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59 서운석 보니파시오

59. 서운석 보니파시오 신부(1922-1950)

 

서운석(徐雲錫) 보니파시오 신부는 1922년 5월 14일 평안북도 의주 성당(현 의주군 의주읍 동외동)에서 서정요 프란치스코와 여규식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나 5월 17일에 종조부인 서병익 바오로 신부에게 유아 세례를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부모의 엄격하고 철저한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성장하였다. 부친 서정요 프란치스코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소속인 큰누나 서원석 요셉 수녀 그리고 동생 서경석 마르코는 1950년에 서운석 보니파시오 신부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들에게 희생된 ‘하느님의 종’들이다.

서운석 보니파시오는 순안 초등학교와 평양의 성모 학교를 졸업한 뒤 1936년 서울의 백동(현 혜화동) 소신학교 곧 동성 상업 학교 을조(乙組)에 입학하여 1941년에 졸업하였다. 그런 다음 덕원 신학교에 진학하여 학업을 마친 뒤, 1948년 10월 10일 신축 중이던 관후리 주교좌성당(현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 지하의 임시 성당에서 ‘하느님의 종’ 최항준 마티아 부제와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집전자는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였다. 서운석 보니파시오는 신학생 시절에는 말이 없고 조용하면서 온순하고 차분한 데다가 단정하고 깔끔하였으며, 어린 나이에도 예의바르고 신심이 깊어 동료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다.

사제 수품 뒤 서운석 보니파시오 신부는 관후리 주교좌성당의 보좌로 임명되어 김필현 루도비코 신부의 사목을 도왔고, 1949년 6월 10일 김필현 신부가 체포된 뒤에는 홀로 성당을 지키면서 신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다가 그해 12월 6일 정치 보위부원들이 성당으로 들이닥치자, 서운석 신부는 각오하였던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성체 강복을 마친 뒤 제대 앞으로 나와 감실의 성체를 모두 신자들에게 영해 주고 체포될 준비를 하였다.

이때 신자들은 서운석 보니파시오 신부를 일단 사제관으로 모시고, 밖에서 정치 보위부원들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신자들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서운석 보니파시오 신부는 스스로 사제관을 나와 보위부원들과 함께 평양시 인민 위원회로 갔다. 그곳에서 대신리 본당의 박용옥 티모테오 신부를 만났다. 서운석 보니파시오 신부는 관후리 주교좌성당의 양도 문제로 북한 노동당원들과 논쟁을 벌이다가 밤 11시경에 석방되어 박용옥 신부와 함께 관후리 성당의 사제관에 도착하였다.

관후리 본당 신자들이 서운석 보니파시오 신부와 박용옥 티모테오 신부를 본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튿날 12월 7일 새벽 3시경, 성당으로 들이닥친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두 신부가 함께 납치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 서운석 보니파시오 신부와 박용옥 티모테오 신부는 다른 신부들과 마찬가지로 평양 인민 교화소의 특별 정치범 감옥에 투옥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1950년 10월 18일 국군의 평양 탈환 직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총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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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