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51 서경석 마르코

서경석(徐慶錫) 마르코는 1928년 4월 25일 평안남도 대동군 서천면 동포리의 서포(현 평양시 형제산구역 서포1동)에서 서정요 프란치스코와 여규식 마리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았다. 그의 가정은 박해 때부터 신앙을 지켜왔으며, 마르코도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철저한 신앙 교육을 받고 자랐다. 부친 서정요 프란치스코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소속인 큰누나 서원석 요셉 수녀는 1950년에 서경석 마르코와 함께 북한 노동당에게 희생되었다. 이들보다 앞서 희생된 서운석 보니파시오 신부는 그의 큰형이다.

서경석 마르코는 평양 성모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집안 사정으로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평양시 학무과에 급사로 취직하였다. 그 뒤 그는 한 장학관의 도움으로 평양 공업 전문학교 야간부에 입학하여 2년 과정을 마치고 전기 기술자가 되어 가계에 보탬이 되었다. 그는 1945년 8⋅15 광복 이후 평양 선교리(현 평양시 선교구역 선교1동) 변전소에 근무하였고, 그 뒤 부소장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의 6⋅25 전쟁은 모든 희망을 앗아갔고, 열심인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점차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1950년 10월 8일 밤 11시경, 양조장 사택에 살던 그의 가족은 양조장에 파견을 나온 정치 보위부원이 서정요 프란치스코에게 양조 회사 일로 의논할 것이 있다며 보위부로 데리고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 서경석 마르코도 다시 찾아온 보위부원을 따라 집을 나섰는데,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또한, 수도회가 임시 해산하여 집에서 머무르던 누나 서원석 요셉 수녀도 두 사람을 찾아 나섰지만, 마찬가지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10월 19일부터 평양에 입성하면서 북한군은 북으로 패주하였다. 이에 앞서 북한 노동당 보위부에서는 9월 말부터 수감된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서정요 프란치스코처럼 양조장 인근에 살다가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끌려간 사람들도 모두 이때 총살되었다. 서정요 프란치스코와 서경석 마르코를 비롯하여 서원석 요셉 수녀도 함께 수감되어 있었다가 총살된 것이 분명하다. 당시 서경석 마르코의 나이는 22세였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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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