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61 홍도근 요한 세례자

61. 홍도근 요한 세례자 신부(1915-1950)

 

홍도근(洪道根) 요한 세례자 신부는 1915년 4월 평안북도 의주군 비현(현 피현군)에서 홍건일 마르코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50년 북한군에게 희생된 ‘하느님의 종’ 홍건환 갈리스토 신부는 그의 숙부이다.

홍도근 요한 세례자는 1930년 4월 서울의 소신학교 곧 남대문 상업 학교(1931년 동성 상업 학교로 개칭) 을조(乙組)에 입학한 뒤 학업을 마치고, 덕원 신학교로 진학하였다. 그는 특히 과학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전기와 전화, 라디오 등 기술 분야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기에 ‘한국의 토마스 에디슨’이란 애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기도나 식사 시간을 잃어버릴 정도로 한 가지 일에 몰두하다가 꾸중을 들은 적도 있었다. 반면에 가끔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는 건망증도 있었다.

1940년 11월 8일 홍도근 요한 세례자 부제는 대신학교 과정을 모두 마친 뒤 관후리 본당(현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에서 평양대목구장 오세아(William F. O’Shea, 吳 굴리엘모) 주교의 주례로 사제품을 받았다. 그런 다음 대신리 본당(현 평양시 동대원구역 대신동)의 보좌를 거쳐 1942년 2월 의주 비현 본당의 주임, 1943년 4월 기림리 본당(현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의 주임, 1944년 4월 24일 강계 본당(현 자강도 강계시 동부동)의 주임, 1944년 11월 기림리 본당의 주임, 1945년 10월 영유 본당(현 평안남도 평원읍)의 주임 등을 역임하였다.

홍도근 요한 세례자 신부는 두려움을 모르는 영웅적인 믿음의 소유자로 신자들의 영신 지도에 힘썼다. 그는 깊은 신앙심과 투철한 순명 정신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5년 동안 여섯 개 본당으로 전임되었음에도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기림리 본당 재임 시에는 대목구청 경리와 순천 본당의 주임까지 겸하면서 위축된 교회 활동을 회복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신자들을 무척 아끼고 사랑하였으며, 어린이와 학생들을 사랑하면서 그들에게 사제 성소를 심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영유 본당의 재임 시절에는 자신과 수녀들의 식사를 줄여 가면서 양로원 노인들을 봉양하였다.

그는 어느 날 가난한 교우에게 다음과 같이 용기를 북돋아 준 일도 있었다.

 

“들판의 꽃을 아름답게 입히시고 새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하느님께 굳은 믿음을 가지고 비록 내일 먹을 것이 없다 해도 주일과 축일을 잘 지킨다면, 하느님께서 틀림없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1949년 5월 홍도근 요한 세례자 신부는 평양 관후리 주교좌성당 청년들의 피정을 지도하고 영유에 돌아와서는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신자들에게 전하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와 같이 공소를 순회하는 등 본당 사목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2월 10일 밤 12시 30분경, 영유 내무서원 하나가 성당을 돌아보고는 돌아갔다. 이때부터 요한 세례자 신부는 자신이 체포될 것을 예견하고 성당의 성체를 모두 거두었다. 그런 다음 본당 수녀원으로 가서 서원 만기일이 다가온 수녀의 서원 갱신을 받아 주고, 수녀들과 교회 일을 돕는 젊은이에게 성체를 영해 주었다. 이때 수녀들이 “잠시라도 몸을 피하시라.” 하고 애원하자, 요한 세례자 신부는 “양을 버린 목자를 보았느냐?”라고 반문하면서 이들의 간청을 일축하였다. 바로 그 이튿날인 12월 11일 새벽 5시, 갑자기 성당 종소리가 울렸다. 이에 놀란 본당 수녀들과 신자들이 사제관으로 달려갔지만, 요한 세례자 신부는 이미 체포되어 사라진 뒤였다.

그 뒤 그는 다른 신부들과 마찬가지로 평양 인민 교화소의 특별 정치범 감옥에 투옥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1950년 10월 18일 국군의 평양 탈환 직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총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