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25 양덕환 안드레아

25. 양덕환 안드레아 신부(1895-1950)

 

양덕환(梁德煥) 안드레아 신부는 주선(柱善)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 1895년 10월 31일 충청남도 예산 간양골(현 예산읍 간량리)에서 양 야고보와 이 체칠리아의 아들로 태어나 1908년 9월 14일 서울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4년 6월 14일 사제품을 받은 뒤 강원도 풍수원 본당의 보좌로 사목을 시작하였다. 이어 1927년 4월 서울 약현 본당(현 중림동 본당)의 보좌로, 1928년 5월 경기도 제물포 본당(현 답동 본당)의 보좌로, 1929년 6월 다시 약현 본당의 보좌로 임명되었다. 양덕환 안드레아 신부는 1930년 11월에 강원도 횡성 본당(현 횡성읍 읍상리)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는데, 그곳에서 4년 과정의 공민학교를 설립하여 지역 사회를 위한 계몽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33년 5월 황해도 해주 본당(현 해주시 장춘동)의 주임으로 전임된 양덕환 안드레아 신부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사목에 전념하였다. 본당 주보 ‘편신’(片信)에 성경 해설 등 유익한 글들을 게재하여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 손발이 차가워지는 수족 냉증으로 미사조차 간신히 집전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3년 뒤인 1936년 5월 10일, 양덕환 안드레아 신부는 황해도 안악 본당(현 안악읍 신장리)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10년 동안 재임하면서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고, 본당의 정착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매주 신자들에게 『성교 요리 문답』의 일정 부분을 암기하게 하고, 저녁이면 신자들과 함께 성당에서 만과(저녁 기도)를 바쳤다. 한편 이 시기에 양덕환 신부는 피정 지도자로 다른 본당에 자주 초빙되곤 하였다. 1937년 여름에는 평양교구의 ‘제3회 평신도 하기 가톨릭 강좌’에서 ‘십계해의’(十戒解義)를 강의한 적도 있었다.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하고, 이듬해 5월 양덕환 안드레아 신부는 황해도 재령 본당(현 재령읍 문창리)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북한을 통치하던 공산주의자들은 종교 특히 천주교가 자신들의 사상과 서로 용납될 수 없는 종교라고 여겨 감시와 압박을 가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양덕환 신부는 1947년에 본원의 지시에 따라 월남하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을 도와주었다. 곧 재령 성심 의원의 이유순 아폴로니아 수녀와 장연 본당의 박순래 마리 알렉시오 수녀, 매화동 본당의 박 빈첸시오 수녀 등이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뒤에도 양덕환 안드레아 신부는 피신하지 않고 성당을 지키면서 성심 의원과 신자들을 보살폈다. 사리원 본당의 박우철 바오로 신부와 전덕표 안드레아 신부가 가끔 재령 성당에 왔다가 돌아갈 때는 “우리 잘 죽읍시다.” 하며 서로 격려하였다. 그렇게 석 달이 흐른 뒤 9월 말, 한 내무서원이 성당에 찾아와 종교인들을 모두 체포하기로 하였다는 당국의 방침을 몰래 알려 주었다. 이에 사제관 생활을 돕던 최현수 요안나와 다른 신자들은 양덕환 안드레아 신부에게 피신할 것을 여러 차례 권유하였지만, 양덕환 신부는 여전히 “양들을 두고 떠날 수 없다.”라며 이를 거절하였다.

10월 5일 저녁 7시경. 최 요안나는 저녁 식사를 하던 양덕환 안드레아 신부에게 ‘성당 부근 김영원 치릴로의 집 지하실에 은신용 땅굴을 파 놓았다.’고 하면서 다시 한번 피신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양덕환 신부는 이를 거절하고 사제관으로 올라갔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한 시간쯤 지난 뒤, 양덕환 신부와 함께 사제관에 있던 덕원 신학교의 루도비코 신학생은 최 요안나와 나탈리아(루도비코의 모친) 여회장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알렸다. ‘신부님이 화장실에 간 뒤에 돌아오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곧바로 사제관으로 달려갔으나 인근 과수원의 철조망이 절단된 채 사람들이 드나든 흔적만 남아 있었다.

이렇게 양덕환 안드레아 신부가 납치된 지 10여 일 만인 10월 17일에는 유엔군이 재령에 입성하였다. 이때부터 김피득 베드로 신부가 한 달가량 재령 성당에 머물면서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그동안 신자들은 김피득 신부와 함께 양덕환 신부의 행방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발견하지 못하였다. 아마도 양 신부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10월 17일 이전에 피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양덕환 안드레아 신부의 나이는 55세였다.

손 마리아 등 재령 본당의 신자들이 재령군 정치 보위부(옛 재령읍 수창리의 적산 가옥)의 지하실에 있던 물탱크 안에서 양덕환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을 발견한 것은, 11월 말(또는 12월 초)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후퇴할 무렵이었다. 이전에는 물탱크에 뚜껑이 덮여 있었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던 것을 혹시나 해서 확인해 본 결과였다. 그가 입고 있던 의복이나 외양으로 보아 양덕환 신부가 틀림없었다. 두 손이 묶인 채 입은 틀어 막혀 있었다. 그러나 어지럽고 절박한 상황이었으므로 신자들은 양덕환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을 미처 안장하지 못한 채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