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67 이여구 마티아

67. 이여구 마티아 신부(1897-1950)

 

이여구(李汝球) 마티아 신부는 1897년 2월 6일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옛 수리산 아래 산밑 공소)에서 이 토마스와 변 체칠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이상규 토마스는 본디 충청도 내포에서 살았으나, 박해를 피해 수리산 산밑 공소로 이주하였다가 의왕을 거쳐 쌍학리(현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쌍학리)에 정착하였다. 이여구 마티아가 부제품을 받은 것은 이때였다.

이여구 마티아는 1911년 9월 30일 서울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에 입학하여 1925년에 학업을 마치고, 그해 6월 6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이여구 마티아 신부는 제물포 본당(현 인천 답동 본당)의 보좌 신부로 사목을 시작하여, 1928년 5월에는 부여 금사리 본당(현 부여군 구룡면 금사리)의 주임으로, 1937년 5월에는 황해도 매화동 본당(현 황해남도 은천군 매화리)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금사리 본당 재임기에 이여구 마티아 신부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공소 회장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이여구 마티아 신부는 신학교 시절부터 공자님으로 통할 만큼 성덕(聖德)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성 비안네(J. M. Vianney) 신부의 극기와 보속의 삶을 본받고자 노력하였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는 언제나 사제로서의 본분을 잘 지키려고 하였다. 매화동 본당 시절에는 본당 자립에 힘써 큰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1945년 8⋅15 해방 이후 이여구 마티아 신부는 공산 치하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본당의 봉삼 학교는 인민학교로 흡수되어 공산주의자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학생들은 일요일에도 평일처럼 수업을 받게 되어 주일 미사에 참석할 수 없었고, 어른 신자들도 일요일의 노력 동원으로 말미암아 주일 미사 참석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이여구 마티아 신부는 주일 미사를 새벽 3시에 봉헌하여 신자들이 미사에 참석한 뒤 노력 동원에 나갈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한편 북한의 토지 개혁으로 성당의 부동산은 전부 몰수되었고, 이여구 마티아 신부와 본당 수녀들도 성당 부근에 있던 과수원에서 자작농 명목으로 일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북한 공산 정권의 교회 탄압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특히 이를 전후로 곳곳의 본당 신부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본당 신자들은 이여구 마티아 신부를 보호하려고 자신들의 집에서 밤을 지내라고 간청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아니오. 나는 언제나 천주께서 내게 주신 목적을 사수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사제관으로 향하곤 하였다.

1950년 7월 17일 새벽 1시 30분경, 마침내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사제관에서 기르던 개들이 크게 짖는 소리를 듣고 본당의 강양자 마리 레지스 수녀가 급히 사제관으로 달려갔지만, 창문이 열린 채 이여구 마티아 신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리 레지스 수녀는 곧바로 동료 수녀들과 함께 신부를 찾아 나섰다. 몇십 리 되지 않은 곳에서 고장으로 서 있는 트럭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트럭 위에는 흰 수단을 입은 이여구 마티아 신부가 있었다. 마리 레지스 수녀는 얼른 트럭으로 다가가 사제관에서 가져온 옷을 전해 주려 하였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위협 때문에 물러서고 말았다. 수녀들은 하는 수 없이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트럭이 떠난 뒤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이여구 마티아 신부의 행방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 단지 황해도 지역에서 사목하던 다른 신부들처럼 모처에 수감되었다가 뒷날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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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