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14 마리우스 코르데스

14. 마리우스 코르데스 신부(1909-1950)

 

마리우스 코르데스(Marius Cordesse, 孔 마리오) 신부는 1909년 9월 5일 프랑스 파리에서 장 코르데스(Jean Cordesse)와 로잘리 플라(Rosalie Pelat)의 아들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았다. 아쉽게도 그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935년 6월 29일 사제품을 받은 마리우스 코르데스 신부는 이블린(Yvelines)주에 있는 우당(Houdan) 본당에서 보좌 신부를 지냈다. 1937년 8월 15일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였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1938년 10월 23일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런 다음 1939년부터 울산 송대 본당(현 언양 본당)의 주임과 대구 대명동 본당(현 남산동 본당)의 주임으로 사목한 뒤 1941년 9월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어 1943년 2월에는 대구 화원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1948년 5월 8일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신설 대전지목구의 사목을 담당하게 되면서 그해 8월에 충남 당진 본당의 주임으로 전임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마리우스 코르데스 신부는 천안 본당의 데지레 폴리(D. Polly, 심 데시데라토) 신부, 합덕 본당의 필립 페랭(P. Perrin, 백 필립보) 신부와 함께 ‘성당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런 다음 성당을 지키고 있다가 7월 10일경 북한군에 체포되었고, 당진 내무서로 끌려가 심문과 위협을 당한 뒤 이튿날 아침에 석방되었다. 이때부터 마리우스 코르데스 신부는 신자들이 성당에 오는 것을 금지시켰다. 북한 노동당원들의 눈에 띄는 것은 위험을 초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또 마리우스 코르데스 신부는 성당에 머무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다가 일단은 가까운 신자 집으로 가서 사태를 관망하기로 하였다.

마리우스 코르데스 신부는 처음에 항곡리(현 당진시 고대면)의 김광수(안드레아) 회장의 집으로 가서 며칠 동안 머물렀다. 그러나 김 회장이 곤란을 당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신자들이 가장 많이 사는 구룡리 공소(현 당진시 구룡동)로 거처를 옮겼다. 그때 신부가 머문 집은 공소 경당이 있던 도곡 마을이 아니라, 그에 이웃해 있는 사근절의 송유문(요셉) 집이었다. 이렇게 거처를 옮긴 지 십여 일이 지난 뒤까지도 그는 공소 경당에 와서 미사도 봉헌하고, 신자들에게 성사도 주었다. 낮이면 사근절의 신자 집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경당으로 와서 잠을 자곤 하였다. 이때 청년 신자들이 교대로 마리우스 코르데스 신부와 함께 잠을 잤다고 한다.

8월 14일 무렵 신부의 거처를 탐문하고 다니던 북한군들이 구룡리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신자들을 색출하여 박준호(토마스) 공소 회장의 집으로 끌고 간 뒤 ‘신부가 있는 곳을 대라.’며 위협하기도 하고 사정없이 때리기도 하였다. 마침 출타하였다가 돌아온 박 회장도 마찬가지로 행패를 당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마리우스 코르데스 신부는 “나 하나 때문에 교우들이 폭행을 당해서야 되겠는가? 경당에 가 있을 테니 나를 붙잡아 가라고 하시오.”라고 하면서 경당으로 가서 기도를 바쳤다.

북한군에게 체포된 마리우스 코르데스 신부는 당진 내무서로 끌려가 나흘 동안 갇혀 갖은 문초를 당하였다. 그러다가 병 때문에 잠시 당진 성당에서 연금 상태로 머물게 되었다. 그때 김영환(타대오) 신학생이 성당으로 가서 신부를 만날 수 있었는데, 마리우스 코르데스 신부는 그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고 한다.

 

“박해가 시작되었으니 영세 문서나 교적, 미사 도구, 풍금, 제의 등을 안전한 곳에 숨겨 놓도록 하고, 몸조심하여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성당을 돌봐야 된다.”

 

8월 22일(또는 8월 24일) 마리우스 코르데스 신부는 성당에서 비밀리에 미사를 봉헌하였고, 오후에는 다시 당진 내무서로 끌려가 그곳에서 필립 페랭 신부와 만났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들은 다 같이 대전 형무소로 압송되어 수감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 뒤 유엔군이 북진한다는 소식을 들은 북한군들은 퇴각을 준비하면서 9월 23-26일(또는 9월 25-26일) 사이에 대전 형무소에 감금된 사람들을 형무소 안팎과 우물 등지에서 모두 처형하였다. 이때 마리우스 코르데스 신부도 처형되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

 

* 사진 출처: 파리외방전교회 홈페이지(https://irfa.paris/missionnaire/3600-cordesse-mari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