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16 토머스 쿠삭

16. 토머스 쿠삭 신부(1910-1950)

 

토머스 쿠삭(Thomas Cusack, 고 토마스) 신부는 1910년 아일랜드 클레어(Clare)주의 밸리코튼(Ballycotton)에서 마이클 쿠삭(Michael Cusack)과 브리짓 히피(Bridget Heaphy)의 아들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았다. 열여덟 살 되던 1928년에 달간 파크(Dalgan Park)의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1934년 12월 21일 사제품을 받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1935년 11월 한국에 입국한 토머스 쿠삭 신부는 한국어를 공부한 뒤 목포 본당의 보좌로 사목을 시작하였고, 1939년 7월 순천 본당(현 저전동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일제 당국은 토머스 쿠삭 신부를 순천 경찰서에 수감하였다. 토머스 쿠삭 신부는 얼마 뒤 석방되어 사제관에 연금되었으나 이듬해 목포의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선교 본부의 사제관으로 이송되어 다시 연금 생활을 하게 되었고, 1945년 5월 29일에는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홍천으로 이송되었다.

8⋅15 해방 이후 홍천에서 연금 생활이 풀려난 토머스 쿠삭 신부는 본국으로 휴가를 다녀온 뒤 1945년 11월부터 잠시 순천 본당 주임으로 사목하였고, 그 뒤 광주 본당(현 북동 본당)의 주임을 거쳐 목포 선교 본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49년 가을 목포 본당(현 산정동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이내 북한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한국 신자들은 토머스 쿠삭 신부를 ‘철인(鐵人) 신부’ 또는 ‘성인 신부’라고 불렀다. 그는 날마다 학생 교리반과 예비 신자 교리반, 신심 단체들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였고, 신자 방문, 특히 신앙이 약해진 신자들과 냉담 신자들을 방문하였다. 또 사목 관할 구역 내 병자들을 보살펴 주었고, 소년원을 찾아가 상담해 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7월 24일 무렵에는 북한군이 목포에 진입하였다. 토머스 쿠삭 신부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성당에 있는 성체를 다 거두어 영하였다. 그는 존 오브라이언(J. O’Brien, 오 요한) 보좌 신부와 함께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성당을 지켰고, 교우들을 위해 순교할 각오도 하고 있었다.

7월 25일 성당으로 들이닥친 북한군들은 토머스 쿠삭 신부와 존 오브라이언 신부를 불러내 목포 시내를 한 바퀴 돌게 하였다. 이때 토머스 쿠삭 신부는, 교우들이 자기 집에 숨도록 권유하였지만 폐가 될까봐 모두 사양하였다고 한다.

7월 30일 주일에는 북한군들이 다시 성당에 와서 토머스 쿠삭 신부에게 신자 명단을 달라고 요구하였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북한군들은 토머스 쿠삭 신부와 존 오브라이언 신부 그리고 광주지목구장 패트릭 브레넌(P. Brennan, 안 파트리치오) 몬시뇰을 함께 연행하여 목포 경찰서에 감금하였고, 이내 광주 교도소로 이송하였다. 토머스 쿠삭 신부는 연행되는 순간에도 신자들이 성사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고 한다.

8월 26일에는 미군 마카루미(A.Y. Makaroumis) 중위가 다른 군인 두 명과 함께 교도소로 끌려와 선교사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마카루미의 증언에 따르면 “선교사들은 수감자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노력하였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석 장의 담요조차 다른 수감자들에게 양보했다.”라고 한다.

얼마 뒤 북한군들은 토머스 쿠삭 신부와 함께 수감되어 있던 서른두 명을 끌어내 밤을 이용하여 서울 방향으로 이송하였다. 그러다가 대전 부근에 이르러 트럭이 고장 나자, 일행을 모두 도보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대전에 도착한 뒤에는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선교사들은 임시 수용소인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감금하였고, 미군들은 대전 형무소로 이송하여 수감하였다. 토머스 쿠삭 신부 일행은 그곳에서 강만수(요셉)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을 만났다.

그 뒤 유엔군이 북진한다는 소식을 들은 북한군들은 퇴각을 준비하면서 9월 23-26일(또는 9월 25-26일) 사이에 수도원과 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을 모두 수도원 뒤편 언덕으로 끌고 가 처형하였다. 이때 토머스 쿠삭 신부도 처형되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