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58 이재호 알렉시오

58. 이재호 알렉시오 신부(1919-1950)

 

이재호(李載虎) 알렉시오 신부는 1919년 4월 황해도 안악군 문산면 원성리 상촌(현 황해남도 안악군 금강리 상위동)에서 전주 이씨 이태환 시메온과 임용환 요안나의 아들로 태어나 매화동 성당(현 은천군 매화리)에서 유아 세례를 받았다. 부친 이태환 시메온은 1866년의 병인박해 순교자인 ‘하느님의 종’ 이의송 프란치스코와 김이쁜 마리아 부부의 손자로, 현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베드로 주교는 이태환의 손자, 곧 이재호 알렉시오 신부의 조카가 된다.

어려서 부모를 따라 평양으로 이사한 이재호 알렉시오는 오성 보통학교를 거쳐 성모 보통학교를 다녔다. 1934년 서울의 백동(현 혜화동) 소신학교, 곧 동성 상업 학교 을조(乙組)에 입학한 뒤 1939년에 졸업하였다. 그 뒤 함경도 덕원 신학교에서 수학한 뒤 1946년 3월 1일 평양 대신리 성당(현 동대원구역 대신동)에서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의 주례로 사제품을 받고 관후리 주교좌성당(현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의 보좌로 임명되었다.

신학생 시절부터 이재호 알렉시오는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다. 그는 방학 때는 조카들을 잘 돌보는 삼촌이었으며, 일제 강점기 말의 어려움 속에서도 쌀을 구해다 떡을 해 준 형수님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여 감사의 편지를 쓴 자상한 신학생이었다. 그는 사제품을 받고 신부가 되어 대신리 본당에서 봉헌한 첫 미사에서 “사람 낚는 어부는 못 된다고 하더라도 그 다랑치(그 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어부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하고 다짐하였다.

1947년 10월 건강이 나빠진 이재호 알렉시오 신부는 평양 서포(현 형제산구역 서포1동)에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지도 신부를 맡았다가 1948년 10월 평양 기림리 본당(현 모란봉구역 개선동)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이재호 신부는 착하고, 인정이 많았으며, 말이 적고 온화한 성품이면서도 강한 실천력을 지닌 사제였다. 순교자의 후손답게 수도자보다 더 청빈하게 살았고,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도 여전하였다.

그러나 북한 노동당의 교회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사목에 어려움을 겪었다. 형제들이 월남을 계획하면서 함께 남하하자고 권하자, 이재호 알렉시오 신부는 “양 떼를 버리고 갈 수 없다.”라고 하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당시 기림리 사제관에는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해산으로 내려온 이모 임준성 마리아 수녀와, 여동생인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이 마르타 수녀,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의 김영근 베다 부제 등이 함께 거처하고 있었다.

1949년 12월 7일 새벽 1시경, 평양시 정치 보위부원들이 이재호 알렉시오 신부를 체포하려고 기림리 사제관으로 들이닥쳤다. 그러자 모든 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이재호 알렉시오 신부는 성당으로 가서 성체를 영한 뒤 이모 수녀와 여동생 수녀에게도 성체를 영해 주고, 이모 수녀가 미리 준비해 둔 솜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때 이모 수녀는 본당 회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시간을 끌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또한 새벽 미사에 오던 한 할머니가 보위부원들을 몸으로 막아섰지만 그들은 할머니를 넘어트리고 발길질을 한 뒤 이재호 알렉시오 신부를 차에 태우고는 사라져 버렸다. 그때가 새벽 5시경이었다.

그 뒤 이재호 알렉시오 신부는 다른 신부들과 마찬가지로 평양 인민 교화소의 특별 정치범 감옥에 투옥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1950년 10월 18일 국군의 평양 탈환 직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총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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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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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