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42 김운삼 요셉

김운삼(金運三) 요셉은 1934년 6월 29일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일벽리(또는 일병리, 현 온천군 온천읍)에서 김준성과 정소희 체칠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세 살 때 부모를 따라 진남포(현 남포시)로 이주하였으나, 그해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평안도 박천(현 평안남도 박천읍)에 있는 할머니 슬하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박천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뒷날 어머니가 그를 평양으로 데려와 성모 보통학교로 전학시켰다. 당시 어머니는 미신에 빠져 있었다.

김운삼 요셉은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니는 동안 점차 천주교 교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5학년 때 ‘요셉’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하였다. 그는 속이 깊고 말수가 적은 청소년으로 느긋하고 순한 편이었으며, 성격이 원만해서 늘 웃는 얼굴로 친구들을 대하였다.

김운삼 요셉은 세례를 받은 다음부터 어머니에게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교리 문답을 읽으라고 자주 권하였지만, 그럴 때마다 핀잔만 들어야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소재 날의 의미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그런 날에도 독자인 귀한 아들에게 고기를 먹이려 하였고, 그럴 때마다 김운삼 요셉은 어머니를 설득시키곤 하였다. 그는 과도하게 음식에 집착하는 것도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면서 절제의 덕을 닦으려고 하였다. 김운삼은 평양의 기림리 성당(현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에 다니면서 날마다 미사 때 복사를 섰다. 아침마다 어머니가 성당에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이불을 덮어 버리면, 어느 틈엔가 빠져나가서 미사에 참례하였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김운삼 요셉은 언제나 성당에 먼저 들러 조배를 한 뒤에 귀가하였다. 그는 늘 같은 연배의 학생들과 함께 성당에서 조배하고 놀며 공부하기를 좋아하였다. 1945년의 8⋅15 광복 이후 관후리 주교좌성당의 재건 작업이 한창일 때였다. 그는 공사 현장에서 일을 도왔고, 손과 옷이 형편없이 더러워진 채로 귀가하곤 하였다. 이런 이유로 어머니의 꾸지람을 들으면, 그때마다 김운삼 요셉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먼 시골 사람들도 쌀을 가지고 와 며칠씩 묵으면서 일하고, 어떤 이는 반지도 빼놓고 가는 상황이니, 저는 이렇게 벽돌이라도 날라야 합니다.”

김운삼 요셉에 대한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비서 최항준 마티아 신부의 사랑은 각별하였다. 김운삼은 성모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상수구리(현 평양시 중구역 만수동)의 무순 공업 전문학교에 진학하였고, 그 뒤 주교의 복사가 되어 기림리 주교관에서 잔심부름하며 생활하였다. 김운삼 요셉은 본디 덕원 신학교에 진학할 생각이 있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1949년 5월 14일(음 4월 16일), 김운삼 요셉은 어머니의 생일날 친척이 사 온 옷과 운동화를 신고 주교관에 갔다. 거기서 그는 부감목 김필현 루도비코 신부의 요청으로 홍용호 주교에게 심부름을 가게 되었다. 대동군 서포(西浦, 현 평양시 형제산구역 서포1동)에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로 종신 서원자 면담을 하러 떠난 홍용호 주교에게 “북한 내무상 박일우가 주교님과의 면담을 요청해 왔음”을 알리려고 갔다.

김운삼 요셉이 서포로 떠난 뒤 복사 송은철 파트리치오도 서포로 갔고, 두 명 모두 홍용호 주교를 만나 김필현 신부의 전갈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수녀원을 나온 뒤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서포 감흥리(일명 가루게, 현 평양시 모란봉구역 진흥동)에서 뒤따라온 홍용호 주교와 함께 북한 노동당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되어 정치 보위부 유치장을 거쳐 평양 인민 교화소에 수감된 것이다.

김운삼 요셉은 북한 노동당원들에게 문초를 받을 때 “하느님을 믿지 않겠다고 하면 내보내 주겠다.”고 제안하자 “집에 가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천주님을 배반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리고 평양 인민 교화소에서 수감 생활을 할 때는 식사 때가 되면 반드시 성호를 긋고 기도하였다. 그러다가 1949년 12월(또는 1950년 1월)의 엄동설한에 감옥 안에서 동사하고 말았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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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