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46 윤갑수 시몬

관련 장소

예산성당

46. 윤갑수 시몬(1896-1950)

 

윤갑수(尹甲洙) 시몬은 1896년 12월 10일 황해북도 개풍군 토성면 옥산리에서 윤창규 이냐시오와 임 골롬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느님의 종’ 윤복수 라이문도는 그의 사촌 동생이고, 인보 성체 수도회의 설립자인 윤을수(尹乙洙) 라우렌시오 신부가 그의 동생이다.

부친 윤창규 이냐시오는 본디 개성에서 사업을 했었는데, 윤갑수 시몬이 일곱 살이 될 무렵 사업에 실패하였다. 그러고는 가족들을 데리고 남면으로 이주하여 충남 당진의 유서 깊은 교우촌인 원머리(현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에 정착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의 가족은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1906년 9월 28일에 합덕 본당(현 당진시 합덕읍 합덕리)에서 함께 세례를 받았다. 윤갑수도 이때 시몬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하였다.

윤갑수 시몬의 가족은 1927년 10월, 예산 본당(현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이 합덕 본당에서 분가하기 이전에 그 지역으로 이사하였다. 그 뒤 그의 부친 윤창규 이냐시오는 예산 공소의 강당을 지어 봉헌하는 등 신부를 모실 준비를 하였고, 본당이 설립된 다음에는 초대 본당 회장이 되었다. 윤갑수 시몬도 이러한 봉사 활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그 뒤 예산 본당 신자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봉사하던 윤갑수 시몬은 1941년에 6개월 동안 예산 경찰서에 수감된 적이 있었다. 동생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가 프랑스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에 관여하고 있었던 일과 관련이 있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미국의 윤을수 신부와 한국의 가족들이 불순한 연락을 하였는지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앞서 윤갑수 시몬은 예산 천주교회의 지도층 신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제 당국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미 조사 대상자 명단에 올라 있었다.

경찰서에 수감된 뒤, 경찰서장은 윤갑수 시몬에게 “당신은 종교에 미쳤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버릴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윤갑수는 이러한 압력에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1945년 광복 이후, 윤갑수 시몬은 예산 본당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7월 12일에는 북한군이 예산에 진입하였다. 윤갑수 시몬 회장은 7월 28일 북한군에게 체포되어 내무서에 수감되었고, 8월 1일에 일단 석방되어 감시 상태에 놓이자 이곳저곳으로 피신을 다녀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9월 8일에 다시 체포되어 수감되었는데, 그의 며느리 박동연 데레사는 뒷날 윤갑수 시몬 회장이 체포된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윤갑수 님은 6⋅25가 발발하고 예산 지역이 공산 치하로 들어가자 시골 공소 여기저기로 피신을 다니셨다. 피신을 다니시다가 마을 자유대에게 붙잡혀 신문을 당하셨다. 당시 집을 나가실 때 공과책(즉 기도서)과 묵주를 가지고 나갔다. …… ‘내가 이렇게 숨어 다니면 가족들과 교회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피해를 입는다.’며 내무서(지금의 예산 성당 자리)로 가셨다.”

 

윤갑수 시몬 회장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산 내무서 근처에 있는 방공호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북한군이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패주하기 바로 전날인 9월 27일 새벽에 세 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당시 윤갑수 시몬의 나이는 54세였다. 그 뒤 예산 본당에서는 1951년 9월 27일에 시몬 회장의 추모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그의 부친 윤창규 이냐시오 회장은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우리 윤씨 집안에 성인(聖人)이 났다.”라고 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