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33 김정자 안젤라

33. 김정자 안젤라 수녀(1888-1950)

 

김(金)정자 안젤라 수녀는 1888년 2월 16일 서울에서 김 요셉과 박 가타리나의 딸로 태어나 ‘아가타’라는 세례명으로 유아 세례를 받았다. 그 뒤 약현 본당(현 중림동 본당) 출신으로 1905년 10월 1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입회한 뒤 ‘안젤라’라는 수도명을 받았고, 1916년 8월 24일에 첫 서원을 하였다. 1911년 4월부터 1919년 9월까지 인천 제물포 본당(현 답동 본당)의 분원에서 소임을 맡았고, 1920년 9월부터는 황해도 매화동 본당의 분원으로 파견되어 본당 경리와 사무를 맡았다. 매화동 본당에서 소임을 맡고 있던 때인 1931년 8월 15일에 종신 서원을 하였다.

1945년의 8⋅15 광복 이후 북한 천주교회가 공산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는데도 김정자 안젤라 수녀는 동료 수녀들과 함께 매화동 본당에서 운영하는 유치원과 시약소, 봉삼 학교의 사도직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김정자 안젤라 수녀는 근엄하고 참으로 기도하는 수도자였고, 한편으로는 학생들에게 신앙 교육을 철저히 시키는 교육자였다. 활달하면서도 온화하고 어머니같이 자애로운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본당의 부인회와 가톨릭 여자 청년회의 신앙 교육도 담당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북한 공산 정권의 탄압은 점차 심해졌고, 일요일에도 사람들을 동원하여 노동을 시킴으로써 미사에 참례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제대 위에도 십자가 대신 김일성의 사진을 걸도록 지시하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1948년 7월 24일부터는 수녀들에게 ‘수도복을 벗고 가르치도록 하고, 혁명 사업에 협조하라.’고 하였지만, 수녀들은 모두 이를 거절하였다. 그때부터 공산 당국에서는 수녀들의 행동을 일일이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 6월 25일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7월 17일에는 매화동 본당의 주임 이여구(李汝球) 마티아 신부가 피랍되었으며, 성당마저 몰수되었다. 그 결과 매화동에는 김정자 안젤라 수녀와 함께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와 강양자 마리 레지스 수녀, 이 세 명만 남게 되었는데, 10월 5일 밤 2시경에 근처에 살던 신자 요셉이 찾아와 ‘진작부터 죽이려던 회장과 강 수녀를 10월 18일에 죽이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 뒤로 수녀들은 매일 밤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묵주를 손에 쥔 채 선종을 준비하였다.

1950년 10월 15일경 새벽 5시, 북한 노동당원들이 매화동으로 쳐들어와 마을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하기 시작하였다. 김정자 안젤라 수녀와 동료 수녀들은 일단 이웃에 사는 김병률 씨의 집으로 가서 숨었지만, 얼마 안 되어 발각될 순간이 다가왔다. 수녀들은 함께 “주여, 당신 의향대로 되어지이다.”라고 기도하였다. 또 강양자 마리 레지스 수녀가 “지금 이 자리를 피할 도리가 없으니 다 같이 십자 성호를 긋고 상등 통회를 진심으로 발하고 치명 장으로 나아갑시다.”라고 말하자, 모두 용기를 얻어 함께 북한 노동당원들 앞으로 나갔다.

북한 노동당원들은 곧 체포해 온 오륙십 명의 교우들을 수녀들 앞에 묶어 놓고 매질하거나 살육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다음에는 수녀들도 때리고 찌르거나 베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김정자 안젤라 수녀가 가장 먼저 피투성이가 된 채 사망하였다. 당시 김정자 안젤라 수녀의 나이는 62세였다. 이어 목숨만 겨우 붙어 있던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마저 북한 노동당원들이 물러간 뒤 숨을 거두고 말았다. 강양자 마리 레지스 수녀만이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살아남은 여성 신자들 몇몇이 김정자 안젤라 수녀와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의 시신에 수도복을 찾아 입히고 관을 짜서 입관하였다. 그러나 안장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수녀원 앞마당에 안치하였다가 11월 2일에 장례를 치르고, 매화동 성당의 구내 묘지에 안장하였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