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64 조문국 바오로

64. 조문국 바오로 신부(1921-1950?)

 

조문국(趙文國) 바오로 신부는 1921년 5월 평양시 관후리(현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에서 조봉윤 요셉과 곽인숙 아가타의 장남으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았다. 부친 요셉은 뒷날 중국으로 건너가 처남 곽연성(郭然盛, 일명 郭宇明) 요셉 곧 바오로의 외삼촌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생을 마쳤다고 한다.

조문국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공부도 곧잘 하였고 신체도 건장하였다. 그러므로 본당 신부의 총애를 받아 평양의 성모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의 백동(현 혜화동) 소신학교 곧 동성 상업 학교 을조(乙組)에 진학하였다. 이때 모친이 “중도에 그만둘 것이면 아예 가지 않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지만, 그는 의지를 가지고 덕원 신학교에 들어갔다. 조문국 바오로는 신학교 시절에는 모든 일에 성실성과 책임감을 보여 줌으로써 다른 신학생들의 모범이 되었고, 같은 평양대목구 출신의 후배 석원섭 마르코 신학생이 학업에 어려움을 겪자 열심히 그의 학습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1945년 덕원 신학교를 졸업한 조문국 바오로 부제는 12월 27일 평양 상수구리(현 평양시 중구역 만수동)의 임시 주교좌성당에서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의 주례로 사제품을 받았다. 그 뒤 관후리 주교좌성당의 보좌로 임명된 조문국 바오로 신부는 주교 비서 겸 대목구의 경리도 맡아보았으며, 특히 일본 강점기 말에 징발된 관후리 주교좌성당의 부지를 환수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1946년 9월 평양 기림리 본당(현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의 주임으로 임명된 뒤에도 주교 비서와 경리 업무를 겸하였다.

1948년 9월, 조문국 바오로 신부는 진남포 본당(현 남포시 와우도구역 룡정동)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사목하는 동안 그는 냉담자 회두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고, 본당 신자들의 신심 함양과 교리 교육, 신학생 양성 등에 힘썼다. 신앙심이 해이해진 주일 학교 학생이 회두하도록 사랑과 지혜를 다하여 돌보기도 하였고, 복사 어린이들에게도 많은 애정을 보여 교회 행사에 꼭 참여시키고 사제 성소를 받도록 배려하였다.

한편 날이 갈수록 북한 공산 정권의 교회 탄압은 노골화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1949년 5월 14일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가 노동당원들에게 체포되자, 조문국 바오로 신부는 대재(단식재)를 지키면서 자신도 체포될 준비를 하였다.

1949년 6월 3일, 조문국 바오로 신부는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보안서로 연행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러자 본당 신자들은 긴급 연락망을 만들고 체포에 대비하는 등 조문국 신부를 적극 보호하고자 하였다. 조문국 바오로 신부는 그 와중에도 미래를 생각하여 신학생들을 월남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또 12월 24일에는 진남포 성당으로 몰려온 평양 신자들을 위해 성탄 자정 미사를 집전하고, 그들을 각 신자 집에 나누어 유숙하도록 하였다.

얼마 뒤 조문국 바오로 신부는 본당의 윤공희 빅토리노 차부제에게 일찍이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에게 들었던 말이라고 하면서 “언젠가는 평양대목구 사제 전원이 희생될 것입니다. 그때를 대비해 누구든 한 사람은 남한으로 내려가 평양대목구의 재건을 준비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런 다음 월남 준비를 하다 말고 “이것이 살고 싶다는 인간적인 유혹이 아닌가?”라고 하면서 모든 것을 중단하였고, “끝까지 교우들과 함께하겠다.”라고 선언하였다. 또 신자들이 남하를 권유하자, 조문국 신부는 “목자로서 교회와 신자들을 지킬 사명이 있을 뿐 그 밖의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소.”라고 하면서 이를 일축하였다.

1950년 4월 조문국 바오로 신부는 북한 공산 정권이 성당과 사제관을 강제로 징발하자 본당 양로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어 양로원마저 빼앗긴 뒤에는 나 요셉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차재영 루치아의 집에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러다가 1950년 6월 25일 새벽 1시경,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납치되어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아마도 조문국 바오로 신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처에 수감되어 있다가 그해 10월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으로 북한 인민군이 패주하기 시작하였을 때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