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63 이경호 안셀모

63. 이경호 안셀모 신부(1918-1950)

 

이경호(李京鎬) 안셀모 신부는 1918년 평안남도 강서군 성태면 연곡리(현 대동군 연곡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없고, 어머니가 평원군 숙천 본당(현 안남도 숙천읍)의 유급 전교 회장으로 활동한 사실과,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1949년 북한 노동당원들에게 피랍되어 행방불명된 강유선 요셉 회장은 그의 외삼촌이다.

이경호 안셀모는 1940년 3월 서울의 백동(현 혜화동) 소신학교 곧 동성 상업 학교 을조(乙組)를 졸업하고, 그해 4월 덕원 신학교로 진학하였다. 조용하고 꼼꼼하며 차분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신학교 시절에 라틴어를 잘하였고, 미술에도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이어 이경호 안셀모 부제는 1947년 12월 27일 석원섭 마르코 부제와 함께 신축 중이던 평양 관후리 주교좌성당 지하의 임시 성당에서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의 주례로 사제품을 받았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아 주교관에서 휴양하며 기림리 본당(현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의 성무를 도와주게 되었다.

1948년 9월 이경호 안셀모 신부는 안주 본당(현 평안남도 안주시 등방산동)의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이미 북한 공산 정권이 수녀원을 폐쇄하고, 사목 활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하는 등 교회 탄압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이경호 신부는 공산 정권의 갖은 방해와 감시로 침체되어 가는 본당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하였고, 위축되어 가는 신자들에게 신앙 선조들의 순교 정신을 불어넣어 주는 등 신앙심을 북돋아 주려고 노력하였다.

이경호 안셀모 신부는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날인 1950년 6월 24일 오후 3시경,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되어 안주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그런 다음 그해 10월,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으로 북한 인민군이 패주하기 시작하였을 때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청천강 백사장으로 끌려가 총살되었고, 그 뒤 그곳에서 시신이 확인되었다. 당시 이경호 안셀모 신부의 나이는 32세였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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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