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49 송상원 요한

49. 송상원 요한(1924-1950)

 

송상원(宋相源) 요한은 1924년 4월 19일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에서 송익서(宋益瑞)와 문희성(文嬉成)의 아들로 태어나 21일에 유아 세례를 받았다.

그 뒤 그의 가족은 강경에서 당진의 합덕 성당(현 충남 당진시 합덕읍 합덕리) 인근으로 이주하였고, 송상원 요한은 본당 주임 필립 페랭(P. Perrin, 白文弼 필립보) 신부의 복사로 봉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본당 신자들은 그를 ‘송 복사’로 부르기 시작하였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소명에 충실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난 뒤에도 송상원 요한 복사는 여전히 페랭 신부를 도와 본당 일을 보살피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7월 13일에는 북한군들이 합덕에 진입하였다. 며칠 뒤 북한군들이 성당으로 페랭 신부를 찾아와 ‘미사를 드리지 마라.’고 엄포를 놓고 갔으나, 페랭 신부는 감시가 소홀한 이른 새벽마다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로부터 20여 일이 지난 8월 14일, 북한군 장교와 내무서원들이 다시 성당으로 들이닥쳐 페랭 신부를 체포하였다. 이때 송상원 요한 복사는 들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이러한 소식을 듣고는 곧장 성당으로 달려갔다. 페랭 신부는 이미 트럭에 실려 성당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고, 트럭을 막아섰던 본당의 윤복수 라이문도 회장도 막 체포된 상황이었다.

이를 본 송상원 요한 복사는 다짜고짜 그들을 막아서며 외쳤다. “나는 신부님을 모시는 복사다. 나도 함께 가겠다.” 그러자 북한 노동당원들은 그도 함께 트럭에 실어 당진 내무서로 압송하였다.

그 뒤 페랭 신부는 대전 형무소로 압송되었으며, 송상원 요한 복사와 윤복수 라이문도 회장은 함께 당진 내무서에서 수감 생활을 하였다. 합덕 본당 관할인 매산 공소(현 당진시 신평면 매산리)의 박영옥 안드레아 부회장과 원머리 공소(현 신평면 한정리)의 박원근 바르나바 회장도 북한군들에게 체포되어 그곳으로 끌려왔다.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면서 수감 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북한군은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전세가 불리해지자 후퇴를 준비하였다. 그러면서 당진 내무서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 대부분을 9월 28일 밤부터 29일 새벽까지 당진 읍내리의 공동묘지로 끌고 가서 처형하였다. 이때 송상원 요한 복사도 윤복수 라이문도 회장, 박영옥 안드레아 부회장 등과 함께 총을 맞고 순교하였다. 당시 송상원 요한 복사의 나이는 26세였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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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