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15 피에르 를뢰

15. 피에르 를뢰 신부(1909-1950)

 

피에르 를뢰(Pierre Leleu, 노 베드로) 신부는 1909년 11월 3일 프랑스 캉브레(Cambrai)교구 오르쉬(Orchies)에서 페르낭 를뢰(Fernand Leleu)와 잔느 루셀(Jeanne Roussel)의 아들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았다. 열세 살 되던 1922년에 그는 솔렘(Solesmes)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28년 9월 12일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피에르 를뢰는 1936년 12월 19일 사제품을 받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1937년 5월 27일 한국에 입국한 피에르 를뢰 신부는 이듬해 5월 16일 부산 본당(현 범일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경북 왜관 본당의 주임, 대구 비산동 본당의 주임을 역임한 뒤 1948년에 휴가차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런 다음 1949년 7월 하순 다시 한국에 입국하여 충남 합덕 본당의 보좌로 지내다가 1950년 4월 초 온양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피에르 를뢰 신부는 예산 성당의 로베르 리샤르(R. Richard, 이 로베르트) 신부를 찾아갔다. 안부도 살필 겸 향후 대책도 논의하려는 것이었다. 이때 그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성당에 머물러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다.

두 신부는 수철리 공소(현 예산군 예산읍 수철리) 신자인 황기완(요셉)이 고해 성사를 보러 예산 성당에 들를 때까지 함께 있었다. 이에 성사를 보고 난 그가 두 신부에게 피신을 권유하자, 그들은 한결같이 “교우들이 (피난을) 가지 않는데, 신부가 갈 수 없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7월 8일 북한군이 아산 지역에 진입하자 피에르 를뢰 신부는 온양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7월 12일에는 북한군에 의해 로베르 리샤르 신부와 함께 예산 성당 사제관에 연금되었다가 8월 20일 예산 내무서로 압송되어 28일까지 그곳에 수감되었다. 그런 다음 피에르 를뢰 신부는 로베르 리샤르 신부와 함께 트럭에 실려, 대전 목동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임시로 마련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천안 본당의 데지레 폴리(D. Polly, 심 데시데라토) 신부 등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수감 생활을 하였다.

그 뒤 유엔군이 북진한다는 소식을 들은 북한군들은 퇴각을 준비하면서 9월 23-26일(또는 9월 25-26일) 사이에 수도원에 감금된 사람들을 수도원 뒤편 언덕으로 끌고 가 모두 처형하였다. 이때 피에르 를뢰 신부도 처형되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 피에르 를뢰 신부는 동창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 전쟁을 예상하는 글을 남겼다. 아울러 그는 다음과 같이 하느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순교에 대한 원의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 세상에 그분 나라의 확장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말할 수 없어! 내일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어! ‘주님, 당신의 손에 제 영혼을 맡깁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섭리 안에서의 신뢰! 가장 중요한 것은 좋으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이 그분을 사랑하게 하는 거야. ……

마지막으로 나는 간절히 기도해 달라고 오로지 네게 부탁한다. 내가 점점 더 겸손해지고 점점 더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나의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그분을 위한 고난을 견디어 내도록 나를 불러 주시고, 내가 좀 더 헌신적이고 가능한 사랑의 마음으로 그것을 할 수 있도록 말이야. 사실 가까이서 보면 순교는 자신을 믿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믿는 것을 요구해.”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