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20 유재옥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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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성당

20. 유재옥 프란치스코 신부(1898-1950)

 

유재옥(劉載玉) 프란치스코 신부는 1898년 2월 9일 경기도 화성군 갓등이(현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에서 유장렬(요한 세례자)과 류 바울라의 4남 1녀 가운데 넷째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고, 곧 용인 사기막(현 용인시 모현읍 오산리)으로 이사하여 5월 1일 사기막 공소에서 강도영(마르코) 신부에게 보례를 받았다. 어렸을 때는 서당에 다니다가 1911년 9월 30일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유재옥 프란치스코 신부의 일 년 후배인 구천우(요셉) 신부는 신학생 시절의 그를 이렇게 회상하였다.

 

“한 번도 교장 신부님께 불려가 꾸지람을 듣거나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없고, 인정미가 깊고 항상 친절하며, 사람을 잘 이끄는 매력이 있고, 큰 소리로 웃는 일이 없었습니다.”

 

1925년 6월 6일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품을 받은 유재옥 프란치스코 신부는 개성 본당 보좌로 임명되어 사목을 시작하였고, 1927년 5월에는 강원도 양양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어 12년을 사목하였다. 그는 양양 본당에 부임한 뒤 공소 회장 피정과 묵상회를 실시하였고, 부인회와 청년회 등 평신도 단체 조직과 활성화에 힘썼으며, 1937년에는 현재의 성당 부지(현 양양읍 성내리)를 매입하였다.

1939년 4월 25일 강원도 지역이 서울대목구에서 분리되어 춘천지목구로 설정되면서 유재옥 프란치스코 신부는 그해 6월, 황해도 사리원 본당에서 분리 신설된 겸이포 본당(1945년 송림 본당으로 개칭)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겸이포 본당에 부임한 뒤 그는 확보되어 있던 부지에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였고, 청년회와 성가대와 복사단을 설립하였으며, 꾸준히 지역 선교에 힘썼다. 그 결과 겸이포 부임 당시 1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던 본당 신자 수는 1944년에 677명까지 증가하였다.

유재옥 신부는 프란치스코 제3회 회원으로서 청빈과 극기의 삶을 살면서 신자들에게는 겸손과 순명과 인내의 크리스천 생활을 가르쳤다. 아울러 본당의 주보인 ‘예수 성심’ 신심과 순교 신심을 특히 강조하였고, 복사들을 비롯하여 어린이들을 사랑하였으며, 사제와 수도자 성소 계발에도 힘썼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전통 한약의 조제와 민간요법을 익혀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던 날, 일제 당국은 겸이포 제철소의 기밀을 탐지하였다는 혐의로 유재옥 프란치스코 신부를 체포해 수감하였다가 4개월여 만인 1942년 4월 18일에 석방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몸이 많이 쇠약해졌지만, 그렇다고 복음 전파와 공소 순방을 등한시하지는 않았다.

1945년 해방 이후 북한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유재옥 프란치스코 신부는 그들의 감시 대상이 되어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정치 보위부원들은 걸핏하면 신부를 찾아와 연행하려 하였으며, 그럴 때마다 청년회장 김계식(요셉)이 정치 보위부에 출두하여 조사에 응하곤 하였다. 이에 본당 신자들은 유재옥 신부에게 남하할 것을 간곡하게 권유하였지만, 그는 “한 마리의 양이라도 남겨 놓고는 절대로 피신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때부터 본당 신자들은 신부의 신변을 보호하려고 밤늦게까지 사제관에서 신부와 함께 생활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유재옥 프란치스코 신부가 납치된 것은 1950년 6월 24일 자정에서 이튿날 새벽 두 시 사이였다. 여느 때처럼 신자들이 자정까지 신부와 함께 있다가 귀가하였는데, 그 뒤에 정치 보위부원 두 명이 사제관으로 쳐들어와 신부를 납치한 것이다. 뒷날 확인된 사실에 따르면, 유재옥 신부는 정치 보위부 토굴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7월 1일 해주 교화소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으로 북한군이 패퇴하던 10월 4일에 동료 수감자 7명과 함께 해주 동면 해변 백사장에서 구덩이 파는 작업을 하였고, 이튿날 오전 6시경 전깃줄로 묶인 채 다시 그곳으로 끌려와 전날 파 놓은 구덩이에 생매장을 당하였다. 당시 유재옥 프란치스코 신부의 나이는 52세였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