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27 앙투안 공베르

27. 앙투안 공베르 신부(1875-1950)

 

앙투안 공베르(Antoine Gombert, 孔安國 안토니오) 신부는 1875년 4월 25일, 프랑스 로데즈(Rodez)교구에 속한 아베롱(Aveyron)의 캉불라제(Camboulazet)에서 조제프 공베르(Joseph Gombert)와 마리 라콩브(Marie Lacombe)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느님의 종’ 쥘리앵 공베르(Julien Gombert, 孔安世 율리아노) 신부는 앙투안 공베르 신부의 동생이다.

앙투안 공베르는 1893년 로데즈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다가 삭발례를 받고 1897년 9월 14일(또는 16일)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1900년 6월 24일 동생 쥘리앵 공베르와 함께 사제품을 받은 뒤 두 형제는 조선대목구 선교사로 파견되었고, 부산을 통하여 한국 땅을 밟은 뒤 1900년 10월 9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 뒤 주교관에 머물던 앙투안 공베르 신부는 10월 19일 공세리 본당(현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서 분리되어 설립된 경기도 안성 본당(옛 안성 구포동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한국어를 배우면서 첫 사목을 시작하였다.

앙투안 공베르 신부는 신자들을 돌보면서 지역 선교에 힘썼고, 아주 검소하게 생활하였다. 병자에게 약을 나눠 주거나 프랑스에서 가져온 포도나무 묘목을 널리 보급하는 등 지역 사회를 위하여 아무런 조건 없이 봉사하였다. 또 1909년 1월 15일에는 남자 어린이들을 위해 공교 안법 보통학교를 설립하였고, 1912년에는 여자 어린이들을 위한 학급을 증설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일본 경찰에게 쫓겨 온 주민들을 보호해 준 일도 있었다. 1922년에 이르러 본당의 신자 수가 1600명을 헤아리게 되자 앙투안 공베르 신부는 새 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하였고, 8월에는 이를 완공하여 10월 4일 경성대목구의 에밀 드브레(E. Devred, 유세준 에밀리오) 보좌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이처럼 33년 동안 안성 본당에서만 사목한 앙투안 공베르 신부는 1932년 9월에 서울 소신학교와 대신학교의 영성 지도 신부로 임명되어 안성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1936년부터는 혜화동 소신학교(곧 동성 신학교)의 영성 지도와 경리부장을 맡았다. 1948년부터는 신학교 옆에 있던 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원의 지도 신부를 맡았다.

1950년 6월 24일은 공베르 형제 신부들이 함께 사제품을 받은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바로 그 이튿날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앙투안 공베르 신부는 상경해 있던 동생 쥘리앵 공베르 신부, 성신 대학의 교수로 임명된 파리 외방 전교회의 셀레스탱 코요스(C. Coyos, 구인덕 첼레스티노) 신부와 함께 사제관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7월 15일 가르멜 수녀원에서 마리 메히틸드(M. Mechtilde) 수녀 등 네 명의 수녀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 소공동의 삼화 빌딩에 감금되었다.

앙투안 공베르 신부는 삼화 빌딩에 갇혀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민재판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고 나서 7월 19일에는 일행들과 함께 평양으로 이송되었으며, 9월 5일에는 평양 수용소를 떠나 9월 11일 만포(현 자강도 만포시)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들 일행은 고산진(현 만포시 고산리) 등지로 끌려다니다가 10월 31일 중강진(현 자강도 중강군 중강읍)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죽음의 행진’이 시작된 것이다.

이미 쇠약해져 있었던 공베르 형제 신부는 행진 과정에서 더욱 탈진하였고, 11월 8일 중강진에 도착한 뒤로는 더 이상 움직일 수조차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때 북한군들은 운동을 핑계 삼아 일행들을 혹한 속으로 불러내곤 했는데, 앙투안 공베르 신부는 그 과정에서 선종하고 말았다. 1950년 11월 12일로,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이어 이튿날 동생 쥘리앵 공베르 신부도 선종하자, 형제가 함께 폴 비예모(P. Villemot, 우 바오로) 신부 옆에 조악하게 마련된 무덤에 묻혔다.

선종하기 하루 전날, 앙투안 공베르 신부는 움직일 수조차 없는 몸을 이끌고 동료인 폴 비예모 신부 곁으로 가서 임종을 지켜 주었다. 마지막까지 그와의 약속을 지키고, 사랑의 의무를 실천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남긴 생활 법칙이었고, 형제적 사랑의 정신이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