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66 이순성 안드레아

66.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1895-1950?)

 

이순성(李順成) 안드레아 신부는 1895년 11월 28일 강원도 이천군 산내면 용포리 대곡동(큰골, 현 판교군 용포리)에서 이명룡(李明龍) 바오로와 박 페트로닐라의 아들로 태어나 1896년 3월 14일 유아세례를 받았다.

1908년 9월 26일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에 입학한 이순성 안드레아는 1923년에 학업을 마친 뒤 5월 20일 사제품을 받고 6월 2일 경기도 행주 본당(현 고양시 행주외동)의 주임으로 임명되어 사목하였다.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는 3년 뒤인 1926년 5월 황해도 해주 본당(현 해주시 장춘동)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가 1928년 5월 황해도 은율 본당(현 은율군 은율읍)의 주임으로 전임되었다. 은율 본당에 재임하는 동안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는 ‘해성 야학원’을 개설하여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는 비신자들에게도 호평을 받을 정도로 성품이 온화하고 자상하였으며, 불우한 이웃을 돕는 데 적극적이었다.

1934년 8월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는 경기도 안성 본당(현 안성시 구포동)의 주임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폐결핵으로 황해도 신계군 고면 태을리에 있는 동생 이근성 야고보의 집에서 요양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1936년 10월경 인근에 있는 정봉 본당(현 황해북도 신계군 정봉리)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는 병으로 쇠약해진 상태였지만, 미사 강론을 열정적으로 하여 신자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고 한다. 그 뒤로도 그는 일제 말기의 고난과 공산 정권의 반종교 정책을 겪으면서도 본당 사목을 무리 없이 이끌어 가려고 노력하였다.

1949년부터 북한 공산 정권의 교회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노동당원들이 정봉 성당에 찾아와서는 느닷없이 성당의 풍금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였고, 급기야는 성당 자체를 인민 위원회에 양도하라고 협박하였다. 이에 기가 막힌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는 그들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이순성 신부가 보는 앞에서 풍금과 성물들을 파괴하고 제의를 찢는 행패를 부린 뒤에야 철수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극도의 위협을 느꼈지만,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성당을 지켰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지 열흘이 지난 7월 5일 오전 10시경, 마침내 우려하였던 일이 발생하였다. 신계읍 정치 보위부원 두 명이 찾아와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면서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를 차에 태우고 가 버린 것이다. 그 와중에도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는 성당으로 달려온 신자들에게 “내가 나오지 못하게 되면 아무라도 감실을 열고 성체를 영하도록 해라.” 하고 당부하였다. 그 뒤 정봉 성당은 노동당원들에게 점거되고, 성모상은 그들의 몽둥이에 맞아 부서지고 말았다.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의 행방이 알려진 것은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으로 북한 인민군이 후퇴하던 1950년 10월 경이었다. 해주 동면 해변 백사장에서 구덩이를 파고 있는 이순성 신부의 모습이 목격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는 유재옥 프란치스코 신부처럼 해주 교화소에 수감되었다가 자신이 파 놓은 그 구덩이에 생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