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17 조제프 몰리마르

17.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1897-1950)

 

조제프 몰리마르(Joseph Molimard, 牟 요셉) 신부는 1897년 3월 22일 프랑스 님(Nîmes)교구 보베르(Vauvert)에서 루이 몰리마르(Louis Molimard)와 레오니 푀야드(Léonie Feuillade)의 아들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았다. 1915년 보케르(Beaucaire)의 생 펠릭스 소신학교를 졸업한 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고, 1924년 6월 29일 님교구의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품을 받았다. 이어 그해 9월 14일에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였고, 1925년에는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11월 12일 부산을 통하여 한국에 입국하였다.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는 1926년 5월 황해도 매화동 본당의 보좌로 사목을 시작하였다. 이어 6개월 뒤에는 경기도 병점 공소(현 화성시 병점동)의 사목을 맡아 1926년 11월 30일에 부임하였고, 곧 진위군의 비전리(현 평택시 비전동)에 새 부지를 매입하여 사제관을 건립하였다. 그런 다음 1928년 4월 14일 비전리 본당(현 평택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십여 년 동안 사목하였다. 그동안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는 성당을 지어 봉헌하였고, 본당 월보인 <성모월보>를 이용하여 신자들의 교리 교육과 신심 함양에 힘썼으며, 1934년 서정리(현 평택시 서정동)에 공소 경당을 신축하였다.

1937년 1월 본국으로 휴가를 떠났던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는 그해 11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평택 본당의 제3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듬해에 서정리 공소 경당을 성당으로 증개축하고 사제관을 신축하였고, 그해 10월에 신설된 서정리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사목하였다. 그러다가 1948년 5월 8일 대전지목구가 신설되자 그해 7월 30일 충남 금사리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가 본당 사목에서 가장 역점을 두고 또 성공을 거둔 분야는, 복음 전파 활동이었다. 비전리와 서정리에 건립한 경당이나 성당도 지역 사회에 천주교를 알리고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또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는 어린이를 사랑하였고, 어린이 사목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늘 근검절약하면서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한 뒤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는 논산 성당의 피에르 생제(P. Singer, 성 베드로) 신부를 만나고 돌아와 부여의 도앙골 공소(현 부여군 내사면 금지리)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곧 금사리로 돌아와 교우들에게는 당분간 성당에 나오지 말라고 당부한 뒤 혼자 미사를 봉헌하였다.

8월 20일(또는 8월 26일)에는 북한군들이 금사리 성당으로 몰려와 사제관을 수색하고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를 부여 내무서로 연행하였다. 이에 그는 이곳에서 한 달 남짓 옥고를 치른 뒤, 9월 16일 대전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9월 23-26일(또는 9월 25-26일) 사이에 수도원 뒤편 언덕으로 끌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학살되었으니, 당시 그의 나이 53세였다.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의 시신은, 학살 소식을 듣고 수도원 현장으로 달려간 금사리 본당 교우들에게 확인되었다. 신부의 수염과, 그가 입고 있던 수단 때문이었다. 에밀 보드뱅(E. Beaudevin, 정 에밀리오) 신부가 추후 확인한 사실에 따르면,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는 머리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당시 학살 현장으로 갔던 교우들은 시신이 발견된 장소 인근에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의 시신을 가매장하였다.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는 일찍이 유서를 통해 자신의 유산으로 부여나 규암에 성당이 건축되기를 희망하였다. 그 유언에 따라 1955년 9월에는 규암에, 1972년 12월에는 부여에 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뒷날 규암 본당에서는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의 세례명을 따 ‘성 요셉 의원’을 개원하였고,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의 유산과 보베르 본당 신자들의 후원금으로 규암 성당을 봉헌하였다.

한편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의 유해는 1953년 목동 성당 경내에 조성된 프란치스코 수도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가 1960년 대전교구 천주교 산내 공원 묘원(현 대전시 동구 삼괴동)으로 이장되었다. 또 2003년 4월 23일에는 평택 본당 신자들의 원의에 따라 그의 유해가 다시 평택 성당(현 경기도 평택시 비전동) 구내로 옮겨져 5월 10일에 안장되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본문 발췌: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