베르 리샤르(Robert Richard, 李東憲 로베르트) 신부는 1900년 10월 31일 프랑스 파리의 바티뇰(Batignolles) 본당 구역에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았다. 스물네 살이 되던 1924년 10월에 파리 이시 레 물리노(Issy-les-Moulineaux)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차부제품을 받은 뒤 1928년 6월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로 편입하였고, 1929년 6월 29일 사제품을 받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1930년 6월 17일 한국에 입국한 로베르 리샤르 신부는 한국어를 배운 뒤, 1931년 5월부터 경북 왜관 본당의 주임으로 사목하였다. 1939년 이후에는 대구 계산동 본당의 주임,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학장을 역임한 뒤 1945년 3월 말 일제 조선 총독부에 의해 대구 남산 성당에 연금되었다. 5개월 뒤, 8⋅15 해방으로 연금에서 풀려난 그는 치료차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1949년 다시 한국에 입국하였으며, 1950년 2월 충남 예산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로베르 리샤르 신부가 예산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며칠 뒤에는 가까이에 있는 온양 본당의 피에르 를뢰(Pierre Leleu, 노 베드로) 신부가 안부도 살피고 향후 대책도 협의할 겸 찾아왔다. 이때 그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성당에 머물러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다.

두 신부는 수철리 공소(현 예산군 예산읍 수철리) 신자인 황기완(요셉)이 고해 성사를 보러 예산 성당에 들를 때까지 함께 있었다. 이에 성사를 보고 난 황기완이 두 신부에게 피신을 권유하자, 그들은 한결같이 교우들이 (피난을) 가지 않는데, 신부가 갈 수 없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7월 8일 북한군이 아산 지역에 진입하자 피에르 를뢰 신부는 온양으로 돌아가지 못하였 7월 12일에는 북한군에 의해 로베르 리샤르 신부와 함께 예산 성당의 사제관에 연금되었다. 그런 다음 8월 20일에 예산 내무서로 압송되어 28일까지 그곳에 수감되었다. 그 뒤 로베르 리샤르 신부와 피에르 를뢰 신부는 트럭에 실려 북한 노동당에서 임시 수용소로 사용하던 대전 목동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으로 함께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천안 본당의 데지레 폴리(D. Polly, 심 데시데라토) 신부 등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수감 생활을 하였다.

그 뒤 유엔군이 북진한다는 소식을 들은 북한군은 퇴각을 준비하면서 9월 23-26일(또는 9월 25-26일) 사이에 수도원에 감금된 사람들을 수도원 뒤편 언덕으로 끌고 가 모두 처형하였다. 이때 로베르 리샤르 신부도 처형되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 굵은색 표시: 출간 이후 수정된 부분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

 

*사진 출처: 파리외방전교회 홈페이지(https://irfa.paris/missionnaire/3401-richard-robe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