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57 장두봉 안드레아

57. 장두봉 안드레아 신부(1917-1950)

 

장두봉(張斗鳳) 안드레아 신부는 1917년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현 남포특별시 천리마군) 송호리의 조개섬에서 태어나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어머니의 세례명은 수산나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과묵하고 착실한 성격을 지닌 그는 공소 회장 김덕연의 권유와 추천 덕택에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1931년 4월 장두봉 안드레아 신학생은 서울의 백동(현 혜화동) 소신학교 곧 동성 상업 학교 을조(乙組)에 입학하여 1936년에 졸업한 뒤, 1년을 쉬고 나서 1937년 4월 덕원 신학교에 진학하였다. 신학생 시절에 그는 몸가짐이 늘 단정하고 신앙심도 독실하였으므로 방학을 맞이하여 고향으로 가면 공소 교우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곤 하였다. 또 온순하고 명랑한 성격이어서 신학교 동료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였다. 반면에 몸이 허약한 편이었으므로 축구와 농구를 통하여 몸을 단련하려고 노력하였다.

1943년 12월 5일, 장두봉 안드레아 부제는 평양대목구장 서리 노기남 바오로 주교의 주례로 서울의 명동 대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1941년 12월 이후로 평양대목구의 외방 선교회 선교사들이 모두 연금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장두봉 안드레아 신부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으므로, 사제품을 받은 직후 평양 기림리(현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의 주교관에서 휴양하다가 1944년 4월 24일 순천 본당(현 평안남도 순천시 순천동) 주임으로 부임하였고, 그해 11월 강계 본당(현 자강도 강계시 동부동)의 주임으로 전임되었다. 그는 여전히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신자들의 신심 지도에 주력하였으며, 신자들은 덕행의 실천이 남다른 그를 성인 사제라고 부르며 따랐다. 그러나 8⋅15 해방 이후 장두봉 안드레아 신부의 건강은 다시 악화되었고, 1946년 9월에는 송호리 조개섬의 고향 집으로 가서 요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북한 공산 정권이 수립되었고, 1948년 말부터는 본격적으로 종교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때 중화 본당(현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읍)의 주임 강현홍 요한 신부가 정치 보위부원들의 손아귀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월남하자, 장두봉 안드레아 신부는 순교를 각오하고 아픈 몸으로 그곳에 부임하였다. 그는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면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흔들리지 않도록 격려하였고, 공산주의자들의 폭력에 신앙 정신으로 대처하였으며, 교회의 평화와 신자들의 염원이 성취되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권고하였다.

1949년 12월 6일부터 장두봉 안드레아 신부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앞두고 지학순 다니엘 신학생과 신자 한 명을 데리고 공소들을 순방하며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였다. 다음 날에는 중화군 마정면 검암리 공소(현 평양시 낙랑구역 송남리)와 남곶면 애포리 공소(현 평양시 낙랑구역 금대리)에서 성사를 집행하였다. 그날 저녁, 평양 대신리 본당(현 평양시 동대원구역 대신동) 청년 신자 두 명이 급히 찾아와 그에게 박용옥 티모테오 신부와 서운석 보니파시오 신부 등의 납치 사실을 알리며 피신하도록 권하였다.

장두봉 안드레아 신부는 할 수 없이 검암리 공소의 교우 집으로 피신하였으나, 12월 12일 그곳에서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되어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그 뒤 그는 다른 신부들과 마찬가지로 평양 인민 교화소의 특별 정치범 감옥에 투옥되어 1950년 10월 18일 국군의 평양 탈환 직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총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